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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크리티크] 위선과 비-위선의 허위적 경계를 넘어, 끝내 <해피엔드>의 자리로
[남유랑의 시네마크리티크] 위선과 비-위선의 허위적 경계를 넘어, 끝내 <해피엔드>의 자리로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19.09.1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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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의 무리한 유희와 그 불가피성”

카메라는 왕왕 장난을 걸어오곤 한다. 대개의 경우라면, 특별히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말이다. 일어난 사태의 정황을 포착하고 식별하는 작업이 별다른 무리 없이 가능할뿐더러, 그 이면에서 무엇을 의도하였다거나 혹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조차도 그리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가 있을 것이기에. 하지만 상황이 늘 그렇게 흘러가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카메라의 말 걸기 기획엔 여간해선 그 정체를 헤아리기가 어렵다든지, 그 의중을 오해해버리기 쉬운, 꽤나 까다로운 성질의 것들 또한 존재하니 말이다. 이때 주의력을 잃고서 걸려 넘어지게 될 경우 자칫하면 해석의 이정표 자체를 잃어버리는 위험에 부대낄 수 있다. 분명 그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일이다. 관람객들‘만’ 영화의 존재를 요청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텍스트 또한 관람객을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 보이고/읽힘으로써만 ‘비로소’ 영화는 존재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환언하자면, 확실히 양자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이러한 대전제에도 불구하고 만일 어떤 영화 텍스트가 이 관계를 위협할지도 모를 만할 위기를 구태여 무릅쓰고 있다면, 그 이유는 그렇게까지 함으로써 전달하고픈 바가, 혹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도무지 도달하기가 힘겨운 어떤 부분이 분명 존재하는 까닭이라고 할 테다. 여하간 애당초 피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면 갑절의 주의를 기울일 수밖엔 없으리라. 허면, 실수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특이한 말 걸기’ 작업이 텍스트 전체와 맺고 있는 모종의 관계성을 보다 세심히 들여다보는 일이 동반되어야 마땅할 테다. 그리고 그 일에 가장 효과적인 작업은 촘촘히 연결된 질문의 망을 찬찬히 펼쳐나가는 것이라고 말해볼 수가 있을 게다. 질문들이 서로 견주고 엮어지는 동안에 숨은 비밀이 환히 밝혀질 수 있도록 말이다.

 

“매체와 매체, 어쩌면 프레임과 프레임의 사이-공간”

다른 무엇보다도 <해피엔드>에서 특기할만한 의구심을 유발시키는 지점은 스크린에 난입해오는 ‘핸드폰 카메라 플랫폼’이랄 수 있겠다. 영화 텍스트는 휴대전화에 내장된 카메라의 촬영장면으로 시작하여 ―매한가지로 유사한― 촬영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반면, 그 사이에 놓인 거의 대부분의 장면들은 일반적인 영화문법과 구성을 따른다. 그렇다면 이물감을 유발시키는 이 독특한 촬영기술의 의미에 온전히 가닿기 위해서 ―미더운 영상독해에 더하여― 과연 어떠한 질문들을 던지고 또 답해보는 일련의 과정들이 요청된다고 말해볼 수 있겠는가? 개중에서도 가장 우선적으로 소명돼야 할 건 ‘어떤 대상이 핸드폰 촬영의 방식을 통해 제시되고’ 있느냐의 문제라고 할 테다. 더불어 역으로 뒤집어본다면, 이 문제의 해명과정은 그 밖의 다른 존재들이 어째서 핸드폰 촬영기법에 선택되지 않았는지를 풀이하는 과정이 돼주기도 할 터이다.

