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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의 문화톡톡] 일상의 예능화 - 매체에 종속되는 일상
[이은지의 문화톡톡] 일상의 예능화 - 매체에 종속되는 일상
  • 이은지(문화평론가)
  • 승인 2020.09.0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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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미국의 인문학자 새뮤얼 웨버는 예술작품의 원본이 갖는 아우라가 상실된 디지털 매체 시대에도 여전히 아우라는 존재하고 또 경험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각각의 매체 시대에 그 시대에 맞는 매체 아우라가 등장”한다. 그는 벤야민이 유명한 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를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일시적으로 현상하는 것’으로 표현한 점에 착안한다. 텔레비전이라는 용어가 ‘멀리(tele) 보기(vision)’라는 의미를 갖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매체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가깝게 가져오며 이로부터 아우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1)

 

Photo by Glenn Carstens-Peters on Unsplash
Photo by Glenn Carstens-Peters on Unsplash

 

웨버가 설명하는 매체 아우라는 매체를 통해 ‘나의 표상’이 ‘나를 위한 표상’으로 변화한다고 했던 귄터 안더스의 설명을 어느 정도 보충해준다. ‘나의 표상’은 나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세계를 통해 나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 및 판단을 습득함으로써 형성된다. 반면 ‘나를 위한 표상’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것들을 매체를 통해 가깝게 가져옴으로써 발생한다. 원본과 복제품의 우열이 존재했던 시대의 아우라는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처럼 현상했다면, 그러한 우열이 불가능한 오늘날의 아우라는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현상한다. 매체 환경이 변화하여 아우라가 현상하는 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과거에는 원본이 복제품에 대해 아우라를 가졌다면, 오늘날에는 복제품이 원본에 대해 아우라를 갖는다. 즉 원본인 ‘나 자신’보다 그것의 복제품인 ‘나를 위한 표상’이 우위에 놓이게 된다.

아우라의 주체가 예술작품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될 때 벌어지는 변화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술작품은 말 그대로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대상이기도 하고 주체이기도 하다. 매체가 공급하는 이미지를 통해 ‘나를 위한 표상’을 형성하고 거기에 우위를 부여하는 것은 대상이기도 주체이기도 한 ‘나 자신’이 허물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의 심상을 한 점 거스르지 않는 이미지에 자신을 투사하고 이를 다시금 소비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고 가깝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처럼 ‘나 자신’을 가깝게 여겨지게 하는 이미지는 정작 원본인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나를 위한 표상’이 결코 ‘나 자신’이 될 수는 없다.

인터넷-스마트폰-동영상 플랫폼의 완벽한 삼위일체 속에서 누구나 스스로 채널을 만들 수 있게 되면서 ‘나를 위한 표상’과 ‘나 자신’ 간의 경계는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누구나 ‘나 자신’을 화면에 등장시켜 ‘나를 위한 표상’을 제작하고 또 전 세계에 송출한다. “너 자신을 방송하라!”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티즘”을 부추기는 오늘날의 매체 환경은 방송국이나 제작자를 거치지 않고 “탈중개 disintermediation”된 이미지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2)

그러나 기존의 방송과 달리 ‘나 자신’을 직접 등장시킬지라도 그것이 화면을 통해 멀리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매개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기존의 매체 제작 환경을 거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등장하는 영상을 스스로 제작하는 행위는 자신을 매체에 ‘탈중개’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제작된 자신의 이미지를 다른 사람들이 소비하고 상호작용하게 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재매개 remediation’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일한 경험도 매체를 거쳤을 때 더욱 생생하게 감각되듯이, 매체를 거친 자신의 이미지 또한 현실의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진정성 넘치고 현실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미국의 미디어 이론가인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은 새로운 매체가 기존의 다른 매체들을 차용함으로써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하는 것을 ‘재매개’로 설명하고 있다. 새뮤얼 웨버가 매체 아우라를 이야기한다면, 볼터와 그루신은 매체 간의 끝없는 상호 재매개를 통해 매체 아우라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본다.3) 인간 개인을 매체로 놓고 본다면, 인간이 자신을 영상 이미지로 제작하고 그것을 다시 소비하는 과정은 인간과 영상 매체가 서로를 재매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인간과 매체는 서로 간에 끊임없이 간섭하고 영향을 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브이로그’는 흥미로운 현상이다. ‘비디오’와 ‘블로그’를 합성한 이 용어는 블로그에 올리던 일상생활을 비디오 영상으로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텍스트 중심의 웹 블로그에서 이루어지던 행위를 스마트폰의 동영상 플랫폼에서 그대로 구현한다는 점이 이미 매체 간의 재매개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재매개는 블로그도 비디오도 인간의 지극히 사소한 일상생활을 전시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야말로 매체에 가장 크게 간섭하여 매체를 끊임없이 재매개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개인이 직접 자기 자신을 방송(탈중개)하게 되면 매체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과 인간에 대한 매체의 영향력(재매개)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지금 이대로 영원히 반복되는

