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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문화톡톡] 은밀해진 확장과 범람하는 욕망 - <하녀>를 경유한 <기생충>의 은유법
[김희경의 문화톡톡] 은밀해진 확장과 범람하는 욕망 - <하녀>를 경유한 <기생충>의 은유법
  • 김희경(문화평론가)
  • 승인 2019.12.3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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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로운 확장에 덧대어진 은밀함

매끄럽고 세련된 단어엔 때로 가장(假裝)이 숨어 있다. ‘은밀하다’는 말이 그렇다. 매혹적으로 다가오지만, 들켜선 안 되는 비밀을 품고 있기에 감춰야 하며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유와 확장을 욕망하는 인간의 본능과 상충되는 ‘제약’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칠면서도 호기로워야 할 걸음에 은밀함이란 포장이 덧대어지면, 자꾸만 접질리고 비뚜로 나간다.

어디든 닿고 마음껏 활보하려는 ‘리좀(rhizome)’적 행위가 은밀해져야 하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리좀은 줄기가 흙에 닿으면 뿌리가 되는 식물 ‘지하경(地下莖)’을 이른다. 질 들뢰즈가 이에 비유해 정립한 철학적 개념 리좀은 각 개체가 본인이 속한 지층으로부터 나아가 다른 지층에 연결되어 뒤엉키고, 또 원하는 곳이 생기면 다시 뻗어나가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리좀의 확장에도 은밀함이 깃들면, 그 안에 자리한 욕망은 스스로 모호해지고 뒤틀리게 된다.

영화는 인간이 가진 리좀의 본능과 자유로운 확장에 천착해 왔다. 주로 ‘계급’이란 전혀 매끄럽지 않은 소재와 함께였다. 무산자와 유산자가 각자 머무는 서로 다른 지층, 그 지층 을 뚫고 나아가려는 무산자의 리좀적 행위가 치열하게 그려졌다. 클로드 샤브롤, 구로사와 기요시, 지아장커 등은 장르를 넘나들며 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한국 영화의 시간도 리좀의 생동하는 리듬과 함께 흘러왔다. 김기영의 기념비적 작품 <하녀>는 노골적이고 대담한 하녀를 통해 리좀의 욕망을 정면으로 다뤘고, 이장호의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연애라는 통속적 소재에 리좀의 욕망을 접목하고 이를 차단하는 시대의 비극을 그렸다. 최근에 이르러선 이창동의 <버닝>이 상이한 지층으로부터 불쑥 뻗어나온 줄기들과 그 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솟구치는 불의 이미지로 담아냈다.

봉준호도 리좀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추적해 온 감독이다. 복도식 아파트를 질주하며 리좀의 욕망을 분출해낸 <플란다스의 개>, 한국 사회에서 밀려나고 배척당하는 리좀을 괴물이란 독특한 소재와 함께 소화한 <괴물>, 기차의 꼬리 칸에서 앞 칸까지 파고드는 리좀의 확장을 그린 <설국열차> 등을 켜켜이 쌓아 올려왔다. 그리고 <기생충>에 이르러선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변주로 외연을 확장한다. <하녀>를 오마주 하여 한국 영화의 시간을 되돌리는 동시에 시간의 흐름만큼 달라진 리좀의 확장 방식을 은유한다. 리좀적 행위에 <하녀>엔 없던 은밀함을 덧대고, 이 안에서 한없이 뒤틀리는 욕망과 그 범람을 끈질기게 톺아본다.

 

​쥐약을 든 하녀, 수석을 품은 기우

하녀가 기우를 만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60여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야 하는 발칙한 상상이지만, 한국 영화를 관통하는 리좀의 변화를 드러낼 가장 확실한 질문일 것이다. <하녀>에서 항상 천대받던 하녀가 <기생충>에서 ‘케빈’이라는 영어 이름을 내세워 ‘기세’를 외치고 있는 기우와 마주해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을테다. 오히려 서슬 퍼른 눈빛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은밀한 너에겐 자유가 없다.”

기우의 손끝 가득히 맴도는 ‘기세’와 머리 속에 치밀하게 세워놓은 ‘계획’은 결코 들키지 않아야 한다. 자신보다 높은 층위를 점령하고 있는 자들의 눈을 속이고 몸을 숨겨야 한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스스럼없이 욕망을 드러내는 하녀의 관점에서 이런 기우의 행동은 리좀의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다. 하녀는 분개하며 기우가 애틋하게 품고 있던 수석을 빼앗아 내동댕이 치고, 빠르고 쉽게 전복을 성사시켜 줄 자신의 쥐약을 건넸으리라.

