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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우리 삶의 너른 토대를 위하여 -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
[이병국의 문화톡톡] 우리 삶의 너른 토대를 위하여 -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19.09.16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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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 (The greatness of a nation and its moral progress can be judged by the way its animals are treated.)” 이 말은 인터넷에서 간디의 명언을 검색해 보면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명절 때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 유기동물보호센터에 약 1,000건의 유기동물 공고가 등록되는 상황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올해 초, 동물권단체 케어(Care)의 박소연 대표가 지난 4년 동안 구조한 동물 수백 마리를 무분별하게 안락사시켰다는 뉴스로 대한민국은 뜨거웠다. 그러나 박소연 대표는 이내 현장에 복귀했고 안락사 사실을 고발했던 내부고발자 임모 씨는 퇴사했다. 내부적인 사정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간 박소연 대표가 보여줬던 행보와는 사뭇 다른 사실이 폭로됨으로써 사회적 파장을 낳았고 이로부터 인간에 의해 대상화된 동물의 권리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인간은 동물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인간 자신도 동물의 다른 층위이면서도 자신을 그 층위에서 분리해 사고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한 것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식량 자원으로써의 ‘고기’는 인간에 의한 동물의 생명권을 착취하는 방편이었다. 육식은 각종 질병의 위험과 곡물 중심의 식량 자원의 위기에 대한 논쟁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착취에 의한 사육동물의 반대편에는 애정에 기반한 반려동물이 있다. 2016년 농협경제연구소가 조사한 반려동물의 시장 추이를 살펴보면, 2012년에 9,000억 원이었던 시장 규모가 2015년 1조 8,000억 원, 2016년 2조 3,000억 원으로 매년 그 규모가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농협경제연구소는 2020년에는 5조 8,000억 원까지 그 규모가 확대될 것으로 예측했다.

 

반려동물 인구가 1,000만을 넘었다는 뉴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 반려견의 비중은 다른 동물에 비해 상당히 높다. 물론 필자는 개보다 고양이를 선호하여 반려묘를 키우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 글은 동물에 대한 착취나 반려동물에 대한 시장 규모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출판사 아침달에서 흥미로운 시집을 출간했다.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라는 시집인데 일명 ‘댕댕이 시집’으로 통한다. 이 시집을 엮은 유계영 시인은 ‘여는 글’에서 이 시집이 “사진 한 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사진은 “A시인이 개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일반적으로 프로필 사진은 심각하고 진지하다. 그러나 개 옆에 있는 시인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고 한다. 이 시집에 참여한 시인 중에 A시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즐겁다. 유계영 시인은 계속해서 말한다. “개는 앞으로도 인간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인간 대신 앞장서게 되리라”고. 그런 개를 위해 인간은 “끝까지 함께 있어주는 일, 아프고 굶주린 개들을 외면하지 않는 일, 동물보호법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 환경을 오염시키는 나쁜 습관을 지우는 일, 육식을 줄이는 일 등”을 통해 “개를 위한 실천”을 수행하라고 말한다. 공감이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동물권단체 케어에서 보여준 행위와 관련해서 이야기할 만하다. 그들이 사회적 공분을 샀던 이유는 동물을 안락사시켰다는 데 있다. 유기되거나 학대받는 동물들을 구조해 보살펴야 하는 자신들의 의무를 망각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안락사를 시켜 동물의 죽음을 앞당겼다. 그 죽음은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인간과 관계 맺는 동물의 죽음이 인간과 따로 떨어져 사유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줄은 누구의 것일까

 

유리문을 열면

흰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의 처음이 늘 하얗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참혹처럼

 

‘무너지게 될 거야’ 누군가 한 말을

‘무뎌지게 될 거야’ 라고 들었다

 

뭉치가 죽었어

화장 비용이 없어서 아직

방에 같이 있어

 

멈추려는 숨 때문에

개의 코는 마지막까지 길어졌을 텐데

그런 개를

따뜻한 방 한가운데 놓아두고

 

저녁을 먹고 있는 사람의 전화

목소리가 마른 웅덩이 같다

 

겨울이라 땅을 파고 묻을 수도 없어

방에 같이 있어

 

한겨울의 가장 따뜻한 방

이 줄은 무엇으로 엮은 것일까

 

체에 걸러도 남는 마음 때문에

구멍을 더 촘촘하게 짜는 사람이 있고

 

잿더미 속에서도

눈을 뜨고 옆을 보려는 사람이 있다

 

개는 가장 작은 자세로

엎드려 있다

- 안미옥, 「조율」 전문(<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 아침달, 2019)

 

 

한 존재의 죽음은 죽은 존재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 맺은 모든 존재의 결락을 이끈다. “이 줄은 누구의 것일까”. 그 ‘줄’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지우며 인간과 동물이 맺는, 더 나아가 세계와 관계하는 새로운 관념을 고민하도록 만든다. “눈의 처음이 늘 하얗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참혹처럼”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는 반려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으려 무뎌지게 스스로를 보호한다. “개를/ 따뜻한 방 한가운데 놓아두고” ‘나’는 저녁을 먹는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인 ‘방’은 반려견의 죽음을 유예하는 장소가 된다. 그곳에서 ‘나’는 “체에 걸러도 남는 마음”을 “촘촘하게 짜”는 사람으로 남는다.

