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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크리티크] -우롱차 한 모금의 온기 <벌새>
[임정식의 시네마크리티크] -우롱차 한 모금의 온기 <벌새>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19.09.30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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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벌새>의 스포일러가 다수 있습니다.)

 

‘相識滿天下(상식만천하) 知心能幾人(지심능기인).’ <벌새>(감독 김보라)에서 대치동 한문학원 강사인 영지 선생님이 수업 첫 시간에 칠판에 쓴 글귀다. 『명심보감』의 「교우(交友)」 편에 나온다. ‘얼굴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한데,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글귀에 이미 대답이 들어 있다. ‘마음을 아는 사람’은 그 수가 매우 적다. <벌새>는 관객에게 ‘지음(知音)’을 묻는다. 주인공인 은희의 행적을 통해 ‘마음을 알아주는 벗’과 내면 성장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니까 <벌새>의 서사는 관계의 문제로 수렴된다. 은희는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다만 ‘은희의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이 그 내밀한 사실을 알아채고, <벌새>의 날갯짓을 응원한다.

<벌새>의 주인공은 중학교 2학년 여학생 은희다. 공부를 잘 못하고, 친구도 많지 않은 은희에게는 그러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있다. 아니, 있었다. 친구로 인해 상처 받은 은희에게 말없이 우롱차 한 잔을 따라준 사람, 영지 선생님이다. 은희의 가슴속을 흘러내린 따뜻한 우롱차는 어미 소의 혀처럼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하지만 은희는 ‘마음을 아는 사람’인 영지 선생님과 예기치 않게 작별한다. 은희가 눈물 흘리며 바라본 새벽 성수대교의 처참한 모습은 은희의 마음에 생긴 구멍의 은유다.

 

그렇다고 <벌새>가 부재의 상처에 발이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뿐만 아니라 친구, 후배, 남자친구, 학교와 학원의 선생님, 의사 등 다양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성장해 간다. 그들의 색깔과 삶의 결은 꽤 다르다. 단짝 친구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문방구 주인에게 은희의 주소를 알려주고, “언니가 좋아요” 하면서 접근했던 후배는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하고 차갑게 은희를 밀어내는 식이다. 반면 은희의 마음을 다독거려주는 인물도 있다. 새서울병원 의사가 그렇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단짝 친구도 마찬가지다. 은희가 남학생에게 “나 너 안 좋아했어”라고 쏘아붙이기도 한다. 그만큼 열네 살 은희의 삶은 스펙트럼이 의외로 넓다. 이 다채로운 에피소드들은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다뤄진다. 중심 서사를 뼈대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일반적인 영화의 스토리텔링과 다른 <벌새>의 특징이다.

수술과 입원, 만남과 이별, 사랑과 상처, 기쁨과 외로움, 우정과 배신이 반복되는 사이에 봄과 여름이 지나간다. 은희는 지금 가을을 통과하고 있다.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 피는 계절이다. 물론 은희를 누님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벌새>의 은희가 세 계절 동안 겪은 사건들이 은희의 내면에 미친 영향은 ‘거울 앞에 선’ 누님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은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는 세계를 통과하면서, 상처를 통해 성장하는 것이다.