그러나 <기생충>이 부조리극임에도 현실에 밀착되어 ‘핍진성’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제약을 바탕으로 한다. 비옥한 땅 위를 별다른 걸림돌 없이 활개하는 리좀의 확장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치밀하게 계산된 은밀함으로 가장하지 않으면 작은 빈틈에 접근하기 조차 어렵고, 전복은 커녕 공존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봉준호는 이 현실을 기우네 가족과 대칭을 이루는 동익의 가족, 즉 거대한 ‘수목’의 배치로 그려낸다. 들뢰즈는 리좀의 반대 개념이자 뿌리, 가지, 잎이 철저히 나눠지고 확고한 위계적 질서를 가진 존재를 수목으로 규정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도 동익의 가족은 누구도 쉽게 오를 수 없는 견고한 사회의 위계 질서를 의미한다. <하녀>에서도 이 나무는 존재한다. <기생충>에서 ‘동익’의 가족처럼 <하녀>엔 이름마저 유사한 ‘동식’의 가족이 수목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동식네 가족은 갓 중산층에 올라선 아직은 작고 낮은 나무다. 이 나무는 많은 허점을 보인다. 동식은 하녀를 무시하면서도 육체적 관계에 매번 무너지고, 그의 아내 정심은 이 둘의 관계가 알려져 중산층의 지위를 잃을까 두려움에 떤다. 반면 <기생충>이 세운 나무, 동익의 가족은 그의 집안 곳곳에 쌓아올려진 계단만큼이나 드높게 서 있다. 보이지 않는 ‘선’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누구도 쉽게 오를 수 없는 견고한 상류층의 모습으로 말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기우네 가족 본연의 리좀적 위치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관객들이 처음 마주하는 광경은 ‘절반의 어둠’과 ‘절반의 빛’이다. 먼저 양말이 널려 있는 컴컴한 방과 작은 창문이 보인다. 창문을 통해선 빛이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빛과 함께 보이는 건 전봇대 옆 잔뜩 쌓인 쓰레기 봉투들이다. 영화는 그렇게 ‘반지하’란 지층에서 보게 되는 풍경을 비춘 후, 웅크린 채 휴대폰을 매만지고 있는 기우를 담는다. 카메라는 수직으로 곧장 떨어지는 ‘틸트 다운’ 기법으로 움직이며, 의도적으로 하강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오프닝 장면은 영화의 클로징에서도 반복되는데, 그 안엔 작은 차이들이 존재한다. 클로징에선 시간대를 낮에서 밤으로 바꿔 어둠을 더욱 강조한다. 방은 거의 암흑 상태이며, 창밖 전봇대 불빛만이 약하게 들어온다. 아름답게 눈이 내리고 있지만, 그 눈은 전봇대 옆 쓰레기 봉투 위에 쌓이고 있다. 클로징에서도 카메라는 창에서부터 편지를 읽고 있는 기우에게로 수직 하강하지만, 기우가 하고 있는 행위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오프닝에선 원래 접속하던 와이파이가 차단 당했어도, 새로 생긴 카페 와이파이에 접속하는 데 성공한다. 반면 클로징에선 모든 것이 차단된다. 꿈같은 상상을 하며 쓴 편지지만 결코 부칠 수 없다. 이 편지를 움켜쥐고 있는 기우는 확장이 차단되어 버린 리좀을 표상한다.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오면, 카메라가 기우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의 걸음이 닿는 곳에 여동생 기정, 아버지 기택, 어머니 충숙이 차례대로 나온다. 영화는 중반 변곡점에 이르기까지 이 가족을 ‘기택네 가족’이 아닌 ‘기우네 가족’으로 다룬다. 새로운 지층인 지상에 침투하는 첫 걸음을 떼는 것도 가장인 기택이 아닌 기우다. 물론 자력으로 온전히 이뤄내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런 연결은 애초에 불가능하기에, 지상에 우연히 공백이 생기고 그 공백에 닿도록 도와주는 매개자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하녀>에서 여공인 경희가 여공들을 도와 공장의 허드렛일을 하던 하녀의 일자리를 마련해 준 것처럼, <기생충>에선 친구라고 보기 힘들만큼 이질적인 층위에 속하는 민혁이 기우의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 민혁은 이 집에 일자리와 함께 ‘수석’을 갖고 오는데, 수석이 밀착되는 대상도 기택이 아닌 기우다. 수석을 맨 처음 만지는 사람은 분명 기택이다. 그런데 카메라는 갑자기 수석의 시점에서 로앵글로 기우를 비춘다. 마치 수석이 직접 기우를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홍수가 나 기우가 물에서 수석을 들어올릴 때도 부감숏으로 찍어 수석과 기우 사이에 신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반대로 이 역할들이 모두 기택에게 부여 됐다면 어땠을까. 영화는 처음부터 리좀 확장의 실패를 전면에 드러내게 될 것이다. 기택은 어두운 캐릭터는 아니며 철부지 아버지에 가깝다. 그러나 태생적 무능력과 체화된 좌절감을 안고 있다. 기택이 피자 박스조차 제대로 접지 못하는 모습과 충숙이 그를 대하는 태도에서 지나온 실패의 시간들을 추정할 수 있다. 기우도 실패의 이미지는 갖고 있다. 대학 입시에 반복해 떨어졌으며, 기정보다도 무능력해 보인다. 그러나 기택과 달리 ‘계획’의 힘을 믿고 있으며, 기택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등 좀더 능숙한 모습을 보인다. 봉준호는 반지하처럼 절반의 어둠과 절반의 빛을 갖고 있는 청년 기우를 통해 관객들이 ‘절반의 희망’을 품고 영화에 동승토록 한다.