 

<핸드폰 촬영기법의 돌연한 개입1>

 

<핸드폰 촬영기법의 돌연한 개입2>

 

마스터쇼트에 등장하는 ―아마도 에브의 엄마로 지칭되는― 여인과 우리 안의 햄스터, 그리고 본편에 등장하는 로랑가문의 갓난아기와 명목상의 가주인 늙은 조르주가 핸드폰 촬영에 포함되는 전부라고 말해본다면 옳을 게다. 그러면 이들이 가진 공통점을 무엇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을까. 아무래도 ‘투명하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고선 그 이상의 논의를 풀어나가는 게 좀 힘겨울 성싶다. 물론, 여기서 투명하다는 게 순진하다거나 깨끗하다는 둥의 이야기와는 무관하단 점을 먼저 일러두어야만 하겠다. 적어도 선(악)이라는 낡은 관념과 등치되는 건 아니란 뜻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감춘 것 없이 솔직하다’는 표현으로 번역해보는 편이 한결 옳을 터이다. 갓난아이의 경우라면 구태여 이 솔직함을 증명하고자 다른 설명을 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면 ‘엄마’의 사례를 조금 더 꼼꼼히 살펴보는 편이 좋겠다.

세 번에 걸쳐 여인이 촬영되는 장소는 욕실과 부엌과 침소(잠자리), 다시 말해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들이다. 이처럼 삶의 사적인 측면들마저 가감 없이 타자의 시선 속에 포획된다면, 비교적 공적인 영역들이야 굳이 더 따질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나신을 꿰뚫어본다는 유비가 전연 무색하지 않다고 할 테다. 귓전에 들려오는 적나라한 물소리에 더하여 ―상상력을 배가시키는― 외화면 쇼트로 처리됐기에 더더욱 선명한 감각으로 호소해오는 욕실의 용변보기, 향정신성 약물을 과다 복용해 스스로를 파괴의 국면으로 내모는 순간을 가감 없이 붙들어내는 취침장면 따위를 상기해본다면 말이다. 아울러 뒤이어질 행동들에 대한 예언이라도 되는 양, 혹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사전-확인이라도 거쳤단 듯이 그 조목조목을 휴대전화 화면 위에다 또박또박 새겨놓는 문자화된 메시지는, 완전한 드러남-앎의 영역 속에 존재가 온전히 붙들려 있음을 다시 한 번 ‘말마다 확증하는’ 증거다. 이를테면 성문법의 가동원리처럼 말이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건 이 기묘한 촬영방식을 관음증적인 시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선 안 된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특히 여인-욕실 쇼트처럼 기본적으로 다중(틈새) 프레임을 통해 매개되고 제시되는 경우라면, 적잖은 오해의 여지가 개입해올 수 있다. 시선 그 자체에 암시적으로 깃들어 있는 향유의 자세라든지 폭력적인 태도 등속의 것들에 윗점이 찍힐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엽적인 국면에 매몰되어선 영화 텍스트가 일관되게 되뇌고 있는 바에 좀처럼 다가설 수 없다. 거듭 반복해서 강조하자면 외려 시선을 집중해야 할 건 휴대폰 플랫폼을 통해 매개되는 존재들이 극히 투명하게 현상되고 있단 점이다. 그러면 즈음해서 생각의 노선을 완전히 뒤틀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전도된 방식으로 질문해보도록 하자. 핸드폰 촬영기법을 통해 현상되지 않는 텍스트 속 대부분의 존재들은 진솔하지 않다거나, 외식적인 삶의 양태를 취하고 있다는 말인가?

 

