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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유사과학 공포물에서, 반성적인 종합주의 심리영화로 ―<어스>론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유사과학 공포물에서, 반성적인 종합주의 심리영화로 ―<어스>론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19.09.3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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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스(2019)> 포스터

“한 두려움과, 다른 두려움”

두려움은 단지 공포영화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라고 해서 모두 다 공포영화라고 단언할 순 없단 뜻이다. 먼저 말해둬야 할 것은 이 단어가 지시하는 바가 꽤나 두루뭉술하단 점이다. 그러니, 설령 동일한 기표에 들러붙어 있다 한들, 꼭 같은 성격이나 의미를 가진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두려움이란 말의 내포엔 ‘복수적 층위’가 개재돼 있다. 개중에서도 가장 흔한 건 수동적 경험이 환기하는 감각적인 소구효과다. 또는 자극-반응이란 단순한 메커니즘에 의해 주어지는 고도의 긴장감이라고도 번역해볼 수 있으리라.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본격적인 공포영화 속에서가 아니더라도 흔히 마주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의 (범)공포물에 해당하는 재난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역사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도 그 흔적을 왕왕 찾아볼 수가 있으니 말이다. 조금도 꺼리지 않고 말해본다면 구태여 극장을 방문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충분하다고 할 테다. 가령, 유행하는 엑스 게임을 통해서도 퍽 만족스런 대리 경험에 몰두할 수가 있을 터이니.

그와는 달리 두려움이 좀체 알 수 없는 것에 의해 수반되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 여기에서 ‘알 수 없음’이라는 표현의 뜻을 분명히 해두어야 하겠는데, 그 의미는 절대적인 접근불가능성과 관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외려 상대적인 차원에서의 능력부족 내지는 결여와 결부돼 있다. 환언하자면 이 두려움은 어떻게든 이해하거나 헤아려보려 노력해도 결국 모호한 것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대상 앞에서, 다시 말해 벗어나지 못할 불투명함 속으로 내던져진 상황 가운데서 경험하게 되는 극도의 긴장을 말한다. 마치 유령과의 조우에서처럼 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공포영화라고 할 만한 것들은 대개 이 두 번째 두려움과 긴밀히 관계한다. 이 글에서 다룰 텍스트 또한 적어도 ‘표면적으론’ 그러하고 말이다. 전자가 즉각적인 감정경험(feeling)의 문제라면 후자의 경우는 의식적인 정서반응(emotion)의 문제랄 수 있다. 그러니 이들 양자를 편의상 공포감정과 공포정서로 각각 대별해보는 일 역시도 물론 가능은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 사이에 아주 건너갈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하는 건 또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병존한다 할지언정 강조점이 달리 찍힌다고 말해보는 게 나름대로 적절한 풀이가 될 성싶다. 여하간 〈어스〉에서 도드라지는 두려움과 관련된 테마들을 나열해본다면 도플갱어, 분신, 분열증적 주체 따위의 어휘들을 떠올려볼 수가 있을 테다. 이러한 문제들은 확실히 후자와 더 밀접해 보인다. ‘보통’의 경우라면 말이다.

허나 상투적인 예단은 곤란하다. 데면데면한 해석에 주의해야 한다. 실제 텍스트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썩 ‘전형적이지 않은’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두려움을 촉발시키는 앎과 부지 사이의 불연속지대에 머무르려면 마땅히 자기노출에 유념해야 한다. 자기현시는 예기치 않은 상황을 스치듯이, 마치 바다 위를 유영하는 부표처럼 불규칙적인 파고에 따라 제 몸을 감췄다 드러냈다 하듯 조심스레 진행돼야 한다. 그래서 문제적이다. 이 영화의 형편은 외려 정 반대의 양상을 현출하고 있는 까닭이다. <어스>에서 두려움의 매개자들은 전면에 제 정체를 드러낸 최초의 순간 이래로 텍스트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스크린 위에 특유의 존재감을 자아낸다. 은근히 기척을 감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두려움은 탈신비화의 막다른 길로 내몰린다. 혹자는 두렴이 소멸되지 않았노라고,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감각은 여전하다고 느낄는지도 모르겠지만, 남은 건 섬뜩한 분장이나 제스처 또는 선혈이 낭자한 폭력에 의해 주어진 감각적인 호소력 수준에 국한된다. 모호함과 무지를 동력으로 삼는 의식적인 정서반응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셈. 심지어 영화는 이 기묘한 자들의 정체를 명명백백 밝혀내는 일에도 전연 주저함이 없다. 이로써 한 점 남은 의구심마저 사그라진다. 물론 말미에 이르기까지 묵혀둔 애들레이드의 비밀 탓에 약간의 이물감이 꿈틀대긴 하지만 그마저 잠시뿐이다. 텍스트 전반에 서린 분위긴 변치 않는다.