리좀의 욕망은 수목의 불안을 타고 흐른다

새로운 지층에 닿은 리좀의 확장은 은밀하지만, 아니 ‘은밀하기에’ 순식간에 이뤄진다. 기우는 자신이 동익의 집에 입성한 순간부터 충숙을 데리고 들어오는 시점까지 빠른 템포로 연쇄적 확장을 이뤄낸다. <하녀>와 <기생충>에서 새로운 지층에 접근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하녀가 동식과 관계를 맺으며 침투하듯, 기우도 동익의 딸인 다혜를 사로잡으며 연결에 성공한다. 그런데 속도는 기우가 하녀보다 훨씬 앞선다. 하녀는 신분이 그대로 노출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이다. 동식이 치는 피아노조차 만질 수 없고, 동식의 자식들로부터도 무시 당한다. 목적이 ‘전복’이라는 것을 초반부터 드러내기 때문에 감정적인 장벽에도 반복해 부딪힌다. 반면 기우에겐 어떤 장벽도 없다. 다혜를 가르치는 두번째 씬에서 이미 두 사람은 입을 맞추고 있다. 하녀와 목적 자체도 다르다. 계단을 올라가고 또 올라가야 하는 거대한 수목같은 이 집에서 전복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기우의 목적은 처음엔 ‘기생’, 좀더 나아가선 ‘공존’에 맞춰져 있다.

이를 이끄는 것은 그가 자주 외치는 ‘기세’다. 그러나 이 매끄러운 단어에도 ‘은밀하다’처럼 모순이 숨어 있다. 기세의 절정이라 볼 수 있는 복숭아 시퀀스는 이 함정까지 잘 보여준다. 문광을 동익의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기우, 기정, 기택은 복숭아 하나를 이용해 빠르고도 정확한 합을 보여준다. 하나의 잘 짜여진 퍼포먼스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여기엔 인물들의 강박이 깔려 있다. 작은 기회라도 주어지면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겨야만 한다는 조바심이다. 이런 내적 불안은 긴 화면 비율과 함께 보다 정교하게 그려진다. <마더>에서 인물의 불안을 섬세하게 담아내기 위해 2.35:1 의 시네마스코프로 화면을 연출했듯, 봉준호는 <기생충>에서도 이 안에 가려진 리좀의 근원적 욕망과 불안을 동일한 비율로 담아낸다.