예능이 일상이 되고 일상이 예능이 된다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의 생활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이 이미지로 제작된다는 것은 매체가 인간적으로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매체에 종속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상이 매체에 종속될수록 매체를 거치지 않은 일상은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간다.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않는 외출, 브이로그에 올리지 않는 일과는 상대적으로 무의미해지고 빛을 잃는다. 이는 일종의 치킨게임과 같아서 매체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될수록 인간에 대한 매체의 영향력 또한 절대적으로 된다. 매체를 거친 우리 자신에 대한 감각이 강화될수록 매체를 통하지 않은 순수한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은 미약해진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서 세계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오늘날 인지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이는 항상 이미 미디어라는 필터를 통해서다.”4) 우리 자신을 매체에 내어주면 줄수록, 우리는 점점 더 윈도우나 맥 운영체제의 ‘사용자’와 같이 되어간다. 우리는 현대사회에 필수적인 컴퓨터 운영체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문외한이지만 그런데도 그것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매체에 일상을 비롯한 모든 것을 전시하고, 매체를 통해 소통해 소통할수록, 즉 매체를 통해 우리 자신을 감각하면 할수록, 매체를 거치지 않은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문외한이 되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기보다 우리 자신의 사용자에 불과하게 된다.

 

Photo by Luke Chesser on Unsplash
Photo by Luke Chesser on Unsplash

 

미국의 사회학자 셰리 터클은 “우리가 인터페이스의 가치를 기준으로 사물을 대하도록 배워왔다”라고 말한다. 내부 동력이나 기제를 파악하지 않고도 다룰 수 있는 인터페이스, 즉 사용자 환경에 익숙해짐으로써 해당 인터페이스를 벗어나서도 심층적인 깊이를 추구하기보다는 표면적인 모습이 보여주는 가치를 보다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5) 즉 인터페이스를 벗어나더라도 그와 동일한 메타포가 우리의 삶 전체에, 나아가 사회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헝가리 출신의 사회학자 프랭크 푸레디는 오늘날의 대중문화가 “누구나 언제라도 소비”할 수 있도록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는 것과 같은 방식”이 되었다고 비판한다.6) 과거의 대중주의는 사회적 의제와 결합하고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역할이라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단지 참여와 상호작용 그 자체만이 유일한 목적이자 미덕이 되었다는 것이다. 푸레디의 진단은 표면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끊임없이 매개함으로써 매끄럽고 거슬리지 않는 ‘나 자신’의 표상을 무한히 생성하는 오늘날의 매체 환경에서 더욱 호소력을 갖는다.

그는 이처럼 대중에게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는 문화는 ‘아부하는 문화’에 다름 아니며, 문화가 유치해졌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대중이 스스로를 재발견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존재하는 문화는 고작해야 강박관념과 내적 지향의 분위기를 촉진”할 뿐이다. “개인적 가치와 보편적 가치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도 없는” 이러한 상태는 “유치한 상태”7)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되는 사회,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이 소비되고 막대한 가치를 부여받는 사회를 살고 있다. 세계가 예능의 화면처럼 피상적이고 표면적이 되어감에 따라 우리 자신 또한 그렇게 되어간다. 영원히 매끄럽고 동일한 표면으로서의 인간, 각각이 단일하고 닫혀 있으나 타자와 동일하게 반응하고 표상하고 작동하는 모나드와 같은 인간 말이다. 그 심층을 깊이 들여다보거나 헤아려볼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 표면적인 것이 절대적인 가치를 얻고 그것에 대한 감각과 인식이 지배적으로 될수록 사실상 그것의 심층은 사라져가게 된다. 표면이 현실이자 실재이고 심층은 가상이자 허위가 되는 것이다. 예능이 일상이 되고 일상이 예능이 되는 현실은 연출된 즐거움의 이면에 이 놀라운 전도를 고정하고 영원히 반복되게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소비하고 다시 그 이미지에 어울리는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포스트모던 시시포스’로서 영원불멸할 것이다.

 

 

1) 심혜련, 『아우라의 진화』, 이학사, 2017, 280쪽 참조.

2) 노르베르트 볼츠(김태옥‧이승협 옮김), 『미디어란 무엇인가』, 한울, 2011, 72쪽.

3) 제이 데이비드 볼터, 리처드 그루신(이재현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91쪽 참조.

4)  노르베르트 볼츠, 같은 책, 212쪽.

5) 같은 책, 189쪽 참조.

6) 프랭크 퓨레디(정병선 옮김),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청어람미디어, 2005, 146쪽.

7) 같은 책, 211쪽.

 

 

글 : 이은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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