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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라이아이:주둔하는 신>과 <파란나라>
[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라이아이:주둔하는 신>과 <파란나라>
  • 이승민(영화평론가)
  • 승인 2020.08.10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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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역사 쓰기 - 공유, 수집, 텔링

특정 장소를 다룬 에세이 영화 두 편이 있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정여름, 2020)은 용산 미군 기지를 다룬 작품이고, <파란나라>(김영글,2019)는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을 다룬 작품이다. 두 영화는 모두 공적 공간의 역사를 다루지만 공적 역사에서 벗어난 역사쓰기를 시도한다. 그렇다고 경험자의 기억과 증언으로 구성된 역사쓰기도 아니다. 영화는 기존의 증거 중심의 역사쓰기와는 다르게, 감독의 사유를 기반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배열하여 이야기를 만든다. 특히, 역사적 사료와는 다소 무관한 신화, 게임, 만화, 동화와 같은 타 영역을 넘나들며 역사적 상상력을 펼쳐낸다. 이때 상상은 허구적으로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상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상으로 역사의 상을 색다르게 구축한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은 한국거주 미군 기지를 다룬다. 영화는 공간에 대한 설명이나 기원 대신 신화와 게임에서 출발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그라이아이는 하나의 눈을 돌려가며 세상을 보는 그리스 신화의 세 자매이다. 영화는 두 여자가 잠든 사이 눈을 지닌 에뉘오(전쟁의 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의 눈에 세 가지 시선, 영화는 여기서 출발한다. 역사나 기록이 자칫 전지적 시점이나 유일한 시선으로 간주되는 오류를 처음부터 바로 잡고 시작한 셈이다. 대상을 향한 여러 시선 중 하나의 시선일 수 밖에 없는 게 그라이아이이고 영화인 것이다.

신화를 이야기하는 동안 영화는 사운드와는 다른 결의 이미지를 배열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다섯 장의 흑백 기록 사진은 세 자매의 제각각의 시선일 수 있지만, 영화는 ‘무엇을’ 이라는 내용적 층위 보다 세상을 보는 각기 다른 시선의 배열 그 자체에 주목한다. 정보값으로의 이미지나 사운드를 보조하는 이미지가 아닌 세 가지 시선 중 하나의 시선으로 향해 간다.

 

영화는 이어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고로 향한다. 가상현실 혹은 증강현실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실제 현실이 아니다. 지각 가능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현실이다. 영화는 실재 장소인 미군기지를 언급하기 이전에 신화와 게임으로 시선과 영역을 재설정한다. 존재하지만 실재를 논하기 어려운, 반대로 실재하지만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쉽지 않는다는 관점으로 미군기지에 접근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를 견인하는 감독의 비가시적인 목소리 역시 그러하다는 점이다. 일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유연하게 안내하는 나의 목소리는 분명 존재하지만 볼 수 없는 비가시적인 그러나 실재하는 존재이다. 신화나 게임처럼 그리고 미군기지 처럼.

 

신화나 게임을 거쳐 영화는 감독이 거주하는 동네의 미군 기지로 다가선다. 벽으로 둘러쳐져 안을 볼 수 없는 그 곳, 구글 지도에서는 공원으로 표기되어 있는 군사비밀구역이지만 포켓몬 고에서는 내부의 다양한 장소들이 포켓스톱으로 드러나고 있는 곳이다. 현실 세계에서 존재하지만 비밀로 부쳐져야 할 공간이 가상공간에서는 오히려 그 실제가 유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미군 기지를 가상현실의 실재성을 질문하며 이미지를 중첩하고 배열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이때 이미지는 흥미롭게도 감독이 직접 찍은 영상들이 아니라 유투브와 페이스북과 같은 SNS상에 올려진 공유 영상이다. 영화는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미군기지, 미군이 주장하는 평화 유지와 안보협력, 기지 이전에 따른 여러 부조리를 ‘가상 현실’을 질문하면서 가상공간에서 자료를 수집해 사유의 흐름에 따라 배열하고 비정형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디지털 세상에서 웹서핑으로 수집한 자료들을 느슨하게 연결지어 새로운 이야기를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영화는 한국주둔 미군 기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도, 자료를 다루는 방식도, 이미지를 이어내는 방식도 기존 역사쓰기에서 벗어나 있다. 영화는 영웅이나 피해자를 설정하거나 인물이나 사건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설명적이지도 인과적이지도 않다. 영화는 감독의 시선에서 출발하고, 온라인에 공유된 자료를 수집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이때 이미지와 자료들은 위계나 무게감이 없다. 특정 자료를 신성시하거나 주목하는 방식이 아니라 평등하고 수평적으로 자료를 배열하고 있다. 자료는 또한 과거를 소환하는 매개라기보다는 과거 이미지 그 자체로 전시되곤 한다. 과거 시간은 무게감을 지워내고 개인의 관점에 따라 수집되고 진열되고 각색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료의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현재의 연속으로 비춰진다.

