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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의 문화톡톡] 누구를 위한 미래인가
[이은지의 문화톡톡] 누구를 위한 미래인가
  • 이은지(문화평론가)
  • 승인 2020.02.03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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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미래’가 보여준 기술 진보의 민낯

음식 배달 앱 <배달의민족> 운영사가 독일계 기업에 매각되면서 회자된 것은 ‘배달의 민족이 게르만족이 되었다’는 재치 있는 조롱만은 아니었다. 식당에 전화를 걸어 주소지와 메뉴를 일일이 말하는 수고를 덜어주고, 위치 기반으로 더 많은 배달 식당의 네트워크를 제공하며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했던 배달 앱이 실상은 어떤 존재였으며, 그 존재의 바탕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었는가를 반추하는 자성의 움직임 또한 뒤따라 일어났다.

이러한 성찰 덕에 발견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배달 앱이 실현한 배달의 ‘미래’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동안 배달 수수료는 소비자와 자영업자 모두에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 음식을 배달하는 전국의 거의 모든 식당들은 배달 앱이 중개자로 군림하는 ‘배달 음식 시장’에 속수무책으로 편입되었다는 것, 요식업 종사자는 비록 영세할지언정 하나의 사업체를 독자적으로 꾸리던 ‘사장’에서 배달 앱을 비롯한 배달 대행서비스의 ‘사용자’로 전락했다는 것, 그리하여 이제는 배달 앱을 통하지 않고 식당에 직접 주문을 하더라도 배달 수수료라는 함정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배달의 민족이 게르만족으로 탈바꿈한 사태에 사람들이 헛웃음을 지은 것은 단순히 해당 앱이 마케팅을 통해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라며 민족성에 호소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상업적 호소는 초단기 근대화로 난개발된 한국사회의 골목골목을 차지한 두 부류, 즉 속수무책으로 자영업 시장으로 내몰린 사장님들과, 수도권-아파트 공화국에서 간신히 생존중인 1인가구를 연결해줌으로써 한국사회의 특수성과 긴밀히 연동되었다. 이처럼 실로 국지적인 ‘살림’에서 출발한 배달 앱도 이윤을 남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외국계를 비롯한 다국적 자본에 넘겨질 수 있게 된 것은, 국경을 초월하여 통용되는 자본의 룰이 지역 기반 경제보다 한참 상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게 해주었다.

제아무리 세련됨과 편리함으로 무장한 기술 및 서비스라도 결국은 일상의 영역을 시장의 영역으로 개간하여 거대 자본에 상품으로 팔아넘기는 진부한 결과로 귀결되었을 뿐이다. 이는 비단 배달 ‘시장’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전세계에 보급된 스마트폰을 밑천 삼아 생활의 보다 미시적인 영역들까지도 촘촘하고게 초국적으로 시장화되는 현상은 현대판 인클로저 운동을 방불케 한다. 각종 편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막강한 플랫폼을 소유한 절대 소수의 온라인 공간 지주에 대해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플랫폼의 소비자이거나 노동자로 전락하는 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어가고 있다.

 

미래를 독과점하는 과학 기술

특정한 기술의 진보가 가져다준 (것처럼 보이는) 미래가 실상은 현실의 모순된 질곡을 넘어서기는커녕 되레 그것의 고착을 가속화하기만 했을 뿐이라면, 우리는 정녕 이것을 ‘미래’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현재의 모순에 교묘하게 편승하는 한편 이러한 사실을 편리함이라는 가면 뒤로 감쪽같이 숨겨버림으로써 달성된 미래는 차라리 연장된 현재, 또는 현재의 강요된 지속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오늘날 선전되는 대부분의 미래는 ‘더 나은 현재’를 가장하여 현재를 끝없이 유예시키기만 한다. 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편의적인 기술은 겉보기에 뭔가 새로운 것을 제공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라는 오래된 특정 신앙념의 지배를 공고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과학도인 전치형, 홍성욱이 공동으로 집필한 『미래는 오지 않는다』(문학과지성사 2019)에서 저자들은 오늘날의 미래담론을 과학기술이 사실상 독점한 결과 과학기술에 대한 예측이 미래에 대한 예측과 동일시되는 현상을 문제 삼는다. 기술진보 결정론에 편향된 미래담론이 문제적인 까닭은, 기술의 전문성 및 접근성을 독점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기술진보를 통해 누리게 될 편익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미래의 방향 또한 결정되기 쉬운 탓이다.