그렇담 본 텍스트를 ―넓은 의미에서 공포물의 성격을 갖는― 유사과학적인 디스토피아 영화 정도로 진단하고 넘어가버려도 된다는 말인가? 그것 역시 석연치 않다. 아예 불가능하다 말하긴 좀 어렵겠지만, 지나칠 만큼 단순한 접근법이랄까. 이런 식의 범박한 단순화는 많은 걸 놓치도록 만든다. 차라리 ‘종합주의적인 심리영화’라는 술어를 덧대보는 편이 어떨까. 종합주의란 말은 오래전 19세기의 미술가 폴 고갱의 언술을 거칠게 빌려온 것이다. 현실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 내지는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또한 그럴듯한 번듯함과 마구 들끓는 욕망이 한 자리에서 서로 공명-불화하며 엮어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해서 매우 독특한 텍스트성을 현출해내고 있단 의미에서 말이다. 참말 고갱의 캔버스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 스크린을 무대 삼아 비일비재하게 펼쳐지고 있다. 얼마나 그러한지, 어째서 그러한지, 곳곳에 산포된 증거들을 발굴하고 그 의미를 음미해보는 작업은 꽤나 유쾌한 여정이 될 것이다.

 

“지형탐사와 장치발견”

다른 무엇보다도 하향식 깊이감각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서 지나갈 순 없을 것이다. 무의식공간으로 향하는 입구인 어트랙션(영혼의 여행)은 거울방의 구조를 취한다. ‘당신을 찾으라는’ 그럴싸한 표구에 썩 어울리도록 말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그저 자신을 비춰보라는 말 정도로 번역되어선 안 된다. 이중적 층위감각을 머금은 표현인 까닭이다. 한 꺼풀을 벗기고 볼 때에야 비로소 그 숨은 속뜻을 발견할 수가 있으리라. 풀어쓰자면 그건 겉으로 현상된 견실한 자아 이미지 뒤편에 눌러놓은 자신의 내밀한 욕망과 은폐된 실제모습을 부정하지 말고 마주하란 말로 번역 가능할 터이다. 아래로 끝없이 연결된 계단이 환기해내는 아득한 깊이감각이 이 감춰진 것의 실존을 여실히 입증해준다. 문과 문 사이를 지나 좁다란 통로들을 헤쳐 가며 마침내 에스컬레이터(자동시스템)에 탑승해야지만 가닿을 수 있는 바로 그곳이 의식기저의 영역이다. 붉은 존재들이 지하세계, 특별히 “하수도”에서 올라왔다는 증언 역시도 보이지 않는 의식의 수면아래 또는 까마득한 무의식의 세계를 구증해주는, 그리고 그 세계의 막강한 침투력을 확인해주는 실다운 단서다.