 

 

<파란나라>

<파란나라> 서울시립 남서울 미술관의 역사를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영화는 동화 <파랑새>의 한 대목에서 시작한다. 소년소녀는 창문을 통해 건너 부잣집 파티의 트리를 부럽게 바라본다. 그리고 말한다. “고양이는 왜 말이 없지?” 이어 영화는 서울시립 남서울 미술관이 여섯 번 주인이 바뀌고 우여곡절을 겪어온 건물이라고 말한 후, 이 영화는 건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곧이어 건물이 건축된 대한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 벨기에 영사관 건물로 건립된 당시 신문 자료를 소개한다. 그리고 건축한 이들을 소개한다. 바로 파란피부의 스머프다. 영화는 이처럼 서사적 맥락은 물론 시공간의 맥락을 무시한 채 동화, 신문자료, 만화를 넘나들며 장소의 이야기가 아니라면서 장소의 역사로 들어선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내레이터의 목소리이다. 영화는 스머프가 2억 만리 한국까지 와서 영사관 건축에 동원된 수수께끼를 설명해보자며, “옛날 아주 먼 옛날 이야기”로 들어선다. 영화는 내레이터의 관점으로 동화와 만화와 자료와 옛날이야기를 엮어 이야기를 만든다. 이들을 서로 위계를 가지지 않고 하나의 단상에서 다음 단상으로 느슨하게 이어진다. 마치 자료를 리서치하는 과정 마냥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키워드 연결이 이어지곤 한다. 영화는 벨기에 작가라는 연결성을 가지고, <파랑새>의 파랑새와 파란 피부의 스머프를 이어내고, 행복을 상징하는 파랑새와 행복을 추구하는 스머프를 겹쳐낸다. <파란나라>는 그런 ‘파란’들의 초연결의 네트워크인 셈이다.

영화는 점차 스머프의 횡보에 초점을 맞춘다. 행복을 추구하고 이상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스머프는 한국 근현대사에 들어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영화는 이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담는다. 스머프의 일부는 만화 속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지만, 일부는 스머프의 모자만을 흔적으로 남긴 채 노동자, 철거민, 때로는 집회 진입자로 몸을 바꾸면서 자기 자리를 박탈당한 존재로 살아간다. 스머프의 여정은 건물의 역사와도 닿아 있다. 서울 재개발로 벨기에 영사관역시 우여곡절 끝에 사당동으로 밀려오고, 이때 스머프는 이미 사당동 철거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건물을 짓던 이들이 철거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파란색의 의미가 바뀐 것처럼 스머프의 역할도 그렇게 변화한 것이다.

 

영화는 상상 속 스머프를 한국 현대사에 기입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사실은 지금까지 영화의 화자가 바로 스머프인 것이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는 스머프를 지금 길거리에서 숨어 다니는 길고양이로 비추어낸다. 이즈음 되면 영화를 관통하는 상상 속 스머프는 영화 초반 동화 <파랑새>의 말없는 고양이자 동시대 길거리를 헤매는 고양이이고, 한국 근현대사를 버텨낸 (모자쓴) 민중이다. 그리고 그 민중은 우리 즉 나인 셈이다. 한바탕 소동극처럼 유쾌한 슬픈 이야기가 완성된다.

유연하지만 계산된 연결 속에서 영화는 재개발 역사의 틈바구니에 놓인 사당동과 서울시립 남서울 미술관의 역사를 이야기로 만들어 나간다. 감독 스스로도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명명하고 있지만 영화는 영역을 넘나들며 한국 근현대사의 민중의 얼굴을 ‘이야기 속 이야기’로 가볍게 풀어내면서 새로운 역사쓰기를 시도한다. 자료나 당위의 틀에 매이지 않고 근현대사의 복합적인 시간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일명 예술적 역사쓰기라고 할까.

 

역사를 기록하는 여러 방법이 있다. 그 중 세가지만 소개하자면, 먼저, 그 시대 인물이나 사건을 기록한다. 수많은 역사가 영웅 중심의 사건 기록이다. 그러나 은폐된 역사의 경우에는 기록이 부재하기에 피해자(경험자)의 기억을 증언해 사건이 실재임을 밝혀낸다. 두번째로는, 사건이 발생한 공간을 기록한다. 공간의 기억과 흔적을 중심으로 삭제되거나 망각된 사건을 소환한다. 이 경우는 과거를 추적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재 공간에서 과거를 불러온다. 엄밀하게 말하면 현재가 품고 있는 과거를 응시하며 소환한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디지털 세대가 디지털 자료를 기반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이다. 넘쳐나는 자료들을 자신의 관점으로 수집하고 재배치하여 과거를 재해석과 재창조한다. 이때 기록은 특정 사건의 증거 자료 라기보다는 과거라는 이미지 혹은 과거라는 시간을 증빙하는 대상으로 전시되곤 한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과 <파란나라>는 인물도 사건도 공간도 아닌 기록을 통해 역사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이들은 사회적 이슈를 리서치하되, 신화, 게임, 만화, 동화와 같은 다양한 영역의 자료들을 위계나 경계없이 불러와 이야기를 만들고 역사를 재구성하고 재창조한다. 이때 기록은 증거를 위한 기록이 아니라 감독의 내적 흐름과 리듬을 중심으로 배열되고 주조된다. 역사의 이야기화, 혹은 이야기의 역사화라는 조합이 예술적 역사쓰기의 낯설지 않은 방법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은 전주국제영화제와 인디포럼에서 상영되었고, <파란나라>는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두 작품은 모두 8월말에 개최하는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NEMAF)에서 상영예정이다.

 

사진출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네이버 영화 
<파란나라> 김영글 감독 제공

 

글·이승민

현장 비평가이자 기획자로 활동,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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