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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죽지 않았다
역사는 죽지 않았다
  • 안영춘 편집장
  • 승인 2011.05.0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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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라덴의 죽음이 빈라덴만의 죽음이 아니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그의 주검과 함께 수장된 것이 무엇인지를 두고는 관측이 다양하다. 그의 실질적·상징적 힘이 미치는 범위와 그 안팎의 역학관계에 관한 분석이 똑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이유는 ‘무지’에 있다. 일반인이 아랍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사정은 우리나라나 서구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빈라덴이 이슬람교뿐 아니라 아랍 세계 전체와 등치될 때, 그의 죽음은 프랜시스 후쿠야마 식의 또 다른 ‘역사의 종말’이다. 물론 그것은 무지의 탓이거나 희망사항, 혹은 주술이다.

연초부터 시작된 아랍 민주화 혁명의 전개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 세계가 다양한 주체와 욕망으로 구성돼 있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곳 민중이 더는 ‘반제국주의 독재냐, 서방 강대국의 헤게모니냐’의 이분법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정치화를 새롭게 탐색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배경에는 <알자지라>라는 탁월한 저널리즘이 있다. 빈라덴의 죽음은 아랍 민중에게 작은 변수일 뿐이다. 늦깎이로 봉기에 나선 시리아 민중에게나 유엔의 군사 개입으로 사태가 복잡해진 리비아에서는 오히려 빈라덴을 사살한 미국의 총구와 봉쇄가 더 큰 걸림돌이다(1, 12~16면).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헤게모니는 자본과 정치, 군대가 스크럼을 짜고 동행하며 지구 구석구석으로 스며든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간부 출신들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자기 식으로 재해석해 마케팅을 펼친다. “세상은 위험투성이지만 전문가인 우리가 있으니 안심하라”며 거액을 요구한다(11면). 심지어 그 힘은 미식에까지 뻗친다. 다르푸르 학살에 맞서 경제봉쇄를 단행한 미국은 수단산 아라비아고무에 얽힌 미국 기업들의 이해관계로 형해화했다. 수단산 아라비아고무는 코카콜라 등 수많은 제품의 원료로 들어간다(1, 8~9면). 소말리아 앞바다에서 참치를 걸태질하는 스페인의 선주들은 무장한 민간 경호업체 직원들을 배에 태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소말리아 해적의 위협을 부풀리며 스페인 군대까지 동원하려 했으나, 정부 보조금을 받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10면). 정의는 나라 안팎으로 살아 숨쉬지 않는다.

저들의 헤게모니가 한국 교육에 미친 영향을 따져 묻는 것은 지나칠까. 한국판 특집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1, 22~25면)의 글 네 편에는 일관된 징후가 포착된다. 카이스트라는 엘리트 기술교육기관으로 가기 위해 어려서부터 반복식 단순암기로 무장한 사교육 영재들은, 목표에 도달한 뒤에는 정작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번제에 희생된다. 여기서 경쟁력은 순위로 표식되고, 그 표식을 매기는 힘은 나라 밖에 존재한다. 미친 듯 치솟는 대학 등록금에도 글로벌 경쟁력과 수혜자 부담 원칙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투영돼 있다. 그런 현실을 타기하기 위한 실천은 ‘교육은 죽었다’라는 선언에서 시작돼야 하지 않을까.

아이슬란드 국민은 국외 자본의 예금을 세금으로 변상할지 묻는 국민투표를 거푸 부결했다(6~7면). 한때 금융 거품의 단맛에 취해 있던 그들이 ‘투기금융은 죽었다’고 선언한 셈이다. 하지만 그들의 선언은 가혹한 시련을 예고한다. 그 시련은 국민투표 같은 제도로 헤쳐나갈 수 없을 터이다. 전례 없는 디스토피아는 전례 없는 대응을 요구한다. 투기자본의 뒷감당을 거부한 아이슬란드 국민은 이제 어떤 길을 갈까. 확실한 건 역사는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글 · 안영춘  편집장  editor@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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