“솔직함과 위선, 정말이지 ‘막연한’ 거리감”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자. 관련된 증거 또한 얼마든 존재하니 말이다. 우선 조르주 로랑과 토마 로랑, 이들 부자를 연이어 묘사하고 있는 특별한 영화적 방식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을성싶다. 먼저 아들 토마가 연상인 내연녀와 주고받은 변태적인 대화들이 채팅창 위에 비밀스레 새겨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만일 화면에 낙인처럼 찍힌 그의 이름이 아니었더라면, 외견상 번듯한 의사인 그이가 그처럼 습하고 끈적이는 말들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긴 조금 어려울 것이다. 그 반면 뭔가 입력되길 기다리는 아비 조르주의 텅빈 프롬프트 위엔 끝끝내 아무 단어도 새겨지지 않는다. 아니, 무엇이든 새겨질 이유 따윈 전혀 없다고 말해두는 편이 외려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생의 말미에 이르러 더는 무엇도 숨기거나 꺼릴만한 게 남아 있지 않은 그는 ―곧이어 문자입력대기코드를 연상시키는 시각적 은유의 본체가 주차장의 5단 램프임이 밝혀진다― 역시나 아무런 미련이나 한 점 거리낌도 없이 길가의 가로수를 향해 차량의 가속레버를 당길 따름이다. 이미 자살미수의 전력이 있는 그가 혹 다른 누구에게든 자신의 저의를 감출 필요가 있었더라면 분명 보다 은밀한 행동방식을 취했을 터이다. 되레 고의를 사고로, 필연을 우연으로 위장하기에 바쁜 건, 오로지 아비의 ―아마 제가 속한 가문의 평판을 염두에 뒀을― 자식들뿐이다. 한편 그의 메시지(=침묵)와는 달리 토마가 주고받은 메시지는 번거롭게 비밀번호를 바꾸는 편을 택하면서까지 타자들로부터 철저히 보호되어야 할 성질의 것으로 현출되고 있다. 묵혀둔 개인의 비밀이 공공연한 위선으로 밝혀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투명한 프롬프트/전적인 비움을 향한 돌진>

 

<가득 찬 것/그리고 은밀히 숨겨진 것>

 

   물론 이것만이 ―로랑가문에 관해― 드러난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 아빠(토마)에게서 거리가 느껴진다며 “연극하지” 말아달라는 에브의 뇌까림은, 그에 앞서 토마의 누이이자 실질적인 가주 안느에게 내뱉은 아들 피에르의 날카로운 지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혹여나 버림받게 될까 염려하다 차라리 가혹한 길을 스스로 택하기로 결정한― 사춘기 소녀가 자살기도로 수척해진 몰골로 어렵사리 토해놓은 말인지, 아니라면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른 어머닐 온몸으로 밀쳐낸 건장한 청년이 쏘아붙인 말인지, 그저 주어진 상황맥락만 다를 뿐이다. 어쩌면 상황맥락의 차이라는 말조차 조금 과할는지 모른다. 그 맥락은 동일하되 단지 처하게 된 가시적인 상황만 다르다고 정돈해두는 편이 한결 옳을 것이다. 풀어쓰자면, 싸늘하되 가느다란 목소리에 녹아 있는 ‘묘한 애원의 정서’와 열린 창을 통해 불어 들어온 날선 바람과 공명하며 한껏 ‘부풀려진 강력한 분노’는, 설령 외현된 결은 다를지언정, 보다 근본적 차원에선 공통적이다. 적어도 발견된 위선 앞에서 취하게 된 나름의 반응이라는 점에서만큼은 말이다. 사촌뻘인 소녀를 친근하게 대해주려는 피에르의 모습은 아마도 그녀와 자신이 비슷한 처지에, 그러니까 언제고 내쳐진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게다. 키우는 개마저 제 주인들을 향해 마구 짖어대는 이 미친 집구석에서 그녀야말로 진심으로 연민할만한 몇 남지 않은 대상 중에 하나임을 확신하게 됐노라 말해본대도, 그다지 틀린 번역은 아닐 테고 말이다.

 

<위선과 반응의 양태들1>

 

<위선과 반응의 양태들2>

 

