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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문화톡톡]코로나19를 넘어서며 함께 넘어서야 할 것에 관해 기도한다면
[안치용의 문화톡톡]코로나19를 넘어서며 함께 넘어서야 할 것에 관해 기도한다면
  • 안치용(문화평론가)
  • 승인 2020.07.27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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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엽에 흑사병이 창궐하자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여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당시의 문명 수준으론 신의 심판이 그나마 가장 받아들일 만한 해석이었다. 다음의 예는 이러한 해석에 따른 행동의 황당한 결과를 보여준다.

흑사병 팬데믹이 발발할 무렵 어느 비()기독교 왕국의 왕은 듣도 보도 못한 괴질로 그렇게 많은 자신의 백성이 순식간에 죽는 사태에 놀라 개종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교황을 만나러 가려고 신하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기독교 신앙을 거부한 죄 때문에 하느님의 복수가 자기 백성에게 떨어진 것이라고 판단하여 교황을 만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면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여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괴질이 기독교 국가들에도 널리 퍼졌음을 알게 된 왕은 자신이 판단이 틀렸음을 깨닫고 말머리를 자국으로 돌렸다. 귀국길은 유혈사태로 점철되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 이교도 왕의 무리를 공격하여 왕은 신하와 병사 수 천 명을 잃었다.

당시의 기록에 남아 있는 이 사건에서 굳이 특별한 교훈을 찾아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아 그들이 무지몽매하고 야만적인 것이지, 그때에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정보와 지식에 근거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합당한 행위를 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문제는 위기가 인간의 무지와 야만을 뚜렷하게 돌출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전면적이고 전혀 새로운 위기 국면에서는 기존 지식과 정보가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예컨대 2020년에도 코로나19바이러스감염증을 예방하겠다며 이란에서만 5000여 명이 소독용 알코올을 희석해 마셔 이 중 500여 명이 사망했다. 100명 가까이 실명했고 치료를 받은 사람이 꽤 많아 최종적으로 몇 명이 숨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른 바 인포데믹에 의한 이러한 참극이 꼭 이란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꼭 에탄올에만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 돌았을 때도 인포데믹에 편승한 황당한 치료법이 유행했다.

에탄올을 마시는 것과 흡사하게 독약 성분인 비소를 먹는다, 비둘기나 강아지의 피를 이마에 바른다, 두꺼비와 도마뱀을 말려서 붙인다, 인간의 소변으로 목욕한다 등 가짜뉴스가 횡행했다.

인포데믹은 무지 및 편견과 결합하는데, 이것이 자신을 향할 때는 그나마 폐해가 덜한 편이다. 인포데믹이 외부로 향하면 때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흑사병이 엄습한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실제로 이런 일이 생겼다. 사단은 흑사병의 창궐 속에서도 유독 유대인만 피해가 적은 데서 찾아졌다. 중세의 인지수준으로는 도무지 객관적으로 해명되지 않는 현상이었고, 결국 유대인이 병을 퍼뜨렸다느니 우물과 샘에 독을 풀었다느니 사탄과 연결되었다느니 등 괴이한 주장이 등장하고 전염병이 퍼지듯 이 같은 내용의 인포데믹이 퍼지면서 흑사병에서 어렵사리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인간에게 학살당하는 아이러니가 역사에서 목격됐다.

 

유대인의 낮은 감염률과 낮은 치명률의 이유는 간단했다. 즉 유대인의 높은 위생관념이 질병을 막아줬던 것이다. 예컨대 유대인들이 사는 게토의 인구밀도가 다른 곳보다 높아도 아동 사망률은 현저히 낮게 나타나는 등 많은 사례와 통계를 통해서 유대인의 높은 위생관념은 실증된다. 유대인은 안식일을 앞둔 매주 금요일에 목욕을 하고 손톱을 깎는 유대교 정결의식을 지켰고 예배와 식사 전에는 손을 씻었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확인되었듯 손만 잘 씻어도 감염이나 기본적인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알고 오랫동안 위생수칙으로 준수했다.

손 씻기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유대인 위생의 기본지침이다. 이들은 율법에 따라 하루에 9번 이상 손을 씻으며 손을 씻는 방법도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유대인의 집안 청결관리 또한 유명하다. 가정이 곧 예배의 성소(聖所)이기 때문에 안식일을 쇠기 위해 매주 정성 드려 청소한다. 유월절이나 무교절 같은 유대인의 주요 절기에는 더욱 세심하게 닦고 씻고 쓴다. 주기적으로 식기와 생활용품을 몇 주에 걸쳐 끓는 물에 삶아서 소독한다. ‘피를 먹지 말라등 히브리성서를 통해 전해진 식재료에 관한 까다로운 규정 또한 유대인의 건강과 안전 증진에 간접적으로 공헌했을 것이다.

중세 유럽의 전반적 위생수준은 위생이란 단어조차 쓰기 힘들 정도였다. 짐승우리를 방불케 하는 일상의 불결함이 중세에 흑사병을 더 빨리 확산시켰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21세기 사람은 안다. 중세에 상대적으로 강한 위생관념을 가진 유대인의 치명률이 낮은 것은 당연했다. 유대인의 낮은 치명률이 종국에 (평균보다 더?) 높은 사망률로 이어진 것과 같은 구조의 비극적 사태는 안타깝게도 역사에서 드물지 않다.

그러나 요즘말로 가짜뉴스만이 학살의 원인이었다고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국내에도 적잖은 독자를 확보한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는 곤경에 처한 당시 사회의 분노의 배출구가 유대인 학살이었다고 희생양 이론을 통해 분석했다. 유대인이 그 대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평소에 축적된 혐오의 에너지가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인 시기에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혐오는 무지와 편견의 토양에서 성장한다. 코로나 사태의 와중에서 우리는 세계 전역에서 분출하는 다양한 혐오를 목도하였다. 만약 21세기 아닌 중세였다면 많은 중국인, 그리고 다른 인종이 보기에 비슷한 외양인 한국인이, 학살까지는 아니어도 대거 희생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아직까지, 같은 인간임에도 특정한 편견의 분류법에 의거하여 형성된 어떤 무리의 인간에 대한 혐오는, 인간 몸에 전염병의 흔적이 남아 있듯 대다수 인간의 본성에 살아 남아있다.

전염병은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곤 했다. 흑사병이 대표적 예이고, 유럽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질병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에게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힘으로써 신대륙의 운명을 바꾼 사례 또한 자주 거론된다. 흑사병은 유럽에 거대한 전환을 초래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세계를 바꿨다. 이제 세계화한 인류는 코로나19바이러스감염증이라는 공통의 전염병을 동시에 앓으며 동시에 극복해나가고 있다. 전염병을 이해한 채 모두가 동일한 위협에 노출되어 전 세계적으로 피해상황을 공유하며 바이러스와 싸운 것은 인류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의 경험에서 배울 것은 팬데믹은 인류에게 분명 무서운 재앙이었지만, 이어 밀어닥친 인포데믹과 다양한 유형의 혐오 또한 바이러스와 세균 못지않은 재앙이 되었다는 점이다. 고통이 적지 않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아직까지 인류는 바이러스에 맞서 선전하고 있는 셈이다. ‘인포데믹과 혐오와의 추가적인 전투에서도,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잘 싸우고 있는 편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다. 이 싸움이 끝났을 때는 어떤 결론이 가능할까. 예측할 수 없지만, 바이러스에도 이기고 인포데믹과 혐오에도 이겼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기를 누구나 기원할 것이다. 개인적 견해로는 이 기원이 정확하게는 아마도 기도이어야 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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