그 함정은 확장의 한계를 처음부터 품고 있는 질문, 하지만 영화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질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민혁이 돌아오면 어떻게 하지”라는 기본적이고 간단한 물음이다. 민혁은 자신의 자리인 다혜의 과외 선생님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교환학생으로 갔다가 돌아오면 다혜에게 마음을 고백할 것도 기우에게 밝혔다. 그런 민혁이 돌아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우가 다혜를 차지하고, 그의 가족이 위장취업한 것을 보고만 있을까. 그런데 기우네 가족은 민혁이 떠난 순간부터 이런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는다. 기우가 하는 질문은 오히려 이를 빗나간다. 기우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멈춰 서서 기정에게 묻는다. “민혁이는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기우는 민혁과 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기에 민혁이 돌아오는 상황을 생각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노상방뇨를 목격했을 때도 이전과 달리 민혁처럼 소리치고, 종종 그의 말투를 따라하지 않았던가. 은밀한 위장이 선사하는 환희는 이토록 강렬하다. 그리고 그 환희는 리좀적 행위의 추동력이 되는 동시에 행위의 불완전성을 내포한다.

이처럼 아슬아슬한 리좀의 불완전성에도 동익네 가족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도 결핍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녀>와 <기생충>은 각각 중산층, 상류층으로 다른 계급을 다루고 있지만 비슷한 설정으로 결핍과 불안을 기저에 깔아둔다. <하녀>에선 다리가 불편한 딸 애순, <기생충>에선 정신적 트라우마를 가진 아들 다송이다. 이 아이들을 둘러싼 결핍은 영화에서 반복돼 나타난다. 애순은 남동생 창순으로부터 자주 놀림을 받는다. 다혜는 기우에게 다송이 연기하는 것이라며 불만을 얘기한다. 어른인 부모들은 더 큰 불안을 안고 있다. <하녀>에선 동식이 애순에게 다람쥐를 선물하며 다리 운동을 강조하는 등 늘 그녀를 걱정한다. <기생충>에선 연교가 다송의 트라우마에 대해 많은 불안을 느낀다. 영화에서 연교가 하는 행위의 대부분은 다송과 연결되어 있다. 기정의 가장된 미술치료에 넘어가는 것도, 파국이 일어나는 파티 현장을 만든 것도 모두 다송 때문이다.

리좀의 욕망은 거대한 수목에서 가장 약한 빈틈인 연교를 통해 범람한다. 마치 개미 구멍에서 개미들이 줄지어 나오듯 쏟아진다. 이 공략이 주로 성사되는 지점은 동익의 집 정원을 지나 정문으로 내려오는 계단이다. 동익네 세계와 바깥 세계의 경계에 해당하며, 연교의 방어막이 제일 허술해지는 동시에 기우네 가족의 기세가 강해지는 교차점이다. 카메라는 동익의 집에선 계단을 통한 상승의 이미지를 대부분 담는다. 그러나 기우가 기정을, 기정이 기택을 소개하는 씬에선 연교와 함께 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찍는다. 수목의 위압감에서 살짝 벗어나 리좀이 침투할 여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후 리좀의 욕망은 점차 뒤틀리기 시작한다. 은밀함을 내세워 새로운 지층에 비교적 쉽게 침투했지만, 이를 뛰어넘어 보다 영역을 넓히려 한다. 하지만 확장을 하려면 민혁처럼 누군가의 공백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민혁의 공백은 행운처럼 찾아온, 위로부터의 자발적인 양보였다. 그렇게 생긴 기우의 일자리, 기우가 만든 기정의 일자리는 작위적이긴 해도 타인의 희생 위에 생겨나진 않았다. 그러나 일그러진 욕망이 고개를 들추면서 확장 방식은 완전히 달라진다. 윤 기사, 문광의 인위적 제거로 기택과 충숙의 자리가 각각 만들어진다. 영화는 기우네 가족이 승전보를 울리듯 자신들만의 파티를 하기 전까진 이들의 존재를 굳이 복기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 전에 강렬한 이미지 하나를 남긴다. 문광을 쫓아내기 위해 기택이 붉은 소스를 휴지에 뿌려 만든 가짜 피다. 이 피는 기존 리좀의 완전 제거를 암시하는 듯한 ‘가짜 ’ 메타포이자, 곧 드넓은 지상에 흩뿌려질 ‘진짜 ’ 피바람의 전주곡이다.