 

<나를 찾으라는 말>

 

<나를 찾는다는 것>

 

 특이한 시각적 상징물들 또한 주목해볼만하다. 개중에서도 눈여겨볼만한 것이 곧 토끼다. 보다 정확하게는 토끼에게 일어난 ‘변화라고’ 일러두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마스터쇼트에서 이 유순한 존재들은 철창에 갇혀있다. 이때의 토끼란 들끓는 욕망을 비밀스레 닫아건 채, 겉으로 점잖음을 표방하는 일상적 삶의 표상이라고 말해본다면 옳을 터이다. 카메라는 일부러 시간을 들여 이 포장된 존재들로 가득한 세계상을 서서히 그리고 특별한 조작적 기법 없이 붙들어낸다.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담아내려는 이유에서일까. 그러나 텍스트의 말미에 이르면 이 토끼들은 풀어져 놓인 채 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이곳저곳을 거닌다. 해방된 존재를 상징하는 시각적 형상화의 표현일 게다. 이러한 변화가 지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의식이 지배소로 작용하며 무의식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순간에서부터, 되레 무의식이 역동적으로 의식의 지표면에 개입하며 그 위세를 떨치는 순간으로의 자리 옮김을 지칭한다고 말해볼 수가 있으리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면 세상에 풀려나 활개 치는 붉은 존재들과 토끼들이 사라져버린 텅 빈 케이지들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기란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인다.

 

<억압과 눌림과 점잖음>

 

<해방과 분출과 들끓음>

 

아울러 이 비밀스런 억압의/해방의 공간으로 나아가는 도상에서 필히 경유하게 되는 메시지가 예레미야 11장 11절이라는 점 역시도 놓쳐선 안 될 듯싶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다른 주인’을 섬길 때에 필연적으로 재앙을 ‘맞닥뜨리게’ 되리란 것이다. 실제로 무의식의 입구인 어트랙션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음성은 다른 주인의 복음이다. 이 음성을 듣는 것, 다시 말해 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건, 이를테면 첨예하게 부딪는 위상공간 속에서 그간 유지돼오던 주인과 노예의 위치가 뒤바뀌게 될 것임을, 의식과 무의식의 위상관계가 전도되고 파훼되며 비로소 새로운 주인이 탄생하게 될 것임을 공언하는 일과도 같다. 도무지 그 정확한 위치를 짐작할 수 없는 곳에서부터 귓전을 엄습해오는 외화면 사운드(음성)는 맞닥뜨린 상황이 좀처럼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의 성격을 가진단 사실을 강변해준다. 이 숙명이 불러온 재앙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의 목소리>

 

<다른 복음에 대한 경계>

 

 

물론 그 밖에 다른 부분들을 환기해보는 일 또한 가능할 터이다. 별안간 출현해 지상세계(현실세계) 가운데 어마무지한 혼란과 장해를 초래하고 있는 이 문제적 존재들이, 그림자 내지는 쌍둥이, 더러는 같은 영혼을 공유하는 두 존재 중의 하나라는 말들로 불리고 있다는 점을 각별히 유념해볼 만하다. 더불어 그들이 하필이면 어느 누구 하나 빠짐없이 ‘가위라는’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점 역시 생각해보아야 할 테고 말이다. 어째서 허다한 무기들 중 가위인가. 가위의 본 용도는 잘라내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잘라낸단 뜻일까? 그 해답은 지하공간의 대치장면에서, 적확하게는 둘로 짝지어진 붉은 종이인형을 가위질하듯 떼어버리는 그림자존재의 행위를 통해서 선명하게 가시화된다. 떼어낸다는 건 일차적으로 종속적인 결합관계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선 본체(의식)의 존재지위를 취득 및 갈음해버림으로써, 자신이 지배소적 영역으로 군림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할 테고 말이다.

 

<하필이면 왜 가위인가>

 

<가위를 둘러싼 물음에 답하다>

 

또 다른 시각적 유비 속에서도 이 의지적 선언은 다분히 집약적인 형태로 현출되고 있다. 키티를 죽인 달리아가 가위로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장면은, 특히나 그녀 스스로가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흡족한 표정을 내비친다는 점에서 다분히 그로테스크해보일 수 있다. 더군다나 그건 한참이나 키티의 화장품으로 자신을 단장하던 중에 일어난 예기치 않은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견상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화장과 자해라는 두 행위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물질적 대상이 됐든 생기가 됐든 키티의 것들을 앗아 점유한다는 건, 비로소 역전된 위상을 가지게 되었음을, 서로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전쟁과도 같은 관계양상 속에서 이제는 자신(무의식)이 그녀에 대해 지배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음을 공언하는 행위일 터이니 말이다.