비교적 균질한 에피소드들 속에서, 그래도 도드라지는 사건이 있다. 성수대교 붕괴다. <벌새)에서 이 사건은 중요한 변곡점이자 은유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진 다리, 영지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잠적. 믿음과 관계의 붕괴. 그로 인해 생긴 은희의 텅 빈 시간과 영혼…. 많은 국내영화가 성수대고 사건을 직‧간접걱으로 다루거나 배경으로 사용했지만, <벌새>만큼 그 돌발적인 사건이 인물의 내면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작품은 드물다. 그래서 은희가 바라보는 끊어진 다리의 강렬한 이미지는, 영화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다. 희망과 절망, 과거-현재-미래, 상처와 극복의 문제 등을 압축해서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벌새>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맺기 방식, 관계의 변화와 그 의미를 낮은 목소리로 들려준다. 만남과 이별이 만들어낸 모든 관계의 의미들이 은희의 내면에 발자국처럼 차곡차곡 쌓여간다. 한두 개의 결정적인 사건이 아니라, 비슷해 보이는 사건들이 모여서 은희를 키운다. 그러한 점에서 <벌새>의 마지막 장면은 의미가 남다르다. 은희는 수학여행을 떠나기 직전, 관광버스 앞에 한참 동안 서 있다. 은희의 표정은 복잡 미묘하다. 신맛도 쓴맛도 단맛도 아닌, 그 맛들이 다 들어있는 과일 같다. 귀를 드러낸 행동은 예사롭지 않다. 은희는 큰 수술을 했고,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은희는 그 상흔을 애써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은희가 봄부터 가을까지 겪은 일을 확인해온 관객들에게는 은희의 그 표정이, 귀 뒤로 넘긴 그 단발머리가 애잔하면서도 대견하다. 관객 마음의 한 자락이 짠해지는 것은, 그 나이를 오래 전에 통과한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봄과 시련의 여름을 지나 가을을 건너가는 은희의 그 성장과 치유의 발걸음이 낯설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그 시절을 지나왔으므로. 우리는 모두가 ‘은희’였던 시절이 있었으므로. 은희의 마지막 표정은 <벌새>에서 드물게 클로즈업으로 처리된다. 은희는 무서리와 마른 갈대의 계절을 무사히 건너고 있는 것이다. 영지 선생님이 따라준 우롱차 한 잔의 온기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벌새>의 서사는 은희의 동선을 따라 전개된다. 영화는 부모님과 오빠, 언니, 단짝친구, 후배, 남자친구, 영지 선생님, 의사 등 영지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그 에피소드들의 인과관계는 느슨하다. <벌새>의 인물구도는 방사형이다. 은희를 가운데에 두고, 은희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의 점으로 존재한다. 각 인물 간에는 교류가 거의 없다. 이러한 인물 구도로 인해 영화의 서사는 직선으로 흘러가지 않고, 점과 점이 연결되면서 느슨한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이로 인해 스토리가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은희의 일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얻는다.

 

<벌새>에서는 가족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벌새>의 인물 유형은, 1994년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반영한다고 해도, 매우 익숙하다. 아빠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이면서도 가족만을 위하고, 공부 잘하는 오빠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폭력적이다. 엄마는 남편의 바람기를 알아채고 추궁하지만, 곧바로 TV를 함께 보면서 시시덕거린다. 그런데 이 가족은 서로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다. 엄마가 해준 부침개를 먹으며, 은희는 마음의 허기를 채운다. 오빠도 은희와 동병상련의 관계가 되면서 화해한다. 특히 가족들의 빈번한 식사 장면은 의미가 남다르다. <벌새>에서 다섯 명의 은희 가족은 대부분 같이 식사한다. 이 식사 장면은 자주 반복된다. 서로 싸운 후에도, 주먹을 휘두르고 난 뒤에도,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서 함께 식사를 한다. 어머니는 딸의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준다. 은희가 그토록 많은 사건을 겪으면서 내면의 성장을 이뤄가는 비결이다.

<벌새>에 상투적인 혹은 작위적이라고 여길 만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영지 선생님의 일부 발언은 영화의 전체적인 톤과 어긋난다. 그런데도 <벌새>는 전체적으로 따뜻하다는 느낌을 준다. 뜨겁지는 않다. <벌새>가 기본적으로 여중학생의 성장영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느낌은 다소 의외다. 카메라와 인물의 적당한 거리, 은희의 무심한 듯 해사한 표정, 맑은 햇살과 바람 등의 요소가 영화 전편에 배어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열네 살 소녀의 이야기가 꼭 상처, 아픔 따위로만 채워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첫 장편영화가 이토록 유연한 시선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우롱차 한 모금의 온기에 그 비밀이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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