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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발헨 호수의 비밀> - 여성가족사의 순환리듬
[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발헨 호수의 비밀> - 여성가족사의 순환리듬
  • 이승민(영화평론가)
  • 승인 2020.10.12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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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헨 호수의 비밀> (원제는 Walchensee Forever)은 100여년간 발헨 호수에서 카페를 하고 있는 여성 가족사를 담는다. 손녀인 감독 아냐 지 원더스는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인터뷰하면서 외조모,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이모의 인생을 풀어낸다. 발헨 호수에 터를 두고 4대를 살아가는 네 여성의 삶을 여성 당사자의 관점으로 풀어낸 것이다. <안토니아스 라인>(1995, 마를린 고리스)의 다큐멘터리 버전인 셈이다. <안토니아스 라인>이 극적 사건 중심으로 여성의 연대를 풀어냈다면, <발헨 호수의 비밀>은 실존하는 여성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중심으로 세월의 유연함과 인생을 기술한다.

 

카메라 앞에 요정 분장을 한 어린 딸이 등장한다. 그녀는 카메라 뒤 어머니의 질문에 답한다. 그리고 딸과 어머니가 서로 자리를 바꾸고, 시간이 흘러 어머니가 감독이 된 딸의 카메라 앞에 들어온다. 이어 나이든 현재 외할머니가 카메라 앞에 앉아있다. 한 순간에 영화에 빠져들게 하는 놀라운 오프닝이다. 카메라는 딸에서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로 이어가면서 어머니가 딸을, 딸이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담는다. 단순한 기록 장치가 아닌 것이다. 카메라는 인물들 사이를 이어내는 소통의 매개이자 카메라 앞뒤의 자리 교차를 통해 세대 간의 교체와 흐름을 구축한다. 무엇보다 개인사와 역사가 교차하는 기억의 터이기도 하다. 영화는 카메라를 사이에 둔 인터뷰 뿐 아니라 가족사를 기록한 다양한 카메라의 이미지를 재배치해, 개인사에서 가족사 그 속에 시대사를 기입한다. 

영화는 현재 발헴 호수에 살고 있는 세 여성의 기억을 카메라를 사이에 둔 인터뷰 방식으로 풀어낸다. 기억은 글과 영상과 사진을 동반한다. 감독의 이모이자 어머니의 여동생 프라우크의 일기와 감독의 어머니가 찍은 가족들의 사진과 홈무비 형식의 영상이 그들이다. 이들 기록물은 사적인 동시에 여성 당사자의 기록물이다. 기록물은 보통 사건과 말의 증거로 기능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기억을 촉발하는 도구이자 더 사적이고 더 내밀하게 다가가는 친밀한 촉매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뷰 사이사이 글과 사진과 영상의 힘은 대단히 강렬하다. 홈무비로 찍은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 사진을 전공한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찍은 수천 장의 일상 사진, 글로 자신을 표현한 이모의 일기는 담고 있는 내용 보다 매체 그 자체로 네 여성들의 삶을 대변한다. 강렬한 “품크툼의 향연”인 셈이다.

 

인물의 인터뷰 역시 유사하다. 기억을 연대기적으로 풀어내고 있지만 카메라 앞 그들은 말의 내용 만큼이나 말하는 얼굴과 표정이 많은 것을 내포한다. 다시 오프닝 장면으로 돌아가면, 영화는 순수한 표정으로 카메라(뒤 어머니)를 대하는 어린 감독의 표정에서 젊은 시절 어머니 얼굴과 이어지는 나이든 어머니 모습, 그리고 검버섯 가득한 외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은 말과 설명이 필요 없는 순간이다. 인간의 생애주기를 연상하도록 유도하는 장면 배치인 동시에 세월과 세대를 즉각적으로 감각하게 한다. 이때 카메라는 인물들 간의 시간의 틈을 메우고, 카메라 앞 여성들의 얼굴은 그 자체로 진솔한 역사가 된다. 

인상적인 얼굴 장면이 있다. 외조모에서부터 내려오던 가족사가 마침내 감독이 태어난 시점에 이르자, 이제 감독이 카메라 앞에 앉아 자신의 기억을 풀어낸다. 그리고 영화는 세 여자의 현재 일상으로 넘어온다. 1960년대 뜨거운 북미유럽의 시간을 온몸으로 경험한 어머니는 이제 발헨 호수 카페를 이어받고, 외할머니는 104세가 되었다. 감독은 외할머니에게 얼마 전에 함께 찍은 뮤직비디오를 보여준다. 외할머니의 얼굴이 가득찬 영상은 그녀의 나이듦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뮤직 비디오 마지막에 이르러 외할머니는 머리를 풀고 틀니를 빼고 화장을 지우고 환하게 웃는다. 좀체 스크린에서 마주할 수 없었던 나이든 여성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영화는 1920년대부터 1960년대, 1980년대 그리고 2020년 현재까지 4세대를 가로지른 여성 가족사를 기록하고 있지만, 과거사에 초점을 맞춘 기억과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순환의 시간을 담고 있다.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고 다시 태어남이 있는 자연의 흐름 속에서 이들 여성들은 자신의 시간을 살아낸다. 이는 영화 후반부에 세 여자가 마지막으로 한 화면에 잡히는 장면에서 응축된다. 화면은 “시간이 흐르면서 몸에서 뭔가가 자꾸 빠져나가 사라질 거” 같이 작아진 외할머니를 가운데 두고 나이든 어머니와 장성한 딸이 함께 호수를 보고 앉아있다. 시간의 이미지를 영화 속 여성들이 대면하고, 그런 그녀들을 관객이 바라보게 한다. 

 

불과 얼마 전 까지 스크린에서 나이든 여자는 할머니 그 자체이거나 향수어린 어머니로만 존재했다. 그렇기에 세월을 품고 살아온 자기의 경험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여성의 모습은 언제나 반갑다. 더구나 그런 여성들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역사쓰기를 할 때는 묘한 희망까지 일깨운다. <발헨 호수의 비밀>은 치우치는 감정 없이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얼굴과 감정으로 자신과 가족사를 풀어낸다. 삶과 죽음 그리고 세월의 흐름을 긍정하면서 무엇보다 내면의 힘을 믿으면서 말이다. 

영화는 올 초 베를린 국제 영화제 수상작이며, EBS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EIDF) 상영작이다. 다가오는 10월 16일-10월 19일 EIDF 2020 특별상영회에서 관람가능하다.

 

사진출처: 네이버, EIDF D-BOX 

글: 이승민

영화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로 활동,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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