묵시적 데드라인과 함께 찾아온 짝패

봉준호의 영화에서 변곡점은 ‘묵시적 데드라인’과 함께 형성된다. <설국열차>에선 터널 시퀀스에서 변곡점이 만들어진다. 묵시적 데드라인은 기차가 터널을 다 통과하는 시점이다. 그러나 이 시점이 도래할 것은 분명하지만, 언제 올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이를 활용해 힘의 우위를 바꿔놓는다. 기차가 터널을 지나면서 꼬리 칸 사람들은 어둠으로 인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린다. 자신들은 적을 잘 보지 못한 채 싸워야 하지만 상대는 적외선 카메라로 무장하며 무기를 휘두르기 때문이다. 터널의 시간이 다 흐르고 나면 과연 몇명이 남아있을까. 묵시적 데드라인은 이런 질문을 던지며 긴장감 넘치는 스펙타클을 만들어낸다. <플란다스의 개>에선 이웃 개들을 유기해오던 윤주가 아내의 개를 잃어버리면서 묵시적 데드라인이 형성된다. 아내가 개를 사고 남은 퇴직금을 자신이 교수가 되는 데 쓸 비자금으로 주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교수가 되지 못한 분풀이로 개를 유기하던 사람이 개를 찾는 시점이 되어서야 교수가 될 수 있다는 설정은 봉준호이기에 만들어낼 수 있는 통쾌한 변곡점이다.

<기생충>에선 동익네 가족이 다송의 생일을 맞아 하룻밤 캠핑을 가는 것으로 데드라인이 정해진다. 이 공백을 틈타 기우네 가족은 동익네 집에서 자신들만의 파티를 즐긴다. 이때 두 가지 상충되는 요소가 함께 섞여 묵시적 데드라인이 형성된다. ‘하룻밤 캠핑’과 ‘비’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기우네 파티가 머지않아 끝나게 될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그런데 봉준호는 이 긴장감을 역이용해 데드라인을 두번 연달아 바꿔놓는다. 처음엔 예상대로 초인종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런데 첫번째 데드라인을 실행하는 주체가 예상과 다르다. 비에 잔뜩 젖은 문광이 나타난다. 문광의 등장으로 ‘지하’라는 새로운 지층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때 영화에서 가장 큰 충격이 주어진다. 이후 울려퍼진 전화 벨 소리와 태연하게 짜파구리를 찾는 연교의 목소리는 관객들의 예상보다 늦게 도착한, 그래서 더 상황을 스펙타클하게 만드는 두번째 데드라인이다.

영화는 묵시적 데드라인과 함께 리좀의 ‘짝패’를 등장시킨다. 르네 지라르는 상대의 욕망을 자극하고 경쟁하면서도, 서로 모방하여 닮아가는 존재를 ‘짝패’라 이른다. <하녀>에선 리좀의 짝패를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상이한 지층의 존재로 설정한다. 하녀의 짝패는 동식을 탐내는 여공 경희가 아닌, 중산층에 속하는 정심이다. 하녀는 정심이 아이들과 친정으로 간 틈을 타 동식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임신이라는 결과를 통해 이 집안과 연결고리를 만든다. 하지만 이 고리는 곧 끊어지게 되는데 하녀는 또 동식의 아들 창순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든다.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행위가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정심 때문이다. 정심은 하녀가 아들을 죽였지만, 동식과 하녀의 관계가 탄로 나 동식이 일자리를 잃을까봐 죽음을 은폐한다. 어렵게 올라선 중산층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정심의 의지는 하녀가 가진 전복의 욕망과 닮았다.

<기생충>은 제목이 ‘데칼코마니’가 될 뻔 했을만큼 봉준호는 짝패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킨다. 표면적으로는 기우네 가족의 짝패는 동익네 가족으로 설정돼 있다. 이들이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지상에서 하는 일도 동익의 가정을 모방하는 것이다. 기택과 충숙은 넓은 소파에서 함께 잠을 자고, 기우는 햇빛을 받으며 책을 본다. 기정은 변기 물이 역류하는 본인의 집으로 향하기 전, 이곳 욕조에 몸을 담그고 여유를 만끽한다. 그러나 동익네 가족은 기우네 가족의 짝패가 아니다. 거대한 수목을 모방하는 일은 아주 잠깐의 백일몽에 불과하다.

