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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수로부인 설화’로 본 <괴물>과 <나쁜 남자>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수로부인 설화’로 본 <괴물>과 <나쁜 남자>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0.11.2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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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는 0부터 9까지 열 개다. 그런데 이 숫자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서사물의 모티브를 아라비아 숫자에 비유할 수 있다. 영화를 포함한 서사물 속 모티브의 내용과 종류는 제한적이다. 하지만 모티브의 변주와 조합에 따라서 작품의 주제, 성격 등이 매우 달라진다.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2002)와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이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이정범 감독의 <아저씨>(2010)도 <괴물>과 같은 유형에 속한다. 이들 영화에는 ‘괴물의 여신 납치’라는 동일한 모티브가 내재돼 있다. 서사 전개 과정도 유사하다. 하지만 결말은 완전히 다르다. 이 차이는 대중들의 영화 수용 방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나쁜 남자>는 29만 명을 기록한 반면 <괴물>과 <아저씨>는 각각 1302만 명, 668만 명을 동원했다.

「수로부인」 설화는 ‘납치/구출’ 모티브의 원형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우리나라 서사물 중에서 사건 발생 연도와 문서로 기록된 시기가 가장 오래 됐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수록하기까지 500년 이상 민간에 전승됐다. 대중들의 흥미를 끄는 요소가 다수 포함돼 있다는 방증이다. 「수로부인」 설화에 포함된 ‘납치/구출’ 모티브는 다수의 영화에도 내재돼 있으며, 대중성을 구현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다. 이 설화는 수로부인이 신라 성덕왕(702-737) 때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남편 순정공과 함께 길을 가던 도중 동해 바닷가에서 겪은 사건으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바위 절벽에 핀 꽃을 꺾어와 수로부인에게 바쳤다는 내용이다. 그 노인이 꽃과 함께 바친 노래가 ‘헌화가’다. ‘납치/구출’ 모티브가 내재된 부분은 두 번째 이야기이다.

 

'괴물' 스틸컷.
'괴물' 스틸컷.
'나쁜 남자' 포스터.
'나쁜 남자' 포스터.

「수로부인」 설화의 두 번째 이야기는 ‘수로부인 피랍-노인의 조언-동해용 협박-수로부인 귀환’으로 요약된다. 수로부인이 동해용에게 납치당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그런데 수로부인은 백성들이 ‘해가’를 지어 부르고 지팡이로 강 언덕을 두드리며 협박한 덕분에 무사히 돌아온다. <나쁜 남자>는 ‘사창가 깡패인 한기가 여대생 선화를 납치하여 창녀로 만들고, 결국 포주와 창녀 관계가 되어 유랑한다.’는 내용이다. <나쁜 남자>의 서사는 ‘선화 피랍-선화의 탈출 시도-탈출 실패-창녀 생활-한기의 선화 방면(放免)-선화의 사창가 복귀-지하세계 유랑’으로 요약된다. <괴물>은 ‘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강두가 돌연변이 괴물에게 납치당한 중학생 딸 현서를 구출한다’는 내용이다. <괴물>의 서사는 ‘현서 피랍-구출 작전 시도-현서의 탈출 노력-탈출 실패-현서의 죽음-괴물 제거-세주 귀환’으로 정리할 수 있다.

「수로부인」 설화에서 수로부인과 동해용은 ‘여신/괴물’, ‘납치당한 자/납치한 자’, ‘여성/남성’의 구도이다. <나쁜 남자>에서 선화는 여신, 한기는 지하세계 괴물에 해당된다. ‘순결한 여대생/사창가 깡패’ 구도다. 조력자가 없다는 점은 다르다. <괴물>에서는 현서가 여신, 한강에 서식하는 돌연변이 파충류는 지하세계 괴물에 해당한다. 이들 역시 ‘여신/괴물’의 대립 관계이며, ‘납치당한 자/납치한 자’, ‘여성/남성’의 갈등 구도다. 현서 대신에 세주가 귀환해 강두와 유사가족을 형성한다는 점은 변형된 요소다.

