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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불균질하게 담은 이유 모를 고통 - 청년에 대한 <사냥의 시간>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불균질하게 담은 이유 모를 고통 - 청년에 대한 <사냥의 시간>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0.05.18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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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 영화에서 청년들의 꿈은 오랫동안 조금씩 변해갔다. <바보들의 행진>(1975)에서 고래를 찾아 동해바다에 가겠다던 꿈은, 갑작스런 상경으로 마주해야 했던 빈곤에 앞에서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웰컴 호텔을 짓겠다던 <바람불어 좋은 날>(1980)로 조금은 현실적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짜장면 배달을 하거나 숙박 업소에서 시중드는 것으로 결코 호텔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비합법적인 방법들이 자신이 가진 꿈을 이루기에 적합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렸다. 1인자 까진 아니더라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나(<넘버3>(1997)), 이런 힘을 가진 이들의 말을 잘 들어 나중에 가족 모두가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초록물고기>(1997))은 돈을 알지만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이란 것이 악랄해지지 않는다면 쥘 수조차 없는 것이 되어버렸을 때 청년들은 꿈은 꾸지만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마이 제너레이션>(2004)은 청년들에게의 꿈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그것을 갖는 순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배회한 이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라도 가질라 치면 꿈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하던 가치관을 내려놓고 치사해져야 한다는 것을 <10>(2013)이 잔인하리만치 명징하게 보여주면서, 안정적인 생존조차 힘겨워진 한국사회에서 청년들이 꿈을 갖는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를 생각게 했다. 꿈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동안 결말은 더욱 팍팍하게 변한 셈이다.

 

더 이상 이 사회에서 가능성을 찾지 못한 이들은 이제 한국을 뜨는 것을 최종 목표를 삼았다. <잉투기>(2013)에선 사람답게 살기 위해 코스타리카로 갈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고, <시동>(2020)에선 이 나라를 떠서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 가고자 했다. 그래도 이 영화들은 비록 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딘가 불쌍하고 안타까운 그래서 함께 해야 할 것만 같은 가족(비록 이상적인 형태는 아닐지라도)을 목에 가시처럼 이나마 남겨 두었었다. 싸우든 지지고 볶든 이 나라를 뜨는 것에 대해 다투면서 그들은 지긋지긋한 가족이 그래도 내 옆에 있구나를 느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 그 지긋지긋함 마저 거세되어 버린 <사냥의 시간>(2020) 속 청년이 등장한다.

 

<사냥의 시간>은 국제통화기금에 다시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이를 상환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디스토피아적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원화는 가지조차 없어 모두 달러로 결제해야 하지만 은행에서는 더 이상 환전을 해주지 않고, 모아 놓은 돈이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앉았으며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려도 이상하지 않을 곳, 바로 그곳이 대한민국이다. 여기에서 청년들에게 꿈이란 이곳을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영화의 초중반 준석(이제훈), 장호(안재홍), 기훈(최우식), 상수(박정민)가 함께 차를 타고 움직일 때마자 거리로 내몰린 이들을 자주 보여주는 것, 그리고 만약 우리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과연 그 이후가 어떻게 될지를 그 바깥의 상황과 지속적으로 교차시키는 것은 이들의 미래가 저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이다. 이곳을 뜨는 것. 이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빠르게 돈 벌 수 없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 역시 하나이다. 어딘가를 터는 것. 경험도 없는 이들의 갑작스러운 준비가 그리 성공적이었을 수는 없을 것이니, 결함이 생기고 이들은 곧 사냥감이 된다. 그 지옥 같은 고통의 시간. <사냥의 시간>은 이를 차근히 그리고 끈적하게 밟아 나간다. 그러나 <사냥의 시간>은 이를 그리 친절하게, 혹은 성공적으로 펼쳐놓지는 못한다. 앞서 보여주었던 근미래에 대한 문제의식은 후반에 끊어지듯 희미하게 이어지고, (박해수)의 정체는 모호하다. 그리고 이들이 도박장을 털기 위해 무기를 빌려주었던 봉식(조성하)의 죽음을 쫓는 형의 이야기가 갑작스레 끼어들면서 영화는 처음 설정한 방향과 멀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가 명확한 성취를 보여주진 못했을지라도 애초에 설정한 청년의 지옥도를 그리 쉽게 놓아버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는 <사냥의 시간>이 강박적으로 청년들의 서사를 잡아 이어냈다는 것이 아니라 초반의 설명과 후반의 폭주가 어울리지 않았기에 전달이 되지 못했다는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사냥의 시간>은 영화의 시작부터 회색 도시를 오랫동안 비춘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준석과 장호, 기훈 사이에 오가는 말들로 꽤나 상세하게 설명한다. 준석의 꿈은 대만의 한 섬에 가는 것이다. 허황된 꿈일지 몰라도 이 섬은 더 허황된다고 스스로 판단한 하와이에서 그나마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곳으로 낮춘 곳이다. 그 옛날 간신히 50만원을 벌어놓고 웰컴 호텔을 짓겠다는 꿈을 꾸던 이들은 더 이상 없다. 준석의 선택에는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그래도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것으로 낮추는 현실 인식이 아프게 배어 있다.

