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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가 만든 신자유주의 ‘신화’들
이건희가 만든 신자유주의 ‘신화’들
  • 성일권 l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0.10.30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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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드의 집>, 2020 - 저스틴 스미스

흔히 고전적 담론은 상식을 파괴하는 ‘포스트모던 담론’에 의해 비웃음을 사곤 한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기반한 경제학도 예외가 아니다.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이들은 규제완화, 창조적 파괴, 혁신, 천재론을 예찬하며 고전경제학의 합리주의적 고리타분함을 비웃는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1,001마리의 소떼를 몰고서 휴전선을 넘어 남북경협의 물꼬를 튼 것을 두고 기 소르망이 ‘포스트모던적 전위예술’이라고 극찬했듯, ‘1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이른바 ‘천재론’은 그의 사후에 많은 경제평론가들로부터 초일류기업 삼성의 성공신화를 이끈 현자(賢者)의 경구로 격찬 받아왔다. 

흔히 이건희 회장을 일컬어 ‘은둔형 천재 CEO’라고 칭송한다. 그가 1993년 ‘프랑크푸르트선언’에서 임직원들에게 했던 발언, “처자식만 빼고 모두 다 바꿔라”는 삼성의 운명을 바꾼 신경영 선언으로 평가받았고, 실제로 선택과 집중, 인재 및 품질중시를 표준으로 삼은 그의 경영관은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되다시피 했다. 

노무현 정권은 삼성의 경영철학을 제시한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들을 주요정책의 참고문헌으로 취했고, 취업난에 허덕이는 수만여 명의 대학생들은 취업하기도 전에 삼성이 제시한 직무시험 준비를 통해 삼성형 인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여타 기업들은 삼성을 본받고자 노력하며 닮은꼴이 돼갔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삼성의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삼성은 돈을 앞세워 정치권, 법조계, 언론계, 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들에게 불리한 여론은 잠재우고, 자신들의 ‘성공’은 부풀리고 조작하며 홍보함으로써, 마침내 아무도 감히 거스르기 힘든 ‘신화’로 만들어버렸다.  

삼성의 ‘신화’는 곧 신자유주의의 ‘신화’이기도 하다. 삼성을 기점으로 한 재벌들이 내세운 전략은 50년 전, 미싱공 전태일에게 부과된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식의 대중적 신화가 아닌, 노동자의 정체성을 소수 엘리트의 자부심으로 치환하는 이른바 ‘객체와 주체의 동일시 신화’다. 그로 인해 ‘유사 주체’가 된 노동자들은 ‘스무 고개 넘기’식 채용과정을 거치며 스스로 ‘선택받은 인재’로 여긴다. 그리고 자기도취와 자기과시에 빠져 선택받은 대가에 따른 ‘자발적 순종’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선택받은’ 노동자들은 엘리티즘의 노예가 돼 같은 업종에서 일하고 같은 제품을 생산하며, 같은 시간 일하는, ‘선택받지 못한’ 하청업체 노동자들보다 2~3배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이를 당연한 권리로 여긴다.

또한 노동자들은 재벌이나 재벌 2,3세의 독점적 철학인 기업가 정신의 신화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며, 스톡옵션과 ‘빚투 창업’에 매몰돼 노동자 본연의 정체성을 상실한다. 이들 노동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가장 위험한 신화는 ‘평가의 신화’다. 이제 노동자들의 가치는 개인들의 근본적인 개성과 장점이 아니라 동료들과 고객들이 부여하는 대면 평가와 온라인 평가에 달려있으며, 제로섬식 성과급제로 인해 동료가 과로사하더라도 이를 슬퍼할 여유가 없게 됐다.  

 한국 자본주의에 굵직한 ‘신화들’을 남기고 떠난 고인(故人)을 기리는 조문객들의 조화에서 ‘선택받은’ 재벌 노동자들의 깔끔한 옷차림,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긴 한숨, 그리고 온라인 비대면 시대에 로봇처럼 일하다가 쓰러져 나간 택배노동자들의 죽음이 겹친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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