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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이 도래했다
불가능이 도래했다
  • 세르주 알리미
  • 승인 2011.02.11 1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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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정치인들은 어떤 것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사안의 ‘복잡성’을 원인으로 들곤 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실제로는 간단할 일이 될 수도 있다. 9·11 테러가 대표적이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우리와 테러리스트들 중 어느 편인지 선택하도록 했다. 튀니지는 ‘북아프리카의 탈레반 체제’(1)냐 ‘친근한 독재자냐’ 간의 선택이었다. 이런 방식은 이 속에 엮인 인물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용이하다. 그리하여 튀니지의 독재자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서 보호자를 자처했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유일한 적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이나 사회운동이 그동안 체제 속에 억압돼온 주역들이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계기가 되면서 그간의 철저한 통제도 무너지게 된다. 흔들리는 집권세력은 대중의 시위 속에 행여나 체제 전복적 움직임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포착하면 이를 여지없이 이용한다. 그럴 가능성이 없으면 조작해내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 <강한 긍정>, 2007-아멜 베니
지난 1월 13일, 진 엘아비딘 벤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의 도피 전날이었다. 유네스코 튀니지 대사인 메즈리 하다드 앞에서 벤 알리 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세속 성향의 네지브 체비는 “저임금만으로 국제경쟁력을 유지하려는 발전 체제”를 비난했다.(2) 또한 “불법 축재된 부를 과시하는 현상이 대도시에 만연해 있고, 국민은 현 체제를 거부한다”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난 하다드 대사는 “그런 국민이 당신이 사는 라 마르사 궁에 난입해 약탈을 일삼을 것이고, 그것이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든 사회가 초래하는 결과”라고 응수했다. 이어 그는 “벤 알리는 1987년 흥분한 폭도들과 극단주의자들로부터 튀니지를 구한 영웅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집권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광분한 폭도들과 이들의 손을 잡은 신볼셰비키파들이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하다드 대사는 ‘튀니지의 수호자’가 축출되었음을 공표했다. 그리고 1월 16일 체비는 튀니지 지역발전 장관에 임명되었다. 아랍 민족에게 혁명이 잦은 것은 아니나, 그들의 혁명은 신속했다.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에서, 대학을 졸업한 청년 실업자들의 탄원서, 트라벨시 가족들이 기거하던 카르타지 대통령궁 점령, 투옥된 죄수들의 해방, 특권 폐지를 외치며 수도 튀니스에 농민들이 결집하기까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에 부득이 비교분석을 할 것까지는 아니나, 튀니지의 역사적 상황은 그와 비슷한 여건에 있다. 자발적인 시위가 확산되고, 다양한 사회계층이 결집하며, 이에 절대주의 집권세력이 흔들린다. 여기서 멈추고 이 정도로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더 나아갈 것이냐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은 빠르게 다가온다. 이 순간 사회계층 일부(자유부르주아 계층)는 열세를 만회하려고 행동을 개시한다. 또 다른 계층(농민, 일자리는 있으나 항상 해고 위험에 처한 노동자, 실업 상태에 있는 노동자, 낙오된 학생 등)은 시위 확산을 통해 쇠퇴하는 독재체제와 수탈을 일삼는 특권층을 축출하는 것 이상을 이끌어내려 한다. 젊은 세대가 주축을 이루는 서민층은 위험은 자신들이 감수하고, 정작 혜택은 덜 무모하면서 연줄만 좋은 타인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의 해충 같은 존재인 경찰과 마피아들을 제거하는 수준에서 사회체제를 영속시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런 가정을 통해 벤 알리 개인과 그 친족들의 독재에 대한 저항이 소수에 의한 경제 독점에 대한 저항으로 확대될 것이며, 그 속에서 관광 알선업자들이나 금융시장, 국제통화기금(IMF)도 거부의 대상임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또한 저항하는 민중은 관광객이나 면세 지역, 금융시장에 주어진 자유로운 특혜도 철회하려고 할 것이다. 이미 1월 19일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튀니지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는데, 최근 벌어진 체제 변화로 인한 튀니지의 국내 불안이 이유였다.