 

<하나를 지향하는 두 가지 행위1>

 

<하나를 지향하는 두 가지 행위2>

 

끝으로 긴박감 넘치는 지하공간의 싸움장면에서 구태여 부단한 교차편집을 통해 발레의 춤사위를 끈덕지게 삽입해놓은 것 또한 눈여겨볼만한 작업이라고 하겠다. 레드(=애들레이드)는 춤을 배우게 된 걸 자신을 구제해낸 “신”적 경험이라 술회한다. 구제라는 어휘를 해방이라는 단어로 갈음해본다면, 그건 춤사위가 빚어내는 예술적 표현의 무대에서 비로소 의식과 무의식을 가로막은 두터운 몸피의 격벽이 허물어지게 되었음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가자면, 예술적 표현(춤)의 자리는 이렇게 허물어진 가름막 사이로 마주보게 된 양자가 깊이 엮어지며 서로 격렬하게 부대끼는 ‘전에 없던’ 긴장의 장소가 된다. 그러니 춤을 유폐된 자신을 건져내어 외부세계로 이끌어낸 구원의 계기로 긍정하는 레드의 말은 그리 틀리지 않은 셈이다. 말하자면 이때의 춤은 마치 캔버스 위에다 독특한 풍경을 풀어내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손바닥에 놓인 고갱의 팔레트와도 같은 것이다.

 

<격렬한 존재안팎의 부대낌>

 

<경계를 허물어, 부대낌의 장을 열다>

 

“존재와 세계의 재의미화”

즈음해서 한 가지 의문을 던져봄이 좋을성싶다. 영화가 일련의 장치들을 매설해둔 이유란 건 과연 뭘까. 도대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갖은 번거로움은 물론이거니와, 자칫하면 관객을 혼란의 늪지로 빠트릴지 모를 위험마저도 주저함 없이 무릅쓰고 있는 걸까? 조심스레 답해보도록 하자. 말쑥하게 가장된 자아상에 힘입어 감추거나 혹 포장하고 있을 법한 은밀한 욕망 내지는 존재의 본질을 겉으로 끄집어 올려 현상해내는 것이 그 첫 번째 목적이라고 말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끄집어낸다기보다는 부정불가의 현실을 ‘온전히 목도하도록’ 만든다는 게 좀 더 합당한 표현이겠지만 말이다. 대치장면의 극점에서 애들레이드는 레드의 목을 조이며 붉은 자들처럼 짐승의 괴성을 내지른다. 이 장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본시 레드가 애들레이드의 위치에 그리고 애들레이드가 레드의 위치에 서 있어야 함이 합당하리라는 점과 더불어서, 이처럼 서로의 위치가 전도된 상황 가운에서도, 아니나 다를까 애들레이드가 레드가 보여주었음직한 행위패턴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인되는 이 두 번의 뒤집기가 힘주어 말하고 있는 건, 둘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없단 사실이다. 그이가 그이다. 환언하자면 말쑥해 보이는 존재가 곧 들끓는 욕망에 물든 존재인 셈. 요컨대 텍스트는 기만의 파훼를 지향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텍스트가 입안하는 영화적 진리명제다.

 

<적어도 겉으론 그럴싸해 보이는>

 

