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호 구매하기
[이병국의 문화톡톡] 방에 관한 단상
[이병국의 문화톡톡] 방에 관한 단상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0.05.18 1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초의 방(집이 아니라 방)은 고등학생 때 대문 옆의 광을 리모델링한 곳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주하게 되는 나의 방. 그 방은,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장소였다.(그럼에도 그 방은 집의 구성요소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이후의 방과는 명백한 차이를 지닌다.) 난방이 되지 않아서 겨울에는 스노우볼이 얼어 터질 정도였지만 나는 그 방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다 대학에 합격하여 그곳을 떠났다.

두 번째 방은 대학 2학년 때, 밀레니엄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구한 자취방이었는데, 문간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유화장실(그것도 재래식)에 가려면 밖으로 나가 앞마당 한쪽에 있는 곳으로 가야 했던, 나름 별채인 곳이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부엌이었고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주인집 할머니는 간혹 반찬들을 챙겨주셨지만 보관할 냉장고도 없던 부엌은 욕실을 겸했고 바퀴벌레 퇴치제와 쥐잡이용 끈끈이가 늘 바닥에 놓여 있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1년 반을 머물렀고 제대 후 찾아갔을 때는 원룸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원룸을 전전하다 잠깐 반지하 빌라 전세를 얻어 살았지만 경매에 넘어가 법원에서 절반의 보증금만을 받고 현재의 원룸에 이르렀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참 이어지다 겨우 생활방역으로 전환되었지만 그러한 조처가 허망한 것이라는 듯이 이태원의 클럽을 중심으로 확진자가 발생하였다. 그들에 대한 이러저러한 말들이 많지만 중요한 것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로 바이러스가 퍼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비난 때문에, 자신의 생계를 걱정하는 이기심 때문에 혹은 알 수 없는 또 다른 이유 때문에 그들이 감염 사실을 은폐하고 동선을 왜곡하여 전달함으로써 2차, 3차의 감염에 이르게 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에 대한 비판의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시금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자가 격리의 공간으로 방을 떠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생활을 재건하기 위해 외부로 나가려는 찰나에 다시 방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타인과 나의 접촉을 차단하여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사적 공간이자, 위안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분리된 존재로 고립과 소외를 경험하게도 하는 장소가 방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료출처 : MBC홈페이지
자료출처 : MBC홈페이지

나는 최근 방을, 아니 집을 구해주는 프로그램을 애청하고 있다. 2019년 3월부터 현재까지 MBC에서는 의뢰인의 요구를 반영한 맞춤집을 찾아주는 <구해줘! 홈즈>라는 프로그램이다. 매주 일요일 저녁 10시 40분에 전파를 타는 이 프로그램은 “바쁜 현대인들의 집 찾기를 위해 스타들이 직접 나서서 발품을 파는 리얼 발품중개배틀 프로그램”을 기치로 내걸고 1인 가구부터 신혼부부, 대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태의 의뢰인들의 요구를 ‘중개’한다.

프로그램이 중개하는 집들을 보면, 집이란 재산 증식의 차원으로 존재하는 부동산이 아니었음을, 다양한 요구와 기호와 취향을 지닌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공간임을 인지하게 한다. 물론 집값, 그 집을 소유, 임대하기 위한 비용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의뢰인은 비용의 상한선을 제시하고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그 범위 안에서 최대한 절약하여 집을 구한다. 합리적인 시세일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보이는 집들은 그만한 값어치를 충분히 하고도 남아 보였다.

