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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체제가 낳은 기형의 인간애 - 장 이모우 감독 <5일의 마중>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체제가 낳은 기형의 인간애 - 장 이모우 감독 <5일의 마중>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0.01.2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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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부부로 남기 위한 연습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이러니한 느낌을 준다. 이 둘은 부부지만 또한 부부가 아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후 수년간을 계속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와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남편.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피켓까지 들고 있다. 영원히 오지 않을 남편을 기다리는 이 둘은 죽을 때까지 계속 이렇게 존재하다 사라질 것이다. 그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실제 남편은 내키지 않지만 이제 어쩔수 없이 자신을 인식시키는 것은 포기하고 그저 그녀와 함께 있기로 한다. 그녀의 잘못된 기억을 인정하기로 스스로 결심한다. 이 둘은 현실적으로 남이나 마찬가지지만 동시에 부부나 다름 없다. 항상 같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속을 알 수 가 없고, 아내도 남편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 모습은 어쩌면 현대 부부의 초상 같기도 하다. 수 십년을 같이 살지만 서로가 다른 세계에 머물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부부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결혼을 통해 완벽한 소통을 이루는 부부는 많지 않다. 정말 떨어지기 싫어 같은 날 같은 시에 동반자살한 부부도 있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서로가 이해하기 위해 노력은 한다. 진정 소통을 이루기 위해선 자기를 완전히 버려야만 할 것이다.

이 장면은 서로의 입장에서 자신을 버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아내는 매월 5일이면 무조건 역에 나간다. 한 번도 빠짐 없이 나가는 그녀의 행동은 자기를 버리는 희생의 모습이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에게 자기를 인식시키기 위해 항상 궁리하고 옆에 서 있는 남편 역시 자신의 모든 걸 아내에게만 맞춰서 살고 있다.

 

불굴의 여인

마지막 장면은 부부가 마지막 까지 기다렸을 때 역문이 닫히는 장면이다. 일상적인 장면이지만 카메라는 역에서 바라본 부부의 모습이다. 역에서 바라봤을 때의 시각은 사뭇 다르다. 철창이 그들의 앞을 가로 막는 것으로 재현된다. 이것이 바로 재현예술의 방식이다. 재현예술은 일상을 단지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장면은 ‘역문이 닫혔다’가 아니라, ‘부부는 감옥에 갇혔다’로 읽어야 한다.

여기서 역문은 단지 역문이 아니다. 그건 감옥창살을 비유한 것으로 읽힌다. 감독이 의도했던 아니던 그렇게 해석하겠다면 그렇게 의미가 규정된다. 그렇게 해석될 근거는 무엇일까. 그들은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지만 감옥에 갇힌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아내 펑이 여전히 남편 류의 석방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의학적으로 제 정신이 아니지만 그녀 주관에 의하면 남편은 여전히 석방되지 않은 것이다. 그녀 주관에 의하면 영화는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객관적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순정과 열정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영화적 트릭일 뿐이다. 역사적 사실에선 류가 돌아왔다. 하지만 영화에서 역사를 비틀은 것은 그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루(진도명)를 가둔 것도 체제고 루를 석방한 것도 체제다. 루가 범죄자가 되어 갇혔을 때 가슴 아픈 것은 펑(공리)이었다. 체제가 자신 실수를 인정하고 류를 석방했다. 하지만 체제 실수에 의해 이미 가슴에 상처를 입은 펑이 그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물론 심리적으로, 주관적으로, 영화적 트릭으로) 어떻게 될까? 우리가 보는 스토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녀는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한 영원히 루를 가슴속에 수인(囚人)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5일이면 항상 루를 마중하러 역에 나갈 것이다. 그것이 남아있는 자신이 루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더 이상 실수 하지 않고 그의 아픔을 위로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펑에 있어서 현실은 감옥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래서 역문은 마치 그녀가 갇힌 상황에 비유될 수 있다. 또한 그녀 곁에서 같이 늙어가는 남편 루에 있어서 창살이 감옥에 비유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는 바로 그 불굴의 여인에 관한 것을 말하고자 한다.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영화는 아니지만 여인의 마음과 행동속에 더 이상 믿을 만한 체제는 없다. 과거 중국 체제는 국민의 피눈물을 나게 하고 나중엔 미안하단 말 한 마디로 모든 과거를 묻어버리라고 말하는 무책임한 존재니까.

더 나아가 체제는 그를 따르고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배신해야만 자기가 살수 있다는 혼돈스런 실수를 자행하게 하니까. 그래서 평생 그 사람에 대해 씻을 수 없는 후회와 절망감으로 고통스럽게 살게 하니까. 루를 집에 들이지 않았던 펑의 과거 행동과 아버지를 고발하고 배역을 따내고자 했던 한 때 철 없던 딸 단단처럼. 이 영화는 중국이 한때 공산주의적 인간을 찬양한 나머지 ‘인간’을 버렸던 쓰라린 역사적 상처를 은근히 바탕에 깔고 있다.

훌륭한 영화의 기준은 우리 현대인이 잃어버린 어떤 소중한 가치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라고 본다. <5일의 마중>에 나오는 부부 펑과 루는 요즘 사회에서 보기 힘든 인물들이다. 체제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믿음으로 남편을 기다리는 순정의 여인 펑과 그 열정을 알고 그녀 세계로 기꺼이 뛰어들어 평생을 그녀 곁에서 보내고자 다짐하고 행동하는 남편 루. 이 두 인물이 보여주는 부부란 무엇인가. 일심동체라는 말이 어울린다. 둘은 남이 아니라 한 몸인 것이다. 흔히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남녀평등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남의 몸을 내 몸인 것처럼 사랑하는 마음. 모든 성현들이 이미 한 말이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이 말 보다 더 적합한 말이 없어 자꾸 되뇌이게 된다.

 

 

글: 정재형

동국대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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