<그럴싸함을 다시 오마주(패러-마주)해보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내딛어보도록 하자. 텍스트의 진리, 다시 말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반성적 차원이, 개별 존재 수준의 탐문을 넘어 사회적 지평으로까지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점(마스터쇼트)에서부터 카메라는 길게 늘어서서 손을 맞잡고 평화의 띠를 만드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스크린 속의 스크린으로, 간격이 적당히 벌어진 탓에 ―이 간격은 줌의 움직임을 통해 도드라지게 부각된다― 상당히 느슨하게 중첩된 이중 프레이밍 도식을 통해 붙잡아낸다. 그저 사실을 긍정하기 위함이었더라면, 단지 낙관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을 뿐이었더라면, 이런 식의 시각적 문법화는 요구되지 않았을 테다. 이때 틀과 틀 사이에 개재된 거리감은 무람없이 배치된 간극 따위가 아니다. 외려 그건 핍진함을 내세우는 조작된 이미지와의 단조로운 동일시를 거부하고, 그 뒤안길에 파묻힌 ‘무엇인가’의 정체에 끊임없는 관심을 갖도록 추동하는, 지연작용의 장소이자 성찰의 공간으로 복무한다. 이 무엇인가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텍스트의 지면 위로 명백하게 가시화된다. 붉은 존재들의 오마주를 ―그 진지한 무게감을 패러디란 말로써 갈무리하긴 아무렴 까다롭기에 대안적으로 이런 말을 사용하기는 하되, 사실 오마주의 외면과 패러디의 내면이 동시에 긴밀히 엮어지고 있음을 따져본다면 ‘패러-마주’ 따위의 용어를 제안해보는 편이 차라리 더 좋을 성싶다― 통해서 말이다. 지극히 어색하게도, 살인의 광기로 물든 자들이 이 평화로움의 제스처를 꼭 같이 재현해낸다. 이 충격적인 행위로부터 감지해낼 수 있는 건 만연한 기만과 외식에 대한 경계라고 하겠다. 자기 자신을 썩 괜찮은 자로 내세울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속한 사회 역시도 퍽이나 이상적인 공간으로 윤색해버리려는 도말작업의 범람에 맞서 강력한 어깃장을 놓는 일 말이다. 스크린의 표면 위로 현출된 진지함은 이러한 경계와 비판의 밀도와 몸피를 한층 살찌도록 만든다.

논의의 구체성을 기하고자 텍스트 속에 현상된 구체적 사례들을 창(窓)으로 삼아보도록 하자. ―영화작가의 자의식이 투영된 까닭에선지― 비교적 쉽게 찾아볼만한 건 ―젠더문제와 관련지을만한 요소들 또한 미미하게나마 존재하지만― 인종문제다. 애들레이드의 배우자인 게이브는 쉽게 사기를 당하는 우둔한 존재이자, 조쉬(백인)에게 열등감을 가진 존재로 형상화된다. 주의력결핍에 의한 과도한 외향성(과잉행동)을 보인다든지 반대로 스스로를 닫아거는 내폐적인 속성을 가졌다는 둥, 두 사람의 아이들 또한 뭔가가 결핍된 모습으로 현출된다. 두 집단 모두를 그럴싸한 별장을 소유한 중산층 가정으로 가정하는 듯하지만, 실상 드러난 부의 격차는 현저하다. 키티-조쉬의 가족 그리고 애들레이드-게이브의 가족 사이엔 외견상의 친근함 따윌랑 쉽게 무력화해버리고도 남을 만치 차갑고 튼실한 방벽이 도사리고 있다. 아무리 겉으로 손을 맞잡는 제스처를 취한다 해도 속아지도 그러하리라고 단정할 순 없단 것. 가장된 평화와 기만적 동료애 아래에 묻어놓은 부글대는 욕망들은 저마다의 셈속을 따라 움직인다. 타자에 대한 손쉬운 판단 및 의미화 경향이라든지, 전형적 사고나 케케묵은 인습에 대한 무비판적인 신봉 등속의 태도들은, 자신에게 만족과 편리를 공급해주는 한에서야 쉽게 바뀔 줄을 모른다. 딸 조라의 장래가 운동선수여야만 하리란 정식은 정말 그녀의 부모들로부터 말미암은 것일까. 아울러 인디언 주술사의 집이 마법사의 집으로 멋지게 탈바꿈한 건 정말로 ―특별히 주류사회에 속하지 못한― 타자들을 포용하는 넉넉함을, 그이들을 자신과 동동한 존재로 대우하겠다는 전반적 인식체계의 개선과 변전을 반영하는 것인가? 그럴 리 없다. 그럴듯한 포장일 따름이다. 거듭하여 강조할진대, 손에 피를 묻힌 존재들이 서로 손을 마주잡는 아이러니를 멀찍이 물러선 취재형식의 객관화된 시선으로 반복해서 붙잡아내는 건, 사회상의 악취와 어둠을 고발하는 카메라의 목소리와도 같다. 이를 미국인의/미국만의 문제라고 말할 수만은 없을 터이다. 모두가 친구며 우방인 그런 낙관적인 사회가 세상 어디에 실재하겠는가?

