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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다르덴 형제의 눈으로 만든 '400번의 구타', <자전거 탄 소년>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다르덴 형제의 눈으로 만든 '400번의 구타', <자전거 탄 소년>
  • 안숭범(영화평론가)
  • 승인 2019.10.2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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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소년이 있다. 애초에 어머니는 없고, 믿었던 아버지는 보고 싶어 찾아 온 자신을 끝내 외면하며 어쩔 수 없이 머물러야 할 보육원은 가족과 같은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 내에서 소년이 서 있는 위치는 스스로 짐작하기도 힘든 소외의 복판이다.

그 때문일까. <자전거 탄 소년>을 보는 내내 트뤼포의 역작 <400번의 구타>가 생각났다. 트뤼포의 화신이기도 했던 <400번의 구타> 속 소년 앙트완(장 피에르 레오 분)도 불우하긴 마찬가지다. 단지 가난해서가 아니라 기댈 곳이 없었기에, 그는 개인적 불행과 사회적 소외가 빚은 세계에 갇혀 지낸다. 매사 짜증만 부리는 어머니는 새아버지를 두고도 외간 남자를 집 안에 들인다. 새아버지는 그런 아내에 대해서도 그리고 앙트완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깨진 내면이 그 자신부터 찌르는 상황이었기에 앙트완은 학교에서도 겉돌기 시작한다. 학교는 그가 감당하고 있는 문제적 조건에 관심이 없다. 보편적 사회화를 강요하는 제도권의 한 양태일 뿐이다.

급기야 학교는 앙트완에게 타자기를 훔쳤다는 누명을 씌우고, 어머니는 억울하게 소년원에 갇힌 아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 소년원에 수감된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눈매엔, 원래부터 그가 소년원에 있어야 했다는 조소가 담겨 있다. 결국 앙트완은 소년원을 탈출한다. 갈 곳을 정해놓은 탈출이 아니다. 그러고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닷가에 닿는다. 거긴 자신을 괴롭힌 모든 것을 뒤로 한 지상의 끝, 그러나 더 이상 도망칠 곳을 주지 않는 세계의 귀퉁이다. 그때 바닷가에 발을 몇 번 담근 후, 앙트완은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뒤돌아선다. 그 순간 앙트완의 무표정은 관객에게 어떤 입장을 요구한다. 여기서의 '어떤 입장'은 그 시대의 어른들이 져야 할 숙제 같은 것이다.

 

다르덴 형제가 <자전거 탄 소년>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 '어떤 입장'이라고 느꼈다. 앙트완과 비슷한 연배라고 여겨지는 시릴(토마 도레 분)의 세계는 앙트완의 그것처럼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폭력적 질서에 가깝다. 시릴은 아버지가 자신을 잠시 보육원에 맡겼다고 믿었다. 물론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아버지는 시릴을 버린 지 오래다. 아버지는 시릴에게 새 주소도 가르쳐주지 않고 이사해 버린 것은 물론 시릴의 자전거마저 함부로 팔아버린다. 시릴이 사만다(세실 드 프랑스 분)에게 마음을 열기 전까지, 그러니까 영화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기 전까지 시릴의 유일한 친구는 바로 그 자전거였다.

시릴에게 자전거를 되찾아 준 사람은 사만다다. 동네에서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는 그녀는 잠시 스친 사이인 시릴에게 곧바로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주말이면 보육원으로부터 시릴을 데려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어린 나이임에도 사람에게 얻은 상처가 적지 않은 시릴은 사만다의 호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때 헝클어진 내면을 가진 시릴에게 한 친구가 다가온다. 동네 불량배다. 그는 자신의 본색을 숨긴 채, 시릴에게 자기 집을 내어주고 비디오게임을 시켜준다.