진정한 짝패는 지하에서 나타난다. 현실에서처럼 영화에서도 지상-반지하의 간격은 아주 크지만, 반지하-지하의 간격은 크지 않다. 반지하에서 지하로 가는 것은 한번의 실수, 한순간의 미끄러짐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지라르가 짝패의 등장 원인을 ‘차이의 소멸’이라 보았듯, <기생충>에서도 짝패는 극도로 좁혀진 간격 사이로 나온다. 묵시적 데드라인을 바꾸며 등장한 문광, 그리고 항상 동익네 집 지하에 있었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존재 근세다. 이들의 욕망이 닮은 것은 문광과 근세가 지상으로 오랜만에 올라와 과거를 회상하며 나누는 대화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기우네 가족이 동익네 가족이 자리를 비었을 때 햇빛을 쬐고 여유를 즐겼듯, 이들이 지상으로 올라와서 했던 행위도 똑같다. 지상이란 상이한 지층의 존재들이 누리는 것을 동일하게 누리고 싶은, 전복은 아니지만 공존하려는 욕망이다. 그 욕망을 뒤따라 가던 기우네 가족은 결국 짝패인 문광과 근세의 운명과 닮아간다. 집 주인이 남궁현자 선생에서 동익네 가족으로 바뀌어도 문광과 근세가 늘 이곳에서 기생하고 있었듯, 기택 역시 같은 공간에 머물며 또 다른 가족에게 기생하게 된다.

그런데 기우네 가족에 동일시 되어 공범자 입장에 서 있던 관객들은 짝패의 등장과 이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양가적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에서 이 작업은 문광이 초인종을 누르기 전부터 이뤄진다. 기택이 술을 마시다 자신으로 인해 해고된 윤 기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는 서서히 변한다. 리좀의 확장에 취해 있던 관객들은 이로 인해 이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퇴장해야 했던 윤 기사와 문광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이후 문광이 충숙에게 협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할 때도 의구심을 갖게 된다. ‘왜 이들은 공조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다. 이는 짝패가 ‘차이의 소멸’로 성립되기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는 것은 언제든 서로가 서로를 대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즉, 경쟁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공조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짝패 간엔 서로의 약점을 잡고 잡히는 비극이 발생한다. 봉준호의 디테일은 이토록 처연한 현실까지 영화 안으로 끌어오며 완성된다.

 

파국의 모노리스, 그리고 그 이후

변곡점 이후 ‘기우네 가족’은 ‘기택네 가족’으로 전환된다. 정확히 말하면 본래 속성으로 돌아온다. 테이블 아래 숨어 동익과 연교의 대화를 듣게 되며 기우네 가족은 자신들이 기택네 가족일 수 밖에 없음을 인지한다. 동익은 기택의 ‘냄새’를 지적하며 적나라한 비하 발언을 내뱉는다. 동익이 언급하는 냄새는 곧 리좀이 본디 자리하고 있던 공간이 어딘지를 명확히 드러내는 태생적 한계를 의미한다. 처음 냄새를 지적한 것은 동익이 아니라 다송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직감적으로 느낀 지층간의 분할선보다, 성인인 동익이 잔인하게 그어낸 분할선에 기택은 더 큰 모멸감을 느낀다. 카메라는 기택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클로즈업하며, 이 가족이 가졌던 절반의 희망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담아낸다.

이로써 영화는 동익-기택-근세라는 가장으로 대표되는 가정, 그 가정이 속한 계층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리좀의 확장을 줄곧 따라가다가. 리좀의 출발점으로 회귀하여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애초에 동익과 기택의 첫 만남도 그 한계를 암시한다. 이들 사이엔 유리 칸막이가 배치되는데, <기생충>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가시적 분할선이다. 동익을 처음 찾아간 기택은 사무실 유리 칸막이 너머 동익에게 인사를 꾸벅 한다. 그러나 만남은 곧장 성사되지 않고, 기택은 밖에 앉아 일방적으로 기다린다. 카메라는 그런 기택의 모습을 사무실 안 동익의 시점에서 비추며 그가 유리 칸막이 밖에 있는 존재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테이블 아래서 빠져 나온 기택네 가족이 집으로 가는 길은 보이지는 않지만 유리 칸막이 보다 더 높은 칸막이를 드러낸다. 수많은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야 도달하는 집은 그들이 얼마나 동익네 가족과 먼 곳에 살고 있는지 보여준다. 결코 맞닿을 일이 없었고, 맞닿을 수도 없었던 지층에 있었던 사람들. 그렇게 이들이 온몸으로 비를 맞아가며 도착한 반지하 집은 전부 잠겨 버렸다. 기택네 가족의 전부인 이 집은 결국 같은 시간 밖에서 잠을 자고 있던 다송의 텐트만도 못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찾아온 리좀의 파국. 이 파국은 ‘모노리스’로부터 시작된다. 봉준호는 동익네 집 1층에서 지하실로 통하는 어두컴컴한 직사각형의 공간을 가리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노리스 같지 않냐”고 비유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왔던 모노리스는 검고 커다란 비석으로, 유인원의 급속한 진화를 촉발하는 추동적 존재로 그려진다.