 

“직선적인 것과 반직선적인 것”

하지만 아무리 무리를 해보려 해도, 〈어스〉를 ‘본격적인’ 비판영화의 성격을 띤다고 간주하기란 조금 어려워 보인다. 면면히 되풀이해왔듯이 심리현상 안팎에서 벌어지는 전쟁 상황을 예민하게 벼려진 심미안과 감식안으로 형용해낸 종합주의 영화의 색채가 짙다고 말해두는 편이 차라리 더 옳을 테다. 그럼 다시 질문을 던져보아야겠다. 적극적인 비판의 자리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둠으로써, 환언하자면 우회적인 방편을 통해 접근할 때만이 비로소 가닿을 수 있다거나 손아귀에 거머쥘 수 있을 법한, 그런 ‘뭔가’ 특별한 게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말일까?

 

<밖에서 안으로 숨긴 가면>

 

<안에서 바깥으로 내민 가면>

 

텍스트의 맺음부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애들레이드와 눈이 마주친 제이슨은 조용히 가면을 내려닫는다. 설마하니 모친이 두려워서였을까. ―일정 부분 그렇다고 말해볼 수도 있겠지만― 혹 동질감을 느껴서는 아닌 걸까. 제이슨이 눌러쓴 것 ‘역시’ 무시무시한 괴수가면이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그가 가면을 ‘겉에’ 두른 것과는 달리 그녀는 가면을 ‘안에다’ 넣어두고 있다는 사실 뿐. 앞면이 먼저 오든 뒷면이 먼저 오든 동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의식과 무의식을 실재와 가상을 그리고 그럴듯한 점잖음과 들끓는 욕망을, 나눌 이유란 없다. 한 마디로 불리(不異/不二)하다. 이 불가분의 엮임이 존재가 의미하는 바이고, 그리고 사회는 이러한 존재들의 사회다. 다시 말해 세계는 가면놀이의 공연장이다. 텍스트는 각양 장치를 동원해 이 공연장의 열기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 덕택일까. 가면 놀음의 문제가 비교적 생생한 호소력으로 무장한 채 폐부를 간질여오는 건 피부에 와 닿는 감촉이 전연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조밀히 조형된 영화언어들이 조직하는 지각적 인식은 이 문제가 내 문제이고 우리의 문제라는, 명석판명의 사실에 대한 현상학적 깨침을 환기한다.

반면 직선적인 비판영화는 테제 그 자체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자칫하면 생기를 망실해버리기 쉽다. 실존적 감각을 도외시하고 건조한 명제들만 부각한다면 지식을 확보할 순 있을지언정 삶의 현장에서 유리되기 쉬운 법이다. 아무리 대단한 지식일지언정 울림을 주지 못한다면, 그 울림의 파장이 더 나은 삶과 세계를 현실화 할 변화의 동력원으로 전화하지 못한다면, 그저 지극히 무용한 형애(荊艾) 따위로 전락하게 될 따름이다. 〈어스〉가 빚어낸 종합주의적인 상상력이 꽤나 빛나 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강렬한 추체험의 자리로 관람객을 무리 없이 견인할 수 있기에, 그 자리에서 시작되는 진지한 존재론적 성찰과 더불어 그이들로 하여금 더 괜찮은 현실을 자못 갈망하고 또 현재화할 수 있도록 추동하기에-.

 

 

 

글·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동물인 늑대의 이미지로부터 착안해낸 이름이다. 이 짐승은 홀로 쏘다니며 늘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이란 사실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 있을 게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에 대한 성찰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독특한 쓰기/읽기 형식으로서의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그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터이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면서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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