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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정중동 철학속 인생의 의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환상의 빛 Maborosi>(1995)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정중동 철학속 인생의 의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환상의 빛 Maborosi>(1995)
  • 정재형
  • 승인 2020.06.2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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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터널

누구나 따라가야 할 빛이 있다. 재혼한 유미코는 남편에게 전 남편이 왜 자살했을까를 묻는다. 이 질문은 그녀에게 있어서 인생의 가장 큰 미스테리였다. 남편은 아버지의 예화를 들려준다. 아버지는 어부였다. 아버지는 바다가 자기를 부른다고 했다. 바다를 보면 속에서 빛이 나오는 게 보였다고 한다. 그 빛이 자신을 오라고 유혹한다고 했다.

유미코는 어려서 할머니가 집을 나서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녀는 할머니를 쫒아가 집으로 돌아오시라고 했다. 할머니는 고향에 가야 한다고 한사코 가셨다. 이후 할머니는 돌아오시지 않았고 그건 그녀의 죄책감이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너 때문에 나가신게 아니라고 그녀를 위로했다.

남편이 자살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유미코는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자책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이 죽은 것이 유미코 때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건 단지 그녀의 자책감일 뿐이다. 왜 그녀는 자책감을 갖는 것일까? 자신이 할머니를 말리지 않았다는 것과 남편이 혹시라도 자신의 소홀 때문에 죽었다면 그건 자신의 책임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영화는 유미코의 사색의 도로를 따라간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왜 남에게 영향을 주었을까를 생각하며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특히 남편이 죽은 이후 그녀는 남편은 왜 죽었으며 자신은 또 왜 사는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다. 그 대답은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두 번째 남편이 준 시아버지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환상의 빛이다.

자신의 아들, 딸 둘이 자연을 즐겁게 뛰어다니며 노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빛이 쏟아지는 터널의 내부를 뛰어간다. 멀리 구멍에서 밖의 밝은 빛이 들어와 그들을 비춘다. 그들은 그 빛을 향해 뛰어가고 마침내 그 빛의 더미 속에 몸이 파묻힌다. 이것이 어부가 본 바다의 빛과 다르지 않고, 할머니가 찿아가는 고향의 빛이 아닐까. 영화는 인간이면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것이 바다든, 고향이든, 남편이 추구한 그 무엇이든, 각자 추구하고 그 비밀을 남몰래 감추고 사는 거라고 말한다.

 

정물화의 일상이 주는 의미

주인공 유미코에게는 항상 질문이 있었고 그건 인간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인간의 드라마는 격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현실의 모습이 잔잔하기 그지 없다. 그것은 인간의 드라마를 자연과 일상의 현실 속에 파묻고 녹여내는 의미가 있다. 인간의 내면 그대로 라면 파도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번뜩여야 할 텐데, 화면은 고요하다. 정적이 감돌고 정물화가 된 느낌이다.

정물화의 일상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정물화는 일상의 표면만을 그린다. 그 이면의 폭풍우 같은 진실 혹은 비밀은 묻어둔다. 그게 정물화의 일상이 주는 의미일 게다. 격정의 드라마를 깊이있게 파헤치기 보다는 무언가 암시하면서 모르는 체 지나가는 게 인생일 거라는 뜻이다. 안다고 해서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정물화의 일상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일상이다. 그 사물은 모든 사건의 원인들이고 질문들이다. 이 영화는 인간이 사물을 바라보는 각도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이 대화한다 하면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은 다 틀린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의 일상은 마치 죽어 있는 사물들의 공간인 것처럼 나타난다. 사물과 사람은 일체화되어 나타나고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은 에너지가 아니라 사물처럼 일상의 풍경처럼 심어져 있을 뿐이다. 인생을 그저 살아가라고 가르치는 듯 하다. 풍경을 자기 것으로 갈아치우려 하지 말고, 그저 그 풍경속으로 걸어들어가 자리 하나 차지하고 조용히 살아가라 말하는 듯하다.

주인공 유미코는 항상 뭔가를 응시하는 동작과 표정이다. 관객도 주인공의 응시를 재응시하며 동시에 인물들이 놓인 정지된 일상의 장면을 응시한다. 영화는 관조의 상태를 유도한다. 영화속에 나타난 일상의 사물들은 하나같이 조용하고 긴 시간 동안 놓여 있다. 드라마를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다르게 바라보도록 권유하는 식이다. 영화의 중간에 가족이 놓여 있는 공간이 인상적이다. 화면은 세 개의 평면으로 나눠져 있다. 맨 뒤에는 집이 있고 가운데는 평지정원, 앞에는 바다가 있다.

가운데 평면에 사람이 위치한다. 아주 작은 모습으로 놓여 있다. 그들의 움직임은 전체에서는 정중동(靜中動) , 고요한 가운데 작은 움직임으로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이 장면이 반복된다. 맨 마지막에는 사람이 없는 빈 방의 공간이 보여진다. 영화는 빈 공간을 보여주며 끝난다. 동양화의 미학인 여백이 이 영화속의 컷트로 대체된 것 같다.

 

검은 옷의 일상

영화속 인물들은 흑색의 옷을 즐겨 입고 나온다. 특히 유미코의 의상은 거의 흑색이 주다. 인물들은 좌우의 박스형 구도 안에 종종 갇혀 있다. 풍경은 움직이지 않고 인물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없는 장면도 많다. 인물이 있어도 움직임이 거의 없어 인물도 그 풍경의 일부인 사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검은 옷은 상복의 이미지를 갖는다. 박스형의 구도는 관을 상징한다. 움직임이 거의 없는 풍경과 사물은 그대로 죽어있음을 의미한다. 살아있되 죽어 있음이다. 그것은 무슨 메시지일까? 삶이 곧 죽음, 죽음이 곧 삶이라는 순환론적 세계관을 준다.

유미코의 남편은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 유미코에게 남편의 죽음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죽음이란 누군가 사라졌다는 의미 외에 어떤 것도 아니다. 사라진 사람은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할머니의 사라짐은 남편으로 환생한 것처럼 느껴지고, 남편의 죽음은 그가 항상 타고 다녔던 자전거의 요령소리로 대체된다. 그녀는 상복 같은 검은 옷을 입고 남편의 자전거를 타고 남편이 죽었던 철길옆을 달려 보기도 한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일본의 소설가 미야모토 데루의 동명 소설이고 소설과 영화는 그 느낌이 아주 다를 것이다. 그 이유는 소설가나 감독이 둘 다 스타일의 개성이 돋보이는 작가들이므로 소설적 문체와 영화적 양식이 다른 느낌을 불러올 것이란 생각이다. 유미코라는 주인공이 남편의 갑작스런 자살 이후에 그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의문을 추구하는 내용을 다룬다. 작은 일상사를 그리고 있으나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생이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가에 대한 심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스타일의 완성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하다. 정지된 카메라, 긴 시간, 상징적인 구도, 색깔 등의 영상미를 통해 이야기보다도 영상을 통해 깊은 내면의 의미를 파헤쳐 가는 예술영화의 걸작이다.

 

 

글·정재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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