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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의 문화톡톡] 충만한 사그라짐- 연극 <화전가>
[양근애의 문화톡톡] 충만한 사그라짐- 연극 <화전가>
  • 양근애(문화평론가)
  • 승인 2020.09.2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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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을 넘어 확장되는 보편성

1950년 4월 안동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70년이 지난 후 역사를 되짚어 볼 때, 1950년은 6월 25일부터 시작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이전의 시간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거나 6월 25일 이후를 위해 준비된 상황처럼 여겨진다. 물론 방금 쓴 이 문장은 여러 가지로 틀렸다. 지배담론에 의해 기록된 공식역사만 역사로 보는 관점은 이미 진부한 것이거니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사람들은 울고 웃고 먹고 마시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립극단 70주년 기념공연으로 올라간 <화전가>는 ‘국립’극단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관제적 성격과 ‘기념’이라는 정당성 확인을 위한 공식 행사의 틀에서 나온 것이지만, 거대역사를 슬쩍 비껴가면서도 역사와 역사성을 재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아름답고 훌륭한 시도로 기억될 만하다. 1950년 4월의 어느 하루를 택한 점도 의미심장하지만, 안동 어느 반촌(班村)을 공간으로 삼은 점이 낯설고도 놀랍다. 많은 문화예술이 그렇지만 특히 연극과 같은 공연예술은 극장과 그 밖의 인프라가 다 서울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어 지역을 포괄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역사회의 시민들이 극장 문화를 접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지만 연극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나 형식이 지향하는 ‘보편’이 수도권 중심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언어적 측면에서 보면, 연극에서 표준어 사용을 기본으로 하고 있고 방언의 사용은 제한적이거나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 인물에게 할애되는 것이 상례였다. ‘사투리를 쓰는 주인공’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면 서울 중심, 표준어 중심 상황에 익숙해졌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많은 매체에서 특정 지역어를 사용하는 인물이 특정 계층이나 계급으로 재현되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어 이외의 외국어를 쓰는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가 잦아지는 추세로 보면 서울 외 방언의 빈도수가 외국어의 빈도수와 비등하지 않나 생각될 정도이다. 전달의 경제성과 편리성을 고려한다면 표준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연극 언어가 가지고 있는 구술성을 염두에 둔다면 그동안 무대에서 발화되는 언어에 관한 상상력이 빈약했던 것은 아닌지 성찰해보게 된다.

<화전가>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풀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고 또 우리가 그 언어를 모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새삼스러운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연극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여성이 모두 안동말을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령에 따라, 거주지의 이동에 따라 조금씩 다른 정도로 사투리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섬세한 언어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낯선 안동 사투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극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는 점, 언어적 소통이란 진짜 소통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2시간 20분 동안 유려하게 흐르는 말을 듣고 보면서 어쩐지 이 느낌을 ‘시적 소통’이라 불러야할 것만 같았다.

연극 '화전가' 제공: (재) 국립극단
연극 '화전가' 제공: (재)국립극단

다가올 상흔을 견디는 힘

 

And all in war with Time for love of you,

시간이 앗아간 그 모든 것을,

As he takes from you, I engraft you new.

나 여기 다시 새기네, 그대를 위하여.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봉아가 ‘셰익스피어 소네트 15번’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연극의 첫 장면. 봉아의 고모 권씨는 시의 내용을 잘 모르면서도 슬픔을 느낀다. “맹 인생이 헛부고 헛부다는 말 아이래?”

아직 모든 것을 앗아간 ‘그 시간’은 도래하지 않았지만, 시간은 무정하고 인생은 ‘헛부고’ 덧없다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 삶의 모양은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空洞)의 우주로 의미화된다. 그 비어 있는 거대한 틈으로 언어로 다 말할 수 없는 의미가 쏟아져 들어온다. 안동 사투리의 뜻을 완전히 알아차리지 못해도 내용을 다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연극에 나오는 인물들은 자기 속내를 샅샅이 밝히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어루만진다.

연극은 김씨(예수정 分)의 환갑을 맞아 식구들이 다 모인 날의 이야기이다. 환갑잔치 대신 화전놀이를 가기로 한 후, 마침 그 전날이 경신일(庚申日)이라는 것을 알고 아무도 잠들지 않기로 한 식구들이 먹고 마시고 놀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제목은 ‘화전가’이지만 정작 화전놀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화전놀이 장면에 대한 기대감이 없지 않았지만 화전놀이 장면이 나오지 않아서 더 좋았다. 마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그런 화려한 꽃놀이의 시간이 아니라 전조(前兆)와 기미(幾微)의 시간이라는 듯, 연극은 다가올 미래가 불행이어도 삶이 불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박실이가 서울서 가져온 설탕과 커피를 나눠마시고 이웃에서 나눠준 안동소주를 마시며 모처럼 다 같이 모인 여인들의 목소리는 쉼 없이 맑게 굴러가지만 이따금씩 들려오는 총성과 으스러지는 빛은 1950년이라는 역사적 시간성을 자꾸만 상기시킨다. 이 대조와 대비가 마음을 아뜩하게 했다. 슬픔도 노여움도 서운함도 안타까움도 결국 저 어둠 속에 사그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 선연했던 기꺼운 웃음과 달콤한 눈물이 그 하루를 넘어, 온 생을 충만하게 하리라는 사실도 알 것 같다.