   개가 주인에게 공격성을 드러내는 일은 여간해선 드물다. 그이의 동물적 감각을 동원한대도 미처 인지하지 어려울 만큼이나 사뭇 ‘낯선’ 모양새로/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이례적인 광경은 또 하나의 사건과 관련지어 생각해볼 때에 보다 선명한 의미적 호소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하인들의 ―미취학 아동일 법한― 어린 딸이 개에게 공격당한 건 대체 무슨 이유란 말인가? ‘만만해서’라는 편리하기 그지없는 진단을 내리기 전에 돌이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개를 직접 훈육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 이들 하인 내외라는 점 말이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상하관계에 대한 인식이 매우 철저한 동물이 자기를 관리하는 자의 자녀를 무람없이 공격하는 일을 떠올리는 것보단, 그 밖의 합리적인 청사진을 그려보는 쪽이 조금은 더 타당하지 않을까. 달리 추론해보는 게 가능할 게다. 뭔가 제 주인으로부터 낯선 자취를 느끼게 된 탓에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던 개가 느닷없이 작은 아이를 덮치게 됐다면, 아무래도 이런 결론을 도출하는 편이 자연스러울 테다. 먼저는 그이가 좀처럼 헤아릴 수 없었던 이물감의 자취를 결국엔 집안 식구들이 가진 ‘전형적인 특징’으로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기존의 정보체계를 ‘갈음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거기에 부응하지 않는 꼬마에게서 ‘낯설지 않음에 대한 낯섦’을, 다시 말해 다른 자들과는 구별되는 ‘이방인의 흔적’을 냄새 맡게 됐으리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피에르나 에브의 경우는?

엄밀히 따지자면 두 사람 역시도 이물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말할 순 없다. 투명함의 문제, 거꾸로 번역해보자면 위선의 문제가 고루한 선악의 개념과 곧장 연결-접속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일찍이 일러둔 바 있을 것이다. 예민히 벼려진 감수성을 가진 에브는 ―심지어 그녀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보는 것이 옳다고 할 만큼 잔뜩 어그러진 친모와의 부정적 관계를 차치해둔다 하더라도― 식구들의 속내를 충분히 간파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많은 걸 침묵하고 있고, 피에르 또한 가문에 불만을 가지고 있음에도 텍스트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진 내면의 비판의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광기어린 춤사위(광대놀음) 장면에서 잘 나타나듯― 많은 부분 자조적인 모습으로, 또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말해두는 편이 차라리 옳다고 할 게다. 여하간 에브나 피에르마저도 속내를 깊이 감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허니, 작중의 개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아직까진 위선의 지각/표현이 분화되지 않은― 셀린느를 물어뜯은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마땅히 그이가 짖을 수밖에 없는 이유>

 

<그녀가 아니고서야 공격당할 리 없다>

 

“전략적 탐사, 의미지층을 한 꺼풀 비집어보기”

여기에까지 생각이 가닿고 보면, 즈음해서 켜켜이 농축된 텍스트의 의미지층들을 한 차원 더 깊이 탐사해보아야만 할 의무감에 비로소 맞닥뜨리게 된다. 핸드폰 촬영방식을 통해 언급된 투명한 존재들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로랑가문의 존재자들을 서로 견주어봄으로써 숨은 위선을 고발하는 게 암만해도 영화의 종극목적이 되리라는 단순한 추측판단이 이제 일시에 어그러져버리게 된 까닭이다. 더 간단하게는, 이 탐사의 과정을 앞서 언급한 ‘일단은’에 주석을 다는 과정이라 말해둘 수도 있겠다. 탐사의 맥을 적절히 관류하는 한 가지 질문을 동원하여 그 전체를 집약적으로 갈음해보는 편이 아무렴 이 여정의 성패를 좌우할 효과적 방편이 될 듯싶다. 과연, 어느 누가 있어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엄정하게 따져본다면 조르주가 보여주는 솔직함이란 것도 사실은 오래도록 축적돼온 위선의 때를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연장으로서의 진실함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물론, 고작 치매에 대한 얄팍한 자기연민 따위로 형애(荊艾)화해버리는 일 또한 곤란하단 점을 밝혀두어야겠다― 환언해보자면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는 ‘없으리란’ 것. 이것이야말로 텍스트의 마지막 장면을, 바다에 뛰어드는 조르주를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에브의 모습으로 갈무리 한 이유라 말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매체 간 구분이 궁극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지점이라든지, 위선과 비-위선의 경계가 완전하게 허물어지는 순간을 포착해낸 것이라 말해본다면 또 어떨까. 혹 위선의 종(세계)/위선의 인간학이란 말을 붙여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은 시도일 테고 말이다. 영화에 있어서 세계 그 자체의 형상화라 할 수 있는 시퀀스 간의 연결접속이 개연성으로부터 크게 벗어난 뒤죽박죽의 모습으로 짜여있단 점 역시 만연한 거짓의 일반성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수평적 감각’에 과도하게 매몰되고 있다 말하긴 좀 어렵다. 모두가 거짓되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온전히 동일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란 뜻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완연한 정치색을 겨냥하고 있다. 유색인종을 가벼이 여기는 비하적인 태도라든지 ―회유를 겉면에 두른 세련된 협박의 모양새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철저히 힘의 논리에 의거해 직조된 위계적인 관계형질 따위의 양태들은, 텍스트의 면면에 선연하게 현출된다. 특별히 눈여겨볼만한 건 ―인재를 일으킨 로랑기업의 대리자로서― 피에르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소년을 ‘극단적인 원경으로’ 잡아내는 장면이다. 분명 행위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대체 그이가 누구인지조차 알아차릴 수 없도록 말이다. 이로써 행동을 수행하는 자와 행동의 대상이 되는 자의 위치관계가 전도되고, 가해와 피해 사이의 상징적 그리고 실제적 역학구조는 역전된다.

