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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통치자를 기다리는 좀비: ‘K’ 좀비의 익숙함과 보수성에 대해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통치자를 기다리는 좀비: ‘K’ 좀비의 익숙함과 보수성에 대해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0.09.21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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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와 홍련은 자신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려 고을 부사(府使) 앞에 나타난다. 자신을 죽게 한 계모 허 씨와 그의 아들 장쇠에게 달려들거나 괴롭히는 것은 장화와 홍련이 세울 수 있는 계획이 아니다. 장화를 죽게 한 장쇠의 두 귀와 팔다리를 물어 뜯어 처벌한 것은 호랑이, 그리고 최후에 계모 허 씨를 능지처참하고 장쇠를 교수형에 처한 것은 부사의 결정이었다. 이 같은 『장화홍련전』 속 장화와 홍련의 행동은 많은 것을 함의한다. 여귀들이 할 수 있던 것은 애초에 읍소(泣訴) 정도로 억울함 대한 판단과 처벌은 하늘과 법의 몫일 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장화홍련전』을 쉽게 공포 서사의 시초로 놓지만 이 작품은 억울한 일을 관(官)에 호소하여 해결하는 내용을 담은 공안류(公案類) 소설의 대표작이라는 점에서 장화와 홍련의 역할을 짐작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화홍련전』이 쉽게 공포 서사로 인식된 것은 결국 장화와 홍련이 귀(鬼)라는 존재로 부사 앞에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 이들의 형상이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귀신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는 점은 그리 중요치 않다. 장화는 사망 후 자신을 그리워할 동생 홍련을 만나기 위해 황룡을 타고 이승으로 왔고, 부사에게 자신들의 억울함을 고한 후 청학을 타로 하늘로 올라가 오히려 신선과 유사한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그들은 사망한 이들이었기에 쉽게 귀기(鬼氣)와 연결되었다. 특히 <월하의 공동묘지>(1967)에서 원귀(冤鬼)가 한국 공포영화의 중심을 차지한 후 비련의 <장화홍련전>(1962)은 소복을 입은 장화와 홍련을 내세운 <장화홍련전>(1972)으로 변화했고 이후 <장화,홍련>(2003)에서 강력하게 공포와 결합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은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해하기보다 나타나는 정도였고, 자신과 유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대리자 혹은 그것을 해결해 줄만 한 절대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며 대리 복수하려는 성향은 떨쳐내지 않았다.

 

갑작스레 『장화홍련전』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이 원귀(冤鬼)와 관(關)의 결합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의 원형이 ‘K’ 좀비로 부각 되는 새로운 괴물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외형이나 공격력, 전염성 등의 특징에서 귀신과 좀비는 분명하게 구분되지만, 애초에 좀비라는 괴물이 발을 딛고 있는 상상력은 귀신에게서 그리 멀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통치자가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공안류 작품의 중심 모티프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사극형 좀비 영화에서 매우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이미 사망한/감염된 이들은 어쩔 수 없지만 원인을 제공한 이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바라고, 그것을 실현시켜 줄 이는 당대의 부패한 정권과는 분명하게 거리를 둔 세자들이라는 점은 백성들이 믿고자 하는 관(官)의 형상을, 그리고 이를 통한 해결의 바람을 보여준다.

서양의 좀비 영화에서 국가가 부각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생존자들이 온갖 고생을 하고 몇 명 남지 않은 최후의 순간, 군대로 형상화되는 구조대의 모습이 한 발 늦어버린 국가를 잠시 지시할 뿐이다. 모든 일을 겪은 후에야 만날 수 있는 이 보호시설들은 사실상 영화의 종료를 알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좀비 바이러스의 시작 자체가 그리 자세하게 그려지지 않을뿐더러 그것은 국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를, 혹은 (분노 바이러스와 같이)굉장히 범박한 바이러스의 유출이 좀비 탄생의 시작을 알릴 뿐, 의도를 가진 확산을 상상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 바이러스가 왜 창궐했는지 밝히는 것은 그리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좀비의 특징을 파악해 그들을 피하거나 죽인 후 살아남는 것 뿐이다. 한국에서 좀비가 메인 스트림으로 올라와 재난영화의 형태로 성공을 거둔 것은 이러한 익숙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결과였다. <부산행> 이후 ‘K’좀비라는 용어가 부각 되었지만, 사실 이는 특별하게 의미를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밀폐된 공간이라는 설정이나 좀비의 개별적 움직임이 정교해졌다는 것과 같은 변화를 의미했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그 이후의 움직임이다. <부산행>의 성공 이후 좀비는 갑작스레 과거로 돌아간다. 그리고 명확하게 좀비의 시작을 설정한다. 좀비는 궁, 그러니까 권력의 문제와 결합하면서 명백하게 만들어지고 의도적인 확산이 전제된 전염체로 다시 태어난다. 여기에서부터 좀비는 통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그 답으로서 활용하기 좋은 괴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영화 <창궐>과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전염체를 중심에 둔다면 <물괴>까지도 매우 유사한 구조와 설정으로 좀비를 통해 통치를 이야기한다. 이 작품들에서 좀비는 권력을 잡으려는 이로 인해 죽은 자를 살리는 과정에서, 혹은 부패한 당대 정권을 뒤집기 위한 무기 교역의 과정에서 창궐한다. 이들이 죽은 자를 죽은 자로 두지 않는 것, 그리고 위험한 존재인 것을 알면서도 제거하지 않은 것은 권력을 잡으려는 탐욕에서 비롯된다. 궁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 바이러스는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배곯는 자들에게 빠르게 퍼져가기 시작한다.

