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강요된 양자택일
강요된 양자택일
  • 안영춘/편집장
  • 승인 2011.04.11 14: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월의 ‘르 디플로’ 읽기]

처음엔 모든 게 명쾌해 보였다. 서방의 군사 개입 징후가 보이면 세계의 양심은 망설임 없이 규탄에 나설 것이었다. 그러나 리비아에 와서 달라졌다. 이 나라 ‘지도자’는 상황을 자신의 캐릭터만큼 복잡하게 만들어놓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서방‘만’의 군사 개입을 결의했다. 마이클 샌델 식의 정의론이 개입해야 할, 다시 말해 양자택일해야 할 순간이 왔다.
세계의 진보세력이 갈라섰다. 저항세력은 스러져가고 저항의 거점도 곧 무너질 위기 앞에서, 군사 개입은 불가피하다는 축이 하나 있다. 서방의 군사 개입은 언제나 사태를 질곡에 빠뜨렸고, 예외 없이 꼼수를 품고 있었다는 경험칙을 따르는 다른 한 축이 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전적으로 옳은 판단일 수 없다. 선택지 자체가 딜레마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3의 개입 방식은 애초 고려 밖이었다. 예컨대 유엔군이나 이집트군, 범아랍군의 개입 같은 좀더 다자적이고 지역공동체적인 방법 말이다(세르주 알리미의 글). 의도했든 안 했든, ‘사느냐 죽느냐’라는 햄릿식 문제설정은 ‘어떻게 하면 더 잘살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배제하기 마련이다. 회피할 수 있는 딜레마는 아포리아(곤경)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할리우드와 오사마 빈라덴이 재현하는 아랍의 이미지는 상반된다. 그러나 두 이미지 또한 잘못된, 혹은 의도된 문제설정의 그림자다. 아랍 혁명의 주체들은 그 어느 쪽에도 포섭되지 않는다. 그들이 요구하는 정치 자유와 부패 종식, 고용 기회 확대, 적정한 임금 등은 내면화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도, 문화상대주의의 호기심거리도 아니다. 아랍의 정체성은 아랍 민중의 이런 지향적 가치 위에서 구성돼야 한다. 튀니지 젊은이의 분신은 이에 관한 커밍아웃이 아닐까(20면).
한국에서는 쌍용자동차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자살이든 돌연사든, 일종의 사회적 발언이다. 해고 노동자도 사람이라는, 그래서 개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혹독하게 겪어야 한다는, 집으로 스며든 명퇴자도 현장에서 끝까지 싸우는 투사도 마침내 목숨을 끊는 열사도 너무 아프다는 삶의 최후에서 던지는 메시지다. 한국판은 그들의 아픔을 육성으로 담았다(26면).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는 탁월한 구조적 통찰에도 불구하고,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는 노동자에게 급히 손을 내밀어주지 못한다. 장기투쟁 노동자가 겪는 (특히 정신적) 질환은 노동운동 진영에서도 제대로 의제화하지 않았다. 철의 노동자는 아파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많은 철의 노동자들은 ‘사느냐 죽느냐’의 막다른 선택에 내몰렸다. 그들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치유하려면 그 고통을 가시화하는 게 먼저다(28면).
일본의 지진해일에 이은 원전 사태는 일본 사회와 에너지에 관한 문제설정에 근본적 의문을 던진다. 외신이 앞다퉈 칭송하는 일본 국민의 침착함과 헌신성은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의 ‘천벌’ 망언과 모순된다. 이번 사태는 천황제의 가부장적 통치문화와 이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일본인들의 체념에 관한 환유이기도 하다(6면). ‘화석연료냐 우라늄이냐’라는 선택지는 ‘에너지를 실컷 쓰라’는 욕망의 부추김이 숨어 있다. 원전에 반대하려면 에너지를 ‘어떻게 쓸지’, ‘어떻게 하면 덜 쓸지’라는 성찰적 물음이 선행돼야 한다(9면). 지속 가능한 에너지에 대한 답 또한 문제설정이 옳아야 찾을 수 있다.

글•안영춘 편집장 editor@ilemonde.com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안영춘/편집장
안영춘/편집장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