 

죽음을 회피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러나 죽음 때문에 처음부터 관계 맺기를 포기할 이유도 없다. “반려동물이 고마운 것은, 그 녀석들이 나를 즐겁게 해주어서가 아니라 함께해주었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種)을 뛰어넘어 교감할 수 있는 ‘관계’의 장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나’ 뿐만 아니라 ‘너’를, 타자를, 다른 ‘종’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이해의 시간이야말로 영원히 죽지 않는 기억으로 삶을 충만하게 한다. 한 편의 시를 더 읽자

 

 

그 개가 살아 있을까 봐

거리에서 개들을 마주칠 때마다 멈춰 서게 된다

저렇게 생겼던 것 같아 이만한 덩치였던 것 같아 밤색이었던 것 같아 얼룩이였던 것 같아 우두커니 서서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그 개를 생각한다

 

내가 아홉 살이었으니까 아마도 그 개는 죽었을 것이다

 

(……)

 

이십 년이 흐른 뒤 다시 개를 키우게 되었다

그 개가 살아 있을까 봐 몸서리치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자꾸 울었다

이 개가 죽어버릴까 봐

허벅지 위에 따뜻한 체온을 흔적처럼 남기고 갈까 봐

필사적으로 가버릴까 봐

이름이 무거워 이름 없음의 세계로 돌아갈까 봐

나를 알고 있을까 봐 나를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어주지 않을까 봐

 

개들은 개들끼리 서로의 기억을 공유한다는 말을 믿었다

 

(……)

 

그러나 개는 이 모든 것에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꼬리가 마룻바닥을 탁탁 쳤다

그러고는 쩍 하품했다

- 유계영, 「그 개」 부분(<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 아침달, 2019)

 

 

화자는 어렸을 적 키웠던 개의 죽음을 기억한다. 그 개가 화자의 허벅지 위에 올라와 남겼던 “따뜻한 체온”을 기억한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개가 무서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관계를 맺은 개가 죽자 그 개의 죽음을 기억하고 운다. 죽은 개가 “살아 있을까 봐” 우는 것은 두려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죽음에 대한 감각이 사유화(privatization)된 상태로 아직 사회화(socialization)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공감이 미숙하여 비롯된 일이지만 그 기억이 ‘나’로 하여금 타자의 죽음, 타자의 소외에 감응하도록 이끌어 사회화를 가능하게 한다. 정작 개는 “이 모든 것에 큰 관심이 없는 듯”하지만, 그 무관심의 형태로 발현되는 포용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주체가 자신만이 세계의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각종 뉴스에서는 길고양이를 학대하는 모습을 본다. 자신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점에서 혹은 인간과는 다르다는 점을 들어 혐오하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동물들을 학대하고 죽인다. 키우던 개와 고양이를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싫증이 났다는 이유로 혹은 형편의 어려움을 들어 유기하기도 한다. 인권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보장되었던 것이 아니다. “인권은 권력의 쟁탈 과정에서 형성된 개념이며, 저항을 매개로 확립된 개념이다. 하지만 동물은 인간과 권력을 다투지 않”는다. 이를 고려하여 “존중과 공존에 기반을 두고 동물의 권리에 관한 논의를 전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성찰이다. 필자의 가장 가까운 지인에게는 스무 살 된 반려견 ‘장비’가 있다. 장비는 노화로 인한 여러가지 병을 앓고 있다. 써클링도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인은 짧게 혹은 길게 하루에도 몇 번씩 산책을 시키고 바깥 공기를 쐬게 한다. 아무리 장비가 좋아했던 산책이라고 해도 나이 든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스무 해 동안 반복한 일이어도 일상이라 간단히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건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존중과 공존에 기반을 두고” 온전히 감당하는 마음에 달려 있다. 동물권에 대한 더 심도깊은 논의를 여기서 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반려동물을, 더 나아가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동반자로 여기는 마음의 중요성을 말할 수는 있겠다. 그 마음이 우리 삶의 너른 토대를 이루기를 소망해본다.

 

*사진출처: https://pixabay.com과 아침달 블로그, 개인소장

*참고문헌
최경선, <빅데이터로 보는 반려동물산업과 미래>, 박영스토리, 2017.
이원영, <동물을 사랑하면 철학자가 된다>, 문학과지성사, 2017.
강지혜 외,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 아침달, 2019.

글: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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