<부산행>의 프리퀄인 <서울역>에서 한국의 메인 스트림으로 나아가는 좀비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면, <서울역>에 등장한 좀비 바이러스의 최초 감염체인 노숙자라는 표지는 매우 상징적이다. 누구도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 자, 어디에 누워있든, 숨을 쉬든 쉬지 않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자에게서 시작된 좀비 바이러스는 이후 왕의 손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에 살고 있던 조선 시대의 백성에게로 고스란히 옮겨가기 때문이다. <킹덤>에서 물리거나 피가 섞이는 것이 아닌 왕(좀비)에게 훼손된 이의 시신을 끓여 먹은 후 전염이 시작되는 것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굶주린 이들이 시신을 끓여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미천한 병자들에게서 시작된 전염을 막기 위해서는 이들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이려 노력하는, 기존의 정치와는 다르게 따뜻하고 포용력 있는 통치자가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좀비를 경유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가 바로 여기에서 명확해 진다.

 

이러한 시선은 사실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명량>이나 <변호인> 등이 그려왔던, 그래서 1000만 명을 넘긴 이들이 바라마지 않는 지도자에 대한 갈망, 통치자의 자격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순신’과 ‘송우석’이 주류에서 무시당하며 결국 승리의 상징이 되었던 것처럼, <창궐>의 ‘이청’과 <킹덤>의 ‘이창’은 좀비를 발화시킨 권력 다툼에 거리를 두면서도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하며 천천히 해결의 중심에 선다. 이청과 이창은 현재의 권력에 염증을 느끼며 왕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그럼에도 남들이 시기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두 작품에 동시에 등장하는 ‘육포’라는 기표는 그들이 극의 초반 백성의 배고픔에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는 점을 지시한다. 그리고 좀비들이 출현하는 순간, 그러니까 힘없는 백성들을 괴상한 전염병이 휩쓰는 순간 그들은 궁에 있는 이들과는 분명히 다르게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백성들이 괴물이 되어 자신들의 현실을 토해냈을 때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진중한 통치자에 대한 바람, 흥미롭게도 한국에서의 좀비 서사는 이 안에서 운용된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새로운 통치자를 원한다는 것은 결국 현실에 대한 명확한 거부임에도, 왕의 목을 물어뜯는대도 이상하지 않을 좀비들은 새로운 통치자를 기다리는 매우 보수적인 서사 안에서 얌전하게 머무른다. 백성들은 모이는 순간 외부적으로는 ‘폭도’가 되어버리면서도 약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만, 이 문제를 해결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사실상 장화와 홍련의 모습과 그리 멀어지지 않은 것이다. 저널에서 해외로의 진출의 성과와 상업적 성공을 상찬하며 남발했던 ‘K’ 좀비의 원형은 결국 한국 내 귀신의 서사에서 그리 멀어지지 않은, 매우 익숙한 변주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 K좀비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 서사는 관객들에게 그리 흥미로운 좀비 서사로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창궐>의 후반부, 쉽게 2016년의 촛불 집회를 떠오르게 하는 백성들의 궁 내 횃불 장면은 촌스러운 것이 되어버렸고, 설명적이고 궁궐 내 암투를 설명하는 데에 집중했던 <킹덤>의 시즌1은 시즌2에서 좀비와의 대결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면서야 좀비 서사의 기대감을 충족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이는 정치 서사가, 마치 장화와 홍련이 그랬던 것처럼, 괴물을 완벽한 외부자로 존재하는 것을 막는 것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완벽한 외부자로 존재할 때 괴물에게서 혹은 괴물을 제거하면서 느낄 수 있는 장르적 쾌감은 정치적 좀비 명백하게 희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K’좀비는 끊임없이 이 사이를 부유하며 새로운 좀비상(像)을 찾겠지만, 분명 이를 넘어섰을 때에야 새로운 장르적 컨벤션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역>(2016), <창궐>(2018)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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