봉준호는 반대로 모노리스를 모든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소실점으로 설정한다. 모노리스를 둘러싸고 세 지층에서 범람한 욕망이 한순간에 응집하더니, 이내 폭발적인 위력을 뿜어낸다. 먼저 흘러넘친 것은 리좀의 단절을 두려워한 기우의 욕망이다. 새로운 지층에서의 공존을 꿈꿨던 기우는 수석을 들고 나타나 지하로 향한다. 상류층과의 공존을 방해할 근세를 처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계획’적인 접근은 계획에 없던 결과를 낳는다. 기우와 수석은 고립된 채 미쳐가고 있던 근세의 파괴적 욕망을 이끌어내고 지상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기우와 근세의 욕망이 부딪히기 전, 연교의 욕망이 은근슬쩍 개입한다. 기우가 수석을 들고 모노리스를 통과하기에 앞서 기정과 충숙은 근세와의 대화를 시도해 보려 한다. 그런데 자신들의 기쁨을 위해 이벤트에 동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연교에 의해 차단된다. 연교가 기정을 막아 서지 않았다면, 이들은 어쩌면 공조를 논의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택네 가족을 동원해 파티를 꾸미던 상류층의 욕망이 이 마지막 가능성을 다 없애버리고야 만다.

기택의 ‘레밍’과 같은 돌발 행동은 파국의 정점을 찍는다. 벼랑 끝에서 한 마리가 뛰어내리면 줄지어 뛰어내리는 들쥐 레밍처럼 기택은 근세의 칼부림에 기이한 형태로 동조한다. 기택이 그 순간 분노해야 할 대상은 기정을 찌른 근세다. 그런데 근세의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는 동익을 향해 기택의 분노는 폭발하고 만다. 아래 지층에서 부단히 꿈꿔왔던 확장, 그 의미를 비웃고 한계를 각인시키는 상위 지층의 오만함에 리좀의 근원적 울분이 솟구쳐 오른 것이다.

파국 이후 봉준호는 희망을 말하며 희망을 차단한다. 영화 안에선 기우가 돈을 많이 벌어 그 집을 사겠다는 ‘계획’을 담은 편지를 읽고 있다. 다시 새로운 지층에 닿아 기택을 구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다. 그러나 영화 밖을 살고 있는 관객들은 이를 보는 순간 희망을 빼앗긴다. ‘기우는 절대 그 집을 살 수 없다’는 결론에 약간의 의심의 여지도 없이 곧장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봉준호가 지금 이 순간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다시 발칙한 상상으로 돌아가, 기우가 하녀에게 건넸을 답변에서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은밀한 너에겐 자유가 없다”는 하녀의 지적에 기우는 이렇게 답하리라. “은밀한 나조차 연결될 수 없다.” 기우는 끝까지 희망을 품은 것으로 그려졌지만, 영화가 끝난 후 머지않아 깨닫고 하녀에게 한탄했을 것이다. <하녀>에서 하녀는 죽었음에도 살아있었다. 이 영화는 액자식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이야기 속 하녀는 거꾸로 드러누운 채 계단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야기 밖 하녀는 동식을 또렷이 바라보며 또 다시 전복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60여년이 지난 기우의 세상에서는 그럴 수 없다. 인간의 리좀적 본성은 거대한 수목에 교묘하게 짓눌리고 있다. 은밀함을 내세워 새로운 지층에 연결되는 일조차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봉준호는 이런 미묘한 변화를 끈질기게 응시하며 체화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국 영화의 시간, 영화 밖 시간의 흐름을 함께 타고 다니며 말이다. 그리하여 봉준호의 영화는, <기생충>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글: 김희경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영상정책 및 기획 전공 박사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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