 

<물리적 폭력, 그리고 또 다른 한 종류의 폭력>

 

<회유와 협박 사이를 연결하는 미묘한 곡면>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은밀한 욕망을 제 속에다 깊이 감춰놓은 위선의 세계. 하지만 이리저리 엮어진 힘들의 장(field)이 동시다발적으로 간여해오는 탓에, 그 낱낱의 표현 가능성과 폭이 서로 간에 현격히 달라지곤 하는 아득한 복잡성의 세계. 조르주가 매의 사냥장면에 빗대어 잘 밝힌 것처럼, 이러한 세계의 이면은 막연한 추측이나 상상의 영역에 머물 때와는 달리 정작 맞닥뜨리게 될 경우 실로 숨 막히는 떨림을 유발할 만큼이나 어지러운 것이다. 그이가 물가로 스스로를 내몰아가고 있음을 에브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는, 마침내 추악한 세계로부터 자유롭기를 택한 ―오랜 기간 이 오염의 밀도를 더해왔단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그이의 선택을 모쪼록 응원하기 위함일 게다. 마지막 영상촬영은 그 선택의 순간에 대한 ‘진지한 기념식으로’ 간주할 수 있을 테고 ―에브를 사이코패스로 확진하지 않는 한― 말이다. 결국 자식들에게 발각된 탓에 다시금 행복으로 치장된 불행(다른 의미에서의 행복한 결말) 속으로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게 될는지도 ―그건 그 나름대로 그이가 짊어져야 할 죄과일 테다― 모르겠으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해피엔드’는 번잡하기 그지없는 삶-세계의 굴레를 마침내 벗어나게 된 최종적 순간을 호명하는 표현일 수 있다. 더불어 혹 도피적으로 삶을 내던지든, 적극적인 저항과 투쟁의 자세를 취하든, 더러는 눅진한 호소의 태도로 일관하든, 이 해피엔드에 가닿기 위한 경로 역시 하나가 아닐 수 있다는 점 또한 강조해두어야만 하겠다. 물론 영화 텍스트는 기중 무엇이 얼마나 효과적일는지에 대한 응답 따윈 ‘함구한 채’로 갈무리된다. 구태여 이와 같은 끝남=열림의 미학을 견지하는 건, 그것이 여전히 현재적인 문제임을, 보다 더 적확하게는 우리네가 피부로 당면한 실존적 사태임을 깨치도록 견인해주는 실다운 말 걸기의 전략일 테다-.

 

글·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동물인 늑대의 이미지로부터 착안해낸 이름이다. 이 짐승은 홀로 쏘다니며 늘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이란 사실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 있을 게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에 대한 성찰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독특한 쓰기/읽기 형식으로서의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그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터이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면서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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