 

연극 '화전가' 제공: (재) 국립극단
연극 '화전가' 제공: (재)국립극단

극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삶은 누구 하나 녹록지 않다. 특히 부모도 모른 채 독골할매가 딸처럼 거두어 키운 홍다리댁이 풀어놓는 궤적은 여성의 삶이 얼마나 신산한지를 보여준다.

 

홍다리댁: 영천이 첫서방은 사램은 좋은데 술 잘 먹드이 이태 만에 술로 가뿌고, 그러이 포항으로 개가를 했그덩? 그거는 가다끔 주 패는 거 말고는 괘않았는데, 그것도 시 해만에 바다이 가뿌고. 셋째 부산 서방은 징용 끌리가 패뿌고, 그쯤 되이 서방질도 안 지겹드나? 그래 인자는 고만이다 카고 어애어애 떠돌다보이 김천 여관집에 가 있는데, 이놈으 영감이 들러붙는 게래. 그기 넷째라. 이거는 장사꾸인데 속을 알고 보만 순 모리꾼, 도독놈이 제. 어애 수완은 좋은동 돈은 잘 버이 가는 디마동 첩을 하나썩 두고 그랬는 모양이래. 머 살기도 폭폭한데 살림 차리준다 카이, 난도 모리겠다, 및 해 그러고 살았는데, 얼매 전에 본처가 안 찾아왔드나. 히히. 와가 패악질을 하드이 나종에는 울고불고 비는데, 마 이거는 사람으로 모할 짓이따 숲어가 탁 털어뿌고 왔다.

 

시대적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아홉 명의 여성들은 ‘서방’에 의해 길이 정해지는 인생을 산다. 남편의 성을 따라 ‘금실이’, ‘박실이’라고 불리는 딸들도 그렇고, 남편이 죽고도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하는 장림댁과 투옥된 남편을 기다리는 만삭의 아내 영주댁에게도 자신 위주의 삶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그늘 아래에 놓인 여성의 삶이 우선이었다. <화전가>는 그런 여성들의 삶을 재단하지도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도 않는다. 각자의 고단한 삶을 버텨온 것만으로 서로 의지가 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답게 보여준다. 그 정다운 모습이 슬프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갸륵하기도 하니,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면면에는 이런 마음들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각자의 사연과 자기 몫의 상처를 끌어 안고 사는 여성들 중에서 중심을 잡고있는 것은 김씨다. 김씨는 시집가서 일주일만에 남편을 잃은 시누이 권씨에게 농을 칠 정도로(권씨: 울 오라배 친구분 중에 한분 있었다. 가다끔 오빠캉 집이도 놀러오시고./ 김씨: 오창현 씨?/ 권씨: (말문이 막히고 얼굴이 붉어진다.)/ 김씨: 인물 좋고 똑똑코. 옥골선풍이라.)

재치 있는 올케이기도 하고 다른 성격을 가진 세 딸들의 성정에 맞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살가운 어머니이며 큰며느리 장림댁에게 ‘납닥생냉이’로 지은 치마와 가락지를 건네주며 친정으로 돌려보낼 정도로 사려 깊은 어른이다. 사투리 연기를 처음 한다는 예수정 배우는 인자하면서도 포용력 강한 김씨 역할을 풍부하게 그려냈다. 아홉 명 배우들의 마음이 달고도 쓰게 풀어지는데는 김씨의 넉넉한 품이 한몫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연극 '화전가' 제공: (재) 국립극단
연극 '화전가' 제공: (재)국립극단

김씨가 큰 며느리와 같이 큰아들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가 바위에 앉아 김씨에게만 들리는 종소리를 듣는 장면이 있다. “어애 저런 소리가 있을로… 이생에 소리는 아닐따.”, “반쯤은 이생을 나가 있으이, 그 얼매나 쓸쓸하노? 그러이 이런 소리가 나는 게래.” 어쩌면 연극적 묘미는 이런 장면에 있는 것이 아닐까.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어떤 초월적 순간. 역사적 상흔은 객관적 실체로 엄연하지만 그 역사를 만든 사람들은 피가 살이 흐르는 마음의 존재라는 것. 그 사람들이 상처로 가득한 삶을 견뎌낼 수 있었던 힘을 비추는 것이 연극의 소임이 아닐까 싶다. 먼 데서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아득하고 은은하며 멀리 퍼지는 충만함이 있다면 사그라지는 일도 죽음과 폐허를 넘어선 삶의 지속일 것이다.

 

*사족: 코로나19로 인해 2월로 예정되어 있던 <화전가> 공연이 연기되었다가 8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했지만 다시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8월 23일까지로 예정된 극이 17일 조기 폐막하게 되었다. <화전가> 공연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요원하여 아쉬운 분들은 2월에 발간된 희곡 『화전가』를 읽어보시기를. 우리말의 말맛을 느낄 수 있거니와 역사적 시공간에 대한 배삼식 작가의 통찰력을 확인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양근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극작, 드라마터그, 평론을 병행하며 극 창작에 참여. 2016년 방송평론상 수상. 기억과 역사의 길항 및 문화의 정치성 수행성에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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