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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를 보며 여자를 생각하다 IV <69세>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를 보며 여자를 생각하다 IV <69세>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0.12.2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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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서의 삶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여성을 중심 서사로 하는 영화가 주로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면 <69세>는 노인 여성을 중심에 둔 영화다. 특히 성폭력을 다룬 영화중에서 노인에 대한 성폭력을 다룬 영화는 전무했다. 그래서 성폭행을 다룬 대표적인 한국 영화인 <한공주>와는 또 다른 결을 가진다. <69세>는 최초로 노인 성폭행을 다룬 영화답게 노인 성폭행이 발생한 뒤 작동되는 사회 시스템의 현주소와 노인 성폭행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1)

 

영화는 불과 얼마 전인 2012년에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2010년에 제정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막 시작한 시점으로 개정될 여지가 많을 때였다. 이 법은 지금까지 10년 동안 20여 차례 개정을 거치면서 보완이 이뤄지고 있지만, 데이트 폭력이나 아동 폭력에 대한 시선만 많이 보일 뿐, 빈번하게 발생하는 노인 대상 성범죄는 아직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고령화 현상이 심화하면서 노인 대상 성범죄도 4년 새 50%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2) 그러나 아직도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은 애써 못 본 척하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척하는 분위기다.

69세, 효정(예수정)은 작은 책방을 하는 동인(기주봉)과 동거를 하고 있다. 효정은 수영을 하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지만, 다리가 불편해져 물리치료를 받던 중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긴 고민 끝에 동거 중인 동인에게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신고한다. 하지만 경찰과 주변 사람 모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효정을 치매 환자로 매도하고, 법원 역시 나이 차이를 근거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당신은 69세, 성폭행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효정이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굳이 화면으로 보여주지 않고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로만 들려줌으로써 관객에게는 시각적 불쾌함을 줄이고, 피해자의 공포감은 더욱 확대해서 느낄 수 있게 연출되어 있다. 이 장면이 가지는 또 다른 효과는 성폭행 장면을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폭력을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이 60대 여성이 20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사건 현장을 본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녀를 믿겠는가?

 

 

효정이 경찰에 성폭행 사건을 신고한 뒤 오히려 편견 어린 시선들만 쏟아질 뿐 고통은 고스란히 피해자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던 효정은 이 싸움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피의자는 줄곧 발뺌으로 일관하고, “친절이 과했네.” “멀쩡하게 생겨서 뭐가 아쉬워서 그랬을까?”라는 말로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 경찰조차 어이없는 2차 가해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사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효정에게 돌아오는 건 의심으로 가득 찬 시선과 편견에 가득 찬 말뿐이었다. 젊은 남자는 합의하에 성관계를 한 건데 할머니가 치매가 있는지 기억을 못 하는 것 같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주위 사람들은 “조심 좀 하시지.”라는 말로 효정을 괴롭힌다. “뭘 어떻게 조심”하라는 건가. 주변 사람들의 경솔한 말들은 점점 더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다.

 

법원은 “개연성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한다. 개연성이란 29세의 남성이 69세의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약하다는 사회적 편견과 시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동인은 “억울한 사람이 있을 땐 어떻게 해서든지 그 억울함을 풀어줘야 되는 거 아니니?”라며 변호사인 아들에게 묻는다. 아들은  “그 아주머니가 억울한 게 확실해요?”라며 오히려 피해자인 효정을 의심한다. 노인을 위한 법정은 없고 세상마저 외면해버린 사건, 하지만 끝내 굴복할 수 없는 효정은 다시 힘겨운 걸음을 내디딘다.

 

노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피해자를 의심하게 한다

영화는 성폭행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피해자의 나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노년의 삶을 드러낸다. 노인 성폭행 문제를 해결하러 들어가 인격 살인을 하는 2차 가해를 당하면서 우리 사회가 노인에 대해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결국 치매 의혹마저 불거지자, 효정은 스스로 자신이 치매가 아닐까? 그날의 기억이 왜곡된 건 아닐까? 스스로도 수없이 자신을 돌아본다. 영화에서 자동차에 부딪힐 뻔한 효정도,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던 동인도 조금 더 젊은 사람에게 분리수거해야 할 노인 취급을 받는다. 노인에 대한 일상의 언어폭력이 만연하다.

