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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리는 모두 의사며 환자 - <아들의 방>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리는 모두 의사며 환자 - <아들의 방>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19.12.16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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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니 모레티 감독 <아들의 방> (2001)

개입

영화의 주인공은 조반니다. 그의 직업은 정신분석의사. 그가 하는 일은 정신이 이상한 현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일이다. 소위 프로이트의 침대라고 불리는 장의자에 환자가 앉으면 환자들은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미친 듯이 지껄인다. 이들의 증상은 정신병이라기 보다는 억압된 내면을 밖으로 표출하고자 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조반니는 그들의 내면을 훔쳐보고 엿듣는 사람일 수 있다. 남을 관찰하는 것이 직업인 것은 사실이다.

적당한 시점이 되면 조반니는 그들의 삶에 개입한다. 조언이라는 형식의 말 걸기는 일종의 개입이다. 정신분석의라는 사회적으로 부여된 권위에 의해 그는 그들의 사생활과 마음안에 개입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도덕성과 윤리에 대한 질문을 한다. 그는 현실에서 자신의 내면공간으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이러한 자기만의 궤적을 갖게 되는 이유는 그가 남의 사생활에 개입하더라도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환자들을 볼 때 답답함을 느낀다. 충분히 교정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방치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남에서 자신으로, 남의 얘기만 듣다보니 자신도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나는 저런 식으로 살지 말겠다는 반성과 다짐을 하게 된다. 남의 이야기는 자신으로 돌아와 반성이 된다. 여전히 그는 남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와 남은 다른 경우처럼 보인다.

 

그에겐 환자들과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있다. 직장을 다니는 아내와 운동을 좋아하는 딸 이레네, 아들 안드레 이렇게 단란한 네 식구가 산다. 가족이 조반니의 모든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모든 근거는 이 가족공동체에서 발생한다. 환자 중에는 성도착자와 질병망상자, 게으른 수다쟁이 등이 있다. 이들 모두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자기 스스로 정신병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가족공동체가 없다는 생각이다. 혼자 떨어져 고독하게 생활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커다란 시련이며 변화가 닥쳐온다. 애지중지 하던 아들이 죽은 것이다. 아들의 죽음이 전체를 흔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전체가 흔들리고 만다. 영화는 그 이유를 관객에게 질문한다.

 

반전

인생은 반전이다. 조반니에게 아들의 죽음은 평소 예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이렇게 사람은 제 2의 인생이 시작된다. 조반니의 일상은 새롭게 변화된다. 그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느라 일에 몰두 하지 못한다. 일을 하려다 보면 아들이 생각나고 자신에게 회한으로 다가온다. 그는 마침내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일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남의 인생에 개입할 수 없다는 도덕성 혹은 윤리의식 때문이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인간이 왜 바뀔수 있는가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게 한다.

영화에 의하면, 인생은 이런 것이다 생각하는 순간, 다른 방향이 나타난다. 조반니는 가족의 단란함을 보면서 이게 인생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 갑작스레 죽고 그의 삶은 알 수 없는 균열이 생긴다. 한 명만 빠졌을 뿐인데 가족공동체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조반니 뿐 아니라 아내와 딸 조차도 슬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가족은 온기라곤 찾을 수 없는 적막한 공간으로 변한다. 세 명은 끝없이 방황하는 나날을 보낸다. 이러한 인생의 비유를 그대로 담은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환자를 대하면서 조반니는 그 환자의 푸념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다. 그는 이제 이 환자와 마지막이라고 속으로 되뇌인다. 골치 아픈 환자와의 이별은 해방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절망이기도 하다. 의사로서 남을 치유하지 못함, 즉 자신의 절망을 의미한다. 이제 절망이구나 생각하는 순간 남에 의한 우연의 구원이 발생한다. 이제 안 올거라고 말할 줄 알았던 환자는 스트레스가 해소된 데 대해 고마워하면서 다음 주를 약속한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조반니는 절망으로부터 구원되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의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었다.

 

후회, 기억의 재구성

조반니는 끊임 없이 아들 안드레아의 기억에 시달린다. 그는 안드레아를 죽인 것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자책을 한다. 그날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운명이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그는 전화를 건 환자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는 환자가 전화를 하지만 않았어도 아들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어 자신이 전화를 받고 안 가기만 했어도 아들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이 모든 걸 조반니의 자책감일 뿐이라고 본다. 남의 정신병을 치료해야 할 의사인 조반니는 스스로 정신병에 걸린 것이다. 그는 전화를 건 환자를 만나면 분노가 치밀어올라 그를 치료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병을 먼저 치료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의사를 그만 둔다.

그는 자신이 아들을 생각했더라면 아들은 죽지 않았을 거라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 기억은 그를 지배한다. 그는 머릿속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는 영화를 찍고 있던 셈이다. 감독은 그것을 영화로 보여준다. 과거의 장면이 변형되어 조반니의 생각 대로 펼쳐진다. 아버지의 영화인 셈이다. 아버지의 자책은 영상으로 표현된다. 감독에 의하면 인간의 기억을 통해 상영되는 영화는 작은 위안이다. 조반니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자책감,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감독은 영화의 기능이 인간의 무능력을 감싸는 도구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기록한다. 이 영화에서 자신을 개선하고자 반성하는 인간, 조반니를 구원하는 것은 그의 이루지 못한 꿈을 기억 속에서 재구성해 내는 일이다.

감독은 감정을 표현하지만 길게 끌고 가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헐리우드의 문법을 구사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구조를 중시한다. 이 영화는 시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환자들은 구조의 일부분이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반복은 마지막에 어떤 결론을 지향한다. 이들은 정신병자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임을 증명한다. 이들의 조건과 주인공 조반니가 하나의 방향속에 공존하고 있음을 아울러 증명한다. 그것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중 하나가 된다.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

 

 

글: 정재형

동국대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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