그러니 이 글의 서두에 내가 쓴 방의 기억은 ‘홈’은커녕 ‘룸’에 머무르고 있는 자가 스스로를 다독이고자 하는 제스처일 수도 있겠다. 룸이 아닌 홈을 갖기는 요원해 보이는 이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을 테고. 지난달에 방영한 1인 가구를 위한 ‘홈즈’ 중 눈에 들었던 곳은 ‘서래마을 봉쥬르 하우스’였다. 서래마을이라는 지리적 환경과 넉넉한 생활공간은 최근 늘어나고 있는 1인 가구의 로망처럼 보였다. (자가 격리를 하게 되더라도 이런 곳에서 하면 잘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는 건 비밀 아닌 비밀이다.) 전세가는 5억 원. 로망을 실현하기 위한 대출과 이자를 충분히 감내할 수 있거나 빠듯하게 감당할 수 있는(이라고 말해도 나에게는 언감생심)곳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 인구주택총조사 홈페이지
사진출처 : 인구주택총조사 홈페이지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전체 가구에서 1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29.3%(584만 8549가구)로 전체 가구 유형 중 1위로 나타났다. 2000년의 15%에서 두 배 늘어난 수치인 셈이다. 정부는 지난 3월 ‘주거복지로드맵 2.0’을 발표하며 현재 청년 1인 가구 25만 가구에 지원하던 제도를 2015년까지 100만 가구로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이중 주택 공급은 35만 가구이며 노후 고시원, 숙박업소 등을 매입해 리모델링하여 임대주택으로 공급할 계획도 제시했다. 물론 중장년 1인 가구 등을 위한 제도도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1인 가구가 방에서 집으로 삶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방이라는 장소는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사회적 인식 범주와는 다른 맥락을 지닌다. 사회 구조가 요구하는 상호작용 질서 속에서 일정한 지위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일시적으로 머물다 가는 과정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아무리 사회를 구성하는 비중이 1인 가구가 높다 해도 불평등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신분의 격차가 발생한다. 집이 아닌 방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사회의 가장자리에, 그 바깥에 머무르는 존재로 여겨질 위험이 다분하다.

 

피라칸타 눈꽃 만개한

창 앞에 선다

 

그러니까

원룸 담벼락이 나의 일이라서

 

망설이고 있는 거다

 

모내기를 마친 논과

몇 해 전 불에 탄 민둥산은

없어진 지 오래고

마루를 잊은 지 오래고

 

스마트폰 창을 만지작대는

손이 자꾸만 말린다

 

눈동자는

열 뼘쯤 떨어진

소실점이라서

 

트로이의 목마에서 내린 돈키호테와 런던아이를 맴돌던 앨리스가 히베이라 광장 벤치에 앉아 구절폭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톤레삽 호수가 소금사막에 번진다 사란스크 구장의 잔디를 밟으며 도톤보리는 도통 알 수 없는 간판으로 휘황찬란하다고 생각한다 부석사 기둥에 기대서서 저녁놀을 보며

 

창을 넘기는 손이 분주해도

 

나는 남이고

피라칸타의 눈꽃이고

옆 건물의 옆 건물이다

- 졸시, 「차경(借景)」(『미네르바』, 2018년 가을호)

 

‘차경’은 풍경을 빌리다는 뜻인데, 창을 내고 문을 내서 풍경을 들인다는 의미로 전통적 가옥의 건축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연을 감각하는 선인들의 격조 높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자연친화적이면서 상당히 실용적인 공간 활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노래한 시도 많지만 굳이 졸시를 인용한 이유는 내가 살아가는, 또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차경’은 옆 건물의 다른 창일 수 있다는 부정적 인식 때문이다.

 

정여창 고택 사랑채 대청_ 사진출처 : 다음카페 산중명월
정여창 고택 사랑채 대청_ 사진출처 : 다음카페 산중명월

시를 잠깐 보면, 화자는 원룸의 창 앞에서 선다. 마주 보이는 것은 옆 건물의 또 다른 원룸 창이다. 직접적인 대면을 피하기 위해 꽃나무(피라칸타)를 심어 놓아도 “눈꽃”은 곧 지고 만다. 스마트폰의 창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어도 그래봐야 내 손바닥 안에 머물 듯 바깥으로 나 있는 원룸의 창도 “옆 건물의 옆 건물”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정한 ‘자기만의 방’은 절대적인 공간일 수도 있다. 여러 문학 작품을 통해 재현된 것처럼 고시원의 한 자리조차 차지하지 못한 존재들의 불안과는 달리 최소한의 안정망을 확보한 듯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은연중에 드러나는 사회적 계층의 차별적 시선이 엿보이는 말이지만 그 불편부당을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다. 사회적 성원권을 쟁취하기 위한 절대적 공간의 기본이 방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다.) 허나 이러한 방에서만 삶을 구성해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어떻게 보아도 긍정하기 어렵다.

방이라는 공간이 장소가 되지 못한 채, 사회 구성원의 사적 공간으로, 혹은 통계상 구획되는 경제적 논리로 작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타자화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방은, 그 안에 머무는 존재로 하여금 삶의 장소로 의미를 지녀야 하며 그로부터 사회적 환대를 나누고 사람이 사람으로 명명될 수 있도록 하는 장소로 수용되어야 한다. 여전히 방은 집이 아닌 채 방으로 남게 되더라도 ‘나’가 ‘남’으로 소외되는 일은 없도록 말이다.

 

글: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시 종이신문 과월호를 발송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