 

또한 이들에겐 굳이 대만까지 함께 갈 가족이 없다. 기훈에겐 살가운 부모님이, 상수에겐 아픈 어머니가 있긴 하지만 그들은 가족과 함께 대만에 갈 것을 기약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보기에 아버지가 하는 노조 운동은 의미가 없고, 괜히 쉽게 보이게 웃는 그 모습도 탐탁지 않다. 그들은 시위대를 가로질러 나가면서 철저히 그들끼리 남은, 그들의 논리만이 남은 세상으로 들어선다. 한탕으로 이 나라를 뜨는 것 외에는 어떠한 출구도 보이지 않는 현실, 즉 누구의 도움도 없을 것이라는 냉정한 현실 인식, 이것이 <사냥의 시간>이 그려놓은 청년의 모습이며, 우정에 대한 넘치는 낙관을 제외한다면 이것이 그려낼 청년 서사의 가능성은 분명 기대할 만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어떤 식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것이냐의 문제이며 이것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많은 설명 후 영화가 선택한 것은 그들이 이유도 모른 채 쫓기고 있는 상황으로 내달리는 것이었고, 이후 설명은 불친절해진다. 추적당한다는 걸 안다면 할 수 없는 선택들이 난무하고, 마치 병기와 같았던 한은 그들과 대면할 때에만 주춤대면서 의아함을 자아낸다. 이러한 미숙함은 결국 전혀 다른 방향의 궁금증을 자아내면서 이야기 전체의 방향을 전혀 다른 곳으로 돌아서게 만든다. 따라서 영화의 전반부와 어울리지 않는 후반부는 초반 감상적이며 많은 설명을 하려 했던 영화의 결과 배치되면서 영화 전체를 어색하게 만들고 음악과 필터가 화려한 영화 정도에 머무르게 할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아직 청년에 대한 이야기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고 판단한 것은 이들이 쫓기는 명확한 이유가 없다는 점, 바로 그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도박장을 털었고, 돈뿐 아니라 무수한 정보가 담긴 CCTV까지 훔치면서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것으로 그들이 추격당할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준석이 자신들이 엄청난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 한에게 절규하며 내뱉었던 내용이다. 준석은 이야기한다. 자신들이 훔친 것을 잘못했고, 돈도 줄 것이며, 경찰에 가서 자수도 하겠으니 이제 그만하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며 여전히 그들을 쫓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 상황은 아무 짓도 안 하고 나름 성실하게 살았지만 변한 게 하나 없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고 있는지를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청년들의 상황과 묘하게 겹쳐진다. 어차피 자신에게 잡힐 것이니, 벗어날 수 없으니 어디 한 번 도망쳐 보라는 한은 그의 반경 안에서 맴돌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얼마나 가소롭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재미있다던 그의 말이 그들에 대한 위협이라기보단 조롱처럼 보이는 것은 어디 한 번 답을 찾아 헤매보라는 게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한은 상대를 찾아 응징하는 자라는 점에서 게임의 승부는 정해져 있을 테니까. 마치 언제나 늘 맞고, 지고 있는 듯한 현실처럼.

 

<사냥의 시간>은 청년들의 사냥이 아닌 청년들을 사냥하는 그 시간들이 과연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지 묻는다. 이유 없이 쫓기고 있다면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의 공포는 배우들의 표정으로 극대화 되었고, 혼란 속의 긴장은 그만큼 인물들이 가질 긴장으로 치환될 수 있었다. 물론 그 방식은 불균질하고 불친절했지만, <사냥이 시간>이 던지는 질문, 즉 그 이유 없이 가해지는 거대한 고통은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하다. 청년과 그들의 이야기는 <사냥의 시간>을 통해 한번 더 더 파국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이는 그리 과장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냥의 시간>(2020)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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