알제리나 리비아, 중국, 서방국가들 또한 튀니지의 소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슬람 신도가 대부분인 국민이 자유와 평등을 외치고 있을 때, 프랑스는 “민주주의와 이슬람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나름의 토론을 벌이며, 흔들리는 벤 알리 권력층에게 “프랑스 질서유지군이 가진 노하우”를 전수할 뜻을 비쳤다. 이슬람 신도이건, 기독교도이건, 비종교 성향이건 간에 소수 특권층은 민중 시위가 발생하자마자 결집된 모습을 보였다. 극단 보수세력에 대항해 여성 권리와 정교(政敎) 분리를 외치고,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사회민주주의 계열 정당들이 중심이 돼 자신들의 이념을 전세계로 확장하는 데 목적을 두고 설립한 사회주의 계열 정당 연합체) 소속 정당을 이끌던 전직 대통령이 도피처로 정한 곳은 다름 아닌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이란이나 베네수엘라에서 최근 몇 개월간 경찰이 발사한 총에 맞아 숨진 주검이 몇백 구에 이른다고 가정해보자. 이미 30여 년 전 민주당 성향의 교수인 진 커크패트릭은 논문에서 단호한 논조로 이같은 비교를 반박했다.(3) 커크패트릭은 “친서방주의적이고, 개혁적인 독재체제가 그 체제를 대체할 수도 있는 전체주의 체제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1979년 발표된 진 커크패트릭의 논문은 당시 대선 후보였던 로널드 레이건의 호응을 얻었고, 레이건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커크패트릭을 유엔 대사로 임명했다. 커크패트릭은 그해 미국이 마신 두 번의 고배를 분석했다. 바로 이란혁명과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혁명이다. 커크패트릭은 “미국의 카터 정부가 민주주의를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친미 성향의 온건 독재정권이던 이란의 샤(이란 국왕의 존칭)와 니카라과의 아우구스토·소모사 정권을  미국에 덜 호의적인 극단적 독재정권으로 교체하는 데 적극 협조했다”고 평했다.

물론 퇴진한 두 정권에 비난의 여지가 없던 것은 아니다. “두 정권 모두 선거 없이 정권을 차지한 인물이 지도자였고, 계엄령을 선포해 정적들을 수감하거나 해외로 내쫓고 때로는 고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커트패트릭은 “이들은 진정 미국에 호의적이었고, 자녀들을 미국 대학에서 교육했으며, 때로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유엔에서 미국을 지지했다. 두 국가의 대사관들은 영향력 있는 미국인 인사들을 초청했고, 이란의 샤나 니카라과의 소모사는 미국에서 환영받는 정치인들이었으며, 이들도 미국에 많은 친구들을 두고 있었다”며 평가에 균형을 주려 했다.

진보 이념은 계몽주의 시대 때부터 서구 사상에 깊게 침투해 있었고, 현대판 진보 이념에 사로잡혀 있던 카터 정부는 정권 교체를 장려했다. 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미국은 해당 국가 야당 세력의 정치적 다양성을 과대평가했고, 특히 온건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의 힘을 과대평가했다. 또한 극단주의자들의 영향력과 비타협적인 태도를 과소평가했고, 정권과 야당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잘못 평가했다. 그 결과 이란에서는 호메이니의 교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고, 니카라과에서는 산디니스타 좌파가 정권을 잡았다.

친서방적이고, (무엇이든 이들이 원하는 요구를 들어준다는 조건으로) 향후 변화가 용이할 것이라는 이유로 최소한의 필요악인 독재체제를 지지하거나, (과거 공산주의자들이 그랬듯이) 민주화 시위 뒤에 숨어 있을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우려는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난 몇 주간을 보면 미국보다 프랑스가 진 커크패트릭 방식의 논리에 더 영향을 받은 듯하다. 튀니지 시위 동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영향이 미미했고, 결과적으로 튀니지 내 벤 알리 정권에 반대한 광범위한 정치적·사회적 동맹이 형성되자, 미국은 안심했다. 위키리크스는 미 국무부가 마피아나 다름없는 세력과 소수 특혜층의 경직된 체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폭로했지만, 미 정부는 자유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세력을 믿고 그들에게 관여하지 않았다.

튀니지의 봉기는 아랍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불평등 심화, 높은 실업률, 과중한 경찰력이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시위,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미래가 막막한 청년 실업자, 자국에서 마치 관광객인 양 기생하는 부르주아층과 같이 시위에 불을 댕길 기폭제는 곳곳에 산재해 있다. 물론 튀니지 국민이 이런 문제들을 한 번에 해결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들을 속박하던 치명적인 굴레를 없애는 데는 성공했다. “이것이 최선일 뿐 대안은 없다”라고 끊임없이 세뇌되었음에도 이들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때로는 불가능이 현실이 됨”(4)을 말이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각주>
(1)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튀니스 선언, 2008년 4월 28일.
(2) <Bourdin&Co의 초대석>, RMC, 2011년 1월 13일.
(3) 진 커크패트릭, <독재와 이중잣대>, Commenta ry, 뉴욕, 1979년 11월.
(4) 슬라보예 지젝, ‘불가능을 도래하게 하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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