노인이 남들 눈에는 살 만큼 살았다 싶지만, 여전히 살아있기에 생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루이즈 애런슨은 자신의 저서 『나이 듦에 관하여』에서 몸은 늙어 가지만 영혼은 절대 노화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법적 나이는 노인이지만 생리적 나이는 청춘일 수 있고, 성폭행은 60대라고 덜 아픈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영혼이 날아가는 일이다.

 

효정의 가장 큰 버팀목은 동인이다. 지금은 ‘책사랑’이라는 헌책방을 하는 동인은 한때 시인이었던 인물로 효정의 옆에서 위로해 주고 공감해 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런 그마저도 시간이 갈수록 치매기가 보이는 효정을 의심하더니 효정과 상의도 없이 가해자에게 자백하면 선처를 해 주겠다고 말한다.

깊이 이해한다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피해자를 위해 했던 말이나 행동이 어쩌면 피해자를 더 힘들게 만드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가까운 사람들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지만 듣는 사람은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더라도 상대가 그 말을 듣고 기분 나쁘다면 좋은 의도는 소용이 없다. 말이 잘 전달되지 않고 오해받았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그 말이 잘 전달되게 하는 게 사회적인 기술이고 사람에 대한 예의다. 

 

효정은 여자라는 이름과 노인이라는 이름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고소인이 젊은 여자였으면 그 사람이 구속됐을까요?” 여성에 대한 차별과 노인에 대한 편견, 이중고에 시달리는 노년 여성의 애환이 이 장면의 대화에 담겨 있다. “나이 들어서 옷 잘못 입고 다니면 무시하고 만만하게 봐서 치근대요. 이 정도 입고 다니면 제가 안전해 보입니까?”

 

69세, 효정이 당당하게 가해자를 응징하는 법

자신을 성폭행한 간호조무사는 효정에게 “늙은이가 내 인생 끝나는 꼴 보고 싶어?”라며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이 남성은 성폭행을 저지르기 전까지 다정한 모습으로 병원에서 친절 사원으로 불리던 사람이다. 그러다 치료를 받으러 온 효정에게 보호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상황을 이용해 성폭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고소를 당하자 경찰 앞에서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피해자 앞에서는 충혈된 두 눈으로 본모습을 숨기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신체적으로는 젊고 건강한 남성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다. “노인 여성을 무성적 존재로 보는 사회적 편견을 가해자가 노리고 도리어 노인 여성을 타깃으로 삼는다. 신고해도 믿어주지도 않고, 알아도 대단치 않게 생각한다.” <69세>를 제작하게 된 계기라고 임선애 감독은 말한다. 범죄를 저지른 그를 젊다는 이유로 세상에 활보하게 두어야 옳은가, 노년의 삶이란 그저 눈 감고 입 다물고 움츠리고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효정은 조곤조곤하지만 강직한 말투로 대답한다. 인생은 그리 쉽게 끝나는 게 아니라고 자신의 모든 잘못 하나하나 다 뉘우치고 갚은 뒤에도 지루하게 이어지는 게 인생이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인생이 끝 날 것 같은 어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본인들이 저지른 잘못보다 더한 잘못을 저지르는 심리를 정확히 파악한 대사이다. 본인이 내릴 수 있는 최악의 선택에 목매는 꼴을 차갑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그 대사는 영화에서 노인의 존재를 가장 멋있게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효정은 단순히 노인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젊어서 저지르는 잘못된 행동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세련되게 나이 듦이 준 지혜를 들려준다.

 

효정은 피해자가 더 고통 받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가해자를 향한 일갈을 준비한다. 69세, 효정은 동인이 쓴 고발문 대신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고발문을 쓴다. 차분한 마음을 담아 용기 있는 고백을 한다. 섬세하게 느껴지는 고통의 진폭과 세상의 편견과 불의의 시선에 흔들리는 마음, 절제된 용기를 담아낸다.

29세 이중호에게 성폭행당한 명백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또 다른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다. “제 얘기가 여러 사람을 불쾌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 보는 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69세 여성도 살아 있기에 존재의 이유와 희망을 갖기에 충분하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유지해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으로 영화영상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1) 성폭력은 성과 관련된 육체적, 정신적 폭력행위를 포괄하는 개념이며, 성폭행은 의사에 반한 또는 강제(폭행 또는 협박)로 성관계를 하는 것을 말한다.
(2) <고령화 탓 노인대상 성범죄 4년새 55% 증가…작년 765건>, 연합뉴스, 2019-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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