그러나 관객의 예상대로, 또 사만다의 우려대로, 불량배가 시릴에게 접근한 이유가 밝혀진다. 강도짓을 대신 시키려 했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릴의 강도행각은 꼬이고 곧이어 시릴은 불량배로부터 버림받는다. 그 순간 훔친 돈을 들고 먼 거리를 달려 도착한 곳은 아버지가 일하는 곳이다. 시릴이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던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아버지의 표정을 경유해 우리에게 도착한 것은 분명 '어떤 입장'이다. 물론 시릴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 있었던 것처럼, 그 다음 장면에서 버림받는다. 아버지로 표상되는 과거회귀적인 희망에서 완전히 분리된다.

 

사만다가 피해자측과 합의를 봄으로써 시릴이 일으킨 사고는 일차적으로 수습된다. 그러나 영화 종반부, 절망의 그림자는 시릴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어떤 입장'을 재차 요구하기 위한 다르덴 형제는 그만의 플롯을 선보인다. 시릴은 이웃을 초대해 파티를 열자는 사만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숯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시릴이 사만다뿐만 아니라, 주변인에게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는 건 틀림없이 희망의 징조다. 이를 미래지향적인 희망이라고 명명하는 것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시릴을 뒤쫓아가 돌을 던진 이가 있다. 시릴에게 야구방망이를 얻어맞았던, 그러니까 강도 피해를 당했던 부자(父子) 중 젊은 아들이 바로 그다.

문제의 부자는 시릴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인죄를 면피할 방도를 강구하는 부자를 뒤로 하고 시릴이 일어나 자전거 위에 오른다. 영화는 거기까지다. 이 순간 혹자는 미세한 희망을 말하겠으나, 개인적으론 선명한 절망이 만져졌다. 그래선 안 되겠지만, 시릴이 좀 더 자라면 다르덴 형제의 전작 <더 차일드>의 브루노(제레미 레니에 분: 그는 <자전거 탄 소년>에서 시릴의 무책임한 아버지로 나온다)처럼 되지 않을까. 도둑질로 연명하는 중 태어난 자기 아기를 무책임하게 팔아버리는 미성숙한 '아이-어른'이 되지 않을까. 이 절망의 무게는 다르덴 형제가 만들어 온 영화의 힘과 다르지 않다.

다르덴 형제가 추구한 리얼리즘은 항상 견고한 형식 안에서 구축되어 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다르덴 형제의 핸드헬드 쇼트는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주인공의 흔들리는 내면 풍경을 건조하게 보여준다. 배우로서 훈련되지 않은 주인공이 펼치는 연기는 평범한 삶에서 이탈된 자들의 실존적 상황을 꾸밈없이 전달한다. 주인공과 정서적 동일시를 이끌어내야 할 순간에는, 카메라의 위치를 조정해 주인공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측후방의 위치를 선사하곤 한다. 그런 일련의 관습 속에 <자전거 탄 소년>도 머문다. 그러나 작은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들어낸 사실도 언급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음악이 이미지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다른 영화감독의 경우라면, 이상할 것이 없는 진술이지다. 그러나 그간 다르덴 형제가 음악의 사용을 철저히 배제해 온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새로운 영화세계로의 진입을 상상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죽었으면 어쩌나 했던 시릴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전거를 타고 사만다의 집으로 향할 때, 우린 '어떤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앙트완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사회 구성원으로서 오히려 퇴행했으나 시릴은 성장 가능성을 풍긴다. 트뤼포가 흑백화면 속에서 미래가 없는 앙트완을 이제 어떡할 거냐고 물었다면, 다르덴 형제는 불안한대로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시릴에게 당신은 어떤 이웃이 되어주겠느냐고 묻는다.

시릴이 불안과 외로움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자전거 안장 위에 앉아 있을 때다. 어쩌면 그가 느끼는 평안과 자유는 자전거 안장만한 부피인지도 모른다. 그가 평화롭게 발 디딜 수 있는 현실 공간을 위해 더 많은 사만다가 나서주길 기대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안숭범

영화평론가.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지금은 영화를 포함한 문화콘텐츠의 인문학적 기획 및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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