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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분노하라
  • 성일권/한국판 발행인
  • 승인 2011.02.11 18: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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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르 디플로' 읽기]

외환위기 이후, 우리 대학들은 더 이상 사회적 담론을 생산하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학문의 장이 아니다. 남을 짓밟고 벼락출세하는 테크닉을 전수하는 곳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삼성관, 포스코관, LG관 등 재벌 연수원을 방불케 하는 연구실과 강의실의 화려함은 대학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자본의 돈맛에 길들여진 대학은 기업 입맛에 맞는 주문형 인재 양성을 위해 ‘친기업적-친자본적 커리큘럼’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글로벌 인재 양성이라는 깃발 아래! 사회의 불의와 모순을 비판하고, 대안 마련을 위해 고심해야 할 대학에서는 더 이상 사유와 저항과 실천의 학문을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

몇 년 전, 이런 대학의 암담한 현실에 절망한 진보 학자 40여 명이 ‘깨어 있는 인재’ 양성을 위해 프랑스 파리8대학과 독일 브레멘대학의 정신을 모델 삼아 가칭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을 추진한 바 있다. 하지만 대학원 설립기금 40억 원을 마련하지 못해 아직까지 표류 중이다. 돌이켜보면, 프랑스와 독일의 지식인들은 68혁명 이후 제도권 대학의 권력과 명예를 내던지고, ‘실험적인’ 대학에 참여했지만, 우리 학자들은 대학 울타리 안의 안락함에 안주해왔다. 노동자·극빈층·성소수자·학생·외국인 등 소외 계층의 편에서 자본과 권력에 대한 저항 논리와 담론을 생산하고, 때로는 투쟁의 전면에 나선 이들은 비제도권의 경계 지식인이지, 결코 제도권 학자가 아니다. 수년째 국회 앞에서 벌이는 비정규직 시간강사들의 천막 시위는 물론, 시청과 광화문 광장의 수많은 시위 현장에서 제도권 교수들의 얼굴을 보기란 거의 힘들다. 자본과 권력의 전횡에 분노할 줄도 모르고, 사회변혁의 실천력도 갖지 못한 박제된 지식인들. 프랑스의 사회학자 뤼크 볼탕스키와 에브 시아펠로가 지적한 대로, 어쩌면 우리 제도권 학자들은 분노와 실천을 내세운 ‘사회적 비판’보다는 분석과 관념에 빠진 ‘예술적 비판’에 자위하면서, 그 결과 미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조합되고, 자본이 미화되는 데 기여한 측면이 다분하다.

새해 들어 30쪽짜리 작은 책 한 권이 프랑스 사회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앵디네 부!>(Indignez Vous!)>. 우리말로 <분노하라>이다. 지난해 10월 초판 8천 부가 출간된 이 책은 이미 100만 부 판매를 넘어섰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독일 나치에 맞섰던 스테판 에셀(94)이다. 새해 들어 프랑스의 모든 언론이 <분노하라> 특집을 앞다퉈 다루면서 바야흐로 2011년은 ‘분노의 시대’로 정의될 조짐이다. 이 책의 폭발적 반응은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입속에 삼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적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개혁’이란 이름 아래 공동체적 사회체제를 때려 부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지금의 프랑스 사회를 관통하는 감정은 바로 ‘분노’다. 한 세기를 살아낸, 그래서 두려울 것이 없는 이 당당한 노인이 거리낌 없이 그 분노를 끌어낸 것이다. 바로 지금이 여러분이 분노해야 할 때라고, 그래서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구해낼 때라고.

<르 디플로> 2월호는 특집을 통해 아랍 세계를 휩쓰는 변혁의 물결을 ‘불가능의 도래’로 정의하고, 분노할 줄 아는 시민들이 그 변화의 주인공이라고 평가한다. 철옹성 같기만 하던 권력자들의 광기도 결국 분노할 줄 아는 시민 정신 앞에서는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분노할 일이 넘쳐나기만 하는 대한민국의 2011년 초입, 분노보다는 ‘냉소’가 맴돈다. 대학 지성들이 저렇게 박제화됐으니 말이다.

글•성일권 발행인  sungilkwon@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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