 

저자들이 소개하고 있는, 『특이점이 온다』로 유명하기도 한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의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2045년이면 인간의 육체가 기계로 완전히 대체되어 ‘비생물학적 존재’로 거듭나는 ‘특이점’이 오리라고 예언한 바 있다. 이 특이점이 도래할 때까지 살아 있기 위해 그는 매일 100알에 가까운 영양제를 챙겨 먹는다. 이는 하루에 수천 달러, 1년이면 약 11억 원이 드는 일이다. 심지어 그의 가족들도 동일한 영양제를 처방받고 있으며, 영양제 복용을 챙겨주는 비서까지 따로 두고 있다. 이 기상천외한 사례를 통해 우리는 특이점이라는 미래가 도래한들 천문학적인 비용을 영양제 따위에 쏟아 부을 수 있는 사람들의 집 앞에나 깍듯이 대령하리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고액의 명세서를 은색 쟁반 위에 고상하게 올려놓은 채로 말이다.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부의 극단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는 한 그러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전치형, 홍성욱은 기술적 유토피아 내러티브가 한 개인이 하루 동안 멋지고 편한 일상을 누리는 것을 보여주는 데 치중하는 점에도 주목한다. 사물인터넷을 기반으로 거울이나 유리창에 온갖 정보가 팝업되고 자율주행 자동차가 일정에 맞춰 목적지까지 모셔다주는 식의 편리한 미래상은 모두에게 익숙한 클리셰다. 이렇듯 상품의 형식으로 개인의 사적 영역에서 소비되는 이미지는 첨단기술의 대주주들이 현실화되기만을 꿈꾸는 미래일 것이다. 그들이 꿈꾸는 미래에는 공적인 영역으로서의 사회는 철저히 소거되어 있다.

 

약속되지 않은 미래가 쓰나미처럼 밀려올 때

소설가 정소현의 단편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품위 있는 삶』, 창비 2019)은 개인의 일상에 한정하여 제공되는 미래의 파국적인 단면을 그리고 있다. 때는 레이 커즈와일이 예언한 특이점이 한참 지난 2054년, 전문의로 평생 일했지만 남편도 아들도 곁을 떠나고 혼자인 주인공은 만 70세부터 보장되는 110세 보험의 혜택을 누리는 80대 노인이다. 국가 정책보다 화려한 서비스로 무장한 보험에 따라 매일 셰프가 식사를 준비해주고, 하우스헬퍼가 집안을 깔끔히 청소해주며, 목욕관리사가 저녁마다 방문한다.

알츠하이머 증상이 발현한 주인공은 치매 진단이 내려질 경우 안락사를 실시한다는 ‘품위 있는 삶’ 특약에 보험 가입 당시 동의했던 사실을 잊는다. 자녀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을 배정해주는 자녀 특약이 있었던 사실을 잊고 보험사 직원들을 아들과 손자로 착각한다. 자신의 이름까지 기억 못할 정도로 치매 증상이 심각해진 주인공은 치매가 오지 않은 과거의 자신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꼼짝없이 안락사를 당할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치매라는 요소와 무관하게 주인공의 삶은 보험 서비스와 일상이 완전히 뒤섞여 구분되지 않는 수준으로 제시되고 있다. 소설은 보다 나은 서비스로 촘촘하게 설계된 노년의 삶에 치매라는 생물학적-예외적 요인이 끼어들었을 때 기술 유토피아의 윤택함이 무위에 가깝게 되는 지점에 주목한다.

 

이처럼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상이 탈정치화된 개인적 유토피아에 그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결국 그러한 상상력이 근거하는 현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칼 폴라니는 경제가 사회적 활동의 부산물 중 하나였던 과거와 달리,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는 경제가 독자적 존재로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대체하기에 이르렀음을 지적한다. 인간과 사회의 모든 영역이 생산과 소비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시장화’하는 흐름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에도 마수를 뻗치고 있다.

이는 인간을 속박하는 질서에 장악된 현재의 더 나은 판본만을 약속할 뿐인 미래에 우리가 습격당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점은 현재의 기득권이 결코 약속하지 않는 미래가 불시에 닥쳤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최근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발원하여 전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국으로부터 거액의 투자금을 약속 받은 WHO가 신속한 대응을 주저하는 동안 상황은 보다 악화되었다. 환금성 높은 기술에 자본이 투자되고 그 하수인들이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느라 애써 외면해온 미래의 한 판본이라고 할 수 있는 판데믹(pandemic)은 더 이상 영화에나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지구적 전염병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촉진하는 세계화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현재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바라지 않는 암울한 미래를 현실로 만드는 데도 혁혁하게 일조하고 있다.

관련하여 가장 경악스러운 사례는 우한 폐렴의 창궐에 맞춰 스트리밍된 넷플릭스의 다큐 시리즈 <판데믹>이다. 이 다큐는 판데믹이 창궐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가정 하에 사전 제작되어 주목을 끌기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즉 판데믹이 발생한 시점에 맞춰 제공되었다고 풍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윤 추구만을 작동 논리로 삼는 자본에 종속된 현재가 결코 기대하지 않은 미래가 들이닥쳤을 때마저도 시장-사회는 이를 수익 창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실로 끔찍하지 않은가?

 

사진출처 : 네이버

 

글: 이은지

문학평론가. 2014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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