이처럼 영화 <나쁜 남자>와 <괴물>은 ‘납치/구출’ 모티브가 내재된 서사물의 많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은 차이가 있다. 우선 이야기 전개 방식이 다르다. <괴물>은 대중영화답게 선형적이다. 상업영화나 할리우드 영화의 80%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전개하는 내러티브 구성을 하고 있다(이정국, 『시나리오 창작 기법』, 상상공방, 2007, 64~66쪽.)는 점과 일치한다. 반면 <나쁜 남자>는 비선형적이다.

 

'괴물' 스틸컷.
'괴물' 스틸컷.
'나쁜 남자' 스틸컷.

<나쁜 남자>와 <괴물>은 결말과 갈등 구도 역시 대조적이다. <괴물>의 갈등은 돌연변이 괴물로 인해 발생하고, 결말에서는 주인공이 괴물을 제거한다. 강두와 일가족의 구출 작전은 스펙터클한 액션을 통해 구현되며, 이로 인해 강두는 ‘행동하는 영웅’이 된다. 「수로부인」 설화에서 순정공과 백성들이 동해용을 협박하고, 지팡이로 땅을 치는 등의 적극적인 행동을 한 점과 유사하다. <나쁜 남자>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선화와 한기는 함께 트럭을 타고 다니는 관계가 된다. 갈등 내용은 내면적이다. 최초의 갈등은 한기가 선화를 납치해 창녀로 만든 데서 시작되지만, 영화는 선화와 한기의 관계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인물의 활동성은 미약할 수밖에 없다.

‘납치/구출’ 모티브가 내재된 영화에서 납치당한 인물들은 대개 여신 혹은 여신과 다름없는 고귀한 존재들이다. 수로부인은 최상류층 인물이다. 귀족이면서 왕의 신임을 받는 고위 관료의 아내다. 또한 “수로부인은 절세미인이어서 깊은 산이나 큰 못가를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에게 빼앗겼다”는 기록은 수로부인의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납치/구출’ 모티브에서 인물의 성격은 사회적인 신분보다 서사 안에서 갖는 위상 및 역할과 더 관련이 깊다.

<나쁜 남자>에서 선화는 도심의 벤치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때 흰 옷을 입은 선화의 자태는 청순하고 고결하다. 더 중요한 점은 한기가 선화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사창가 깡패인 한기의 입장에서 보면, 선화는 여신과 다름없는 존재다. “여대생 한 번 사귀어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한기 부하의 대사는 한기에게 적용해도 무리가 없다. 청초하고 순결한 미술 전공 여대생은 사창가 깡패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며, 여신처럼 우러러보이는 존재인 것이다. <괴물>의 현서는 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소시민 가족의 외동딸이다. 현서의 가정환경은 비정상적이고 열악하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환경은 거꾸로 현서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시켜주는 조건이 된다. 현서는 강두에게 여신과 다름없는 존재다. 즉 수로부인과 선화, 현서는 고귀한 여신 혹은 여신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조력자는 영화의 서사 전개, 구출 및 귀환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다. 수로부인, 현서와 달리 선화에게는 조력자가 없다. <나쁜 남자>에는 선화의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선화의 대학생 남자친구 역시 선화를 구출하려는 의지나 능력이 없는 존재다. 따라서 선화는 지상세계에서는 고귀한 여신이 아니다. <괴물>의 서사는 조력자인 가족들이 현서를 구출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진다. 현서를 구출하는 방법이나 귀환 여부에 서사가 집중되면서 선악 갈등이 첨예화되고, 따라서 긴장감도 고조된다. 이와 달리 <나쁜 남자>는 선화가 사창가에서 생활하는 모습, 선화와 한기의 미묘한 관계 변화가 서사의 중심을 이루면서 정적으로 전개된다.

 

'나쁜 남자' 스틸컷.
'나쁜 남자' 스틸컷.

‘납치/구출’ 모티브의 서사물에서 납치당한 인물은 대부분 일상세계로 귀환한다. 지하세계 괴물에게 납치당함으로써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후 조력자의 도움으로 지상으로 돌아와 새 생명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괴물>에서는 현서 대신 세주의 귀환으로 대체된다. 초반에 강두와 현서가 매점 안에서 식사하는 장면과 결말에서 강두가 세주와 마주앉아서 밥을 먹는 장면은 대구를 이룬다. <나쁜 남자>에서는 납치당한 여신이 귀환하지 않는다. 선화의 ‘지하세계의 삶’이 계속된다. 봄이 되면 곡물과 식물이 다시 살아나고, 하늘의 달이 그믐을 지나면 초승달로 뜨는 자연계의 보편적인 이치를 거스른 삶이다. 재생과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괴물>과 <나쁜 남자>의 결말은 대조적이다. 강두는 복수에 성공하고, 납치당했던 여신은 귀환하고, 돌연변이 괴물은 처벌받는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결말이다. <나쁜 남자>에서 선화는 지상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지하세계에 계속 머무른다. 선화는 한기가 운전하는 트럭을 타고 다니는 지하세계의 떠돌이 창녀로 남는다. 그래서 <나쁜 남자>는 괴물에 대한 처벌과 복수가 이뤄지지 않은 채 갈등이 봉합된다.

「수로부인」 설화에 나타난 것처럼, ‘납치/구출’ 모티브가 내재된 서사물에서 권선징악은 보편적인 요소이다. <괴물>은 여기에 시의성 있는 정치사회적 상황을 도입해 변화를 모색한다. 주한미군, 경제개발과 근대화 등의 문제를 도입한다. 동시대의 사회문제를 통해 관객들의 관심과 몰입을 유도함으로써 권선징악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그래서 강두의 행위는 사적 복수인 동시에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공적인 의미까지 획득한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와 동시대의 정치사회적 함의를 통해 대중들에게 대리만족을 제공한다. 반면 <나쁜 남자>는 ‘납치/구출’ 모티브라는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수용하되, 감독의 개성과 세계관을 강조한다.

 

'괴물' 스틸컷.
'괴물' 스틸컷.

이러한 특성은 복수의 카타르시스 측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괴물>에서 강두 일가족은 힘을 합쳐 돌연변이 괴물을 죽임으로써 복수를 완성한다. 현서의 삼촌 남일은 괴물에게 화염병을 던지고, 양궁선수인 고모 남주는 휘발유를 뒤집어쓴 괴물에게 화살을 쏘아 불태우고, 강두는 쇠파이프를 휘둘러 복수를 마무리한다. <괴물>의 이 장면은 “네 만약 거역하고 내다 바치지 않으면/그물을 쳐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는 「수로부인」 설화 속 ‘해가’의 구절이 실제로 구현된 것이다. 돌연변이 괴물은 현서를 산 채로 내놓으라는 요구를 거절한 대가로 불에 타서 죽는 처벌을 받고, 관객들은 이를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나쁜 남자>에서는 괴물인 한기가 처벌받지 않는다.

<괴물>은 상업영화로서 원형에 해당하는「수로부인」 설화의 스토리텔링과 인물, 주제, 결말 등 주요 특성을 대부분 계승하고 있다. 조력자, 구출과 재생, 권선징악과 카타르시스 요소 등을 공유한다. 여기에 시의성 있는 정치사회적 소재를 도입해 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요소들은 <괴물>이 대중성을 확보하는 요인이 된다. <나쁜 남자>는 납치/구출’ 모티브만 수용했을 뿐 스토리텔링이나 인물, 주제, 결말과 같은 주요 특성은 배제한다. 조력자, 구출과 재생, 권선징악과 카타르시스 요소는 물론 정치사회적 소재도 포함돼 있지 않다. 이를 통해서 영화가 신화나 설화의 모티브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익숙한 형식’과 ‘변화의 묘미’를 조화시키는 것은 대중성 확보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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