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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라의 문화톡톡] 저항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이주라의 문화톡톡] 저항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 이주라(문화평론가)
  • 승인 2021.03.08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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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차별과 불평등 그리고 저항

한국에서 1970년대는 어쩔 수 없는 독재의 시대였지만, 유럽이나 미주 지역은 우리와 달리 자유를 만끽했으리라는 선입견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1968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68혁명으로 세계대전을 이끌었던 보수적 기득권이 타격을 입었고, 히피로 상징되는 젊은이들의 진보적 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아나키스트 공동체들도 곳곳에 만들어졌다. 1970년대는 혁명, 히피, 아나키스트가 존재했던 진정한 자유의 시대였지 않았을까.

하지만 세계의 실상은 역시 그 이면을 들여다봐야 제대로 보인다. 정치적·문화적으로 강조되었던 68혁명 이후의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세계는 그 시대를 선도했던 새로운 패러다임에는 분명했으나,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은 것이다. 2000년대 신자유주의의 폭풍 아래, 인권과 윤리조차 경제적 효율성으로 평가받던 시대가 지나가고, 2010년대 인종차별의 문제 그리고 여성 및 성소수자들의 불평등 문제가 다시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일상에 뿌리 내린 끈질긴 차별의 역사성을 밝히고, 그러한 억압 속에서도 저항의 희망을 제시했던 역사적 장면들에 대한 재조명이 문화계에서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세계 각국에서 제작되는 영화나 드라마는 인종차별이나 페미니즘과 관련된 역사적 장면을 일상의 관점에서 발굴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헬프>(2011)나 <히든 피겨스>(2016)는 미국의 가사노동 그리고 더 나아가 지식노동이 얼마나 철저하게 젠더별로 그리고 인종별로 분리되어 차별받고 있었는지를 드러냈다. 1960년대까지도 흑인들은 백인들과 함께 화장실도 사무실도 그리고 컵도 공유하지 못했다. 그러니 대학 교육을 받기 위해서도, 나사(NASA)에서 일을 할 때도 흑인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언제나 법이나 제도 그리고 규칙과 싸워 기존의 틀을 바꾸는 혁명을 일으켜야 했다.

 

거룩한 분노 포스터
영화 <거룩한 분노> 포스터

<거룩한 분노>(2017)는 1968년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68혁명의 장면에서 시작한다. 68혁명은 정치적 혁명이기도 하였지만, 성해방 운동이기도 하였다. 이 진보적이고 실천적 운동을 통해 기존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과 성 고정관념을 적극적으로 타파하는 흐름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동일한 시기 스위스 시골 마을은 여전히 보수적인 가부장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집안의 가장인 할아버지는 며느리가 청소기를 돌리면 의자에 앉은 채로 발만 살짝 들어 올려주는 최대한의 ‘배려’를 해 준다. 며느리에게 “차.”라는 한 마디만 소리치면,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위해 따뜻한 차를 쪼르륵 대령한다. 이런 장면은 유교 문화의 세례를 받은 한국이나 아시아에서만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부장 문화의 유산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전 세계 가부장 문화는 이렇게도 똑 닮았는지, 꽤 놀랐다. (이런 걸 보고 놀란 것을 보니, 아시아 문화와 서구 문화에 대한 대비를 통해 형성된 문화적 선입견이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철저한 가부장 문화가 유지되고 있는 이 시기는 1971년이다. 68혁명의 기운이 도처에 가득하여도, 도시가 아닌 시골, 공공의 영역이 아닌 사적 영역, 정치가 아닌 일상 속에서는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스위스는 아직까지 여성의 투표도 가능하지 않은 시대였다.(최초의 여성 참정권 시위가 1920년대에 시작된 것을 떠올려 보면, 보수적 세계는 참 끈질기게도 변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스위스의 여성 참정권은 1971년에서야 몇몇 주에서 시행되었고, 1991년이 되어서야 스위스 전 주에서 시행되었다. <거룩한 분노>는 이런 스위스 시골 마을의 주부 노라가 여성 참정권 투표 찬성 시위를 주동하며, 이 마을의 보수적 가부장제에 맞서 여성들의 권리를 쟁취하는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노라는 길에서 여성해방론자들이 선전물을 나눠줄 때, “저는 해방되지 않아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외면할 정도로 현재의 생활에서 큰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직장 생활 복귀를 반대하는 남편의 태도와 애인을 자유롭게 만난다는 이유로 청소년 보호소를 거쳐 감옥까지 가게 된 조카딸을 보면서 여성의 권리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노라는 여성해방론자들에게 받은 베티 프리단(『여성성의 신화』라는 책을 써서 여성에게 강요되는 모성성의 문제를 밝힌 작가로, 1970년대 페미니즘의 대표주자)의 책을 밤새 읽으면서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 아님을 자각한다.

그리고 노라는 곧 다가올 여성 참정권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투표에 마을 사람들이 찬성표를 던질 수 있게, 여성 참정권의 중요성을 알리려고 한다. 이를 위한 마을 모임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남성들의 야유와 여성들의 소심한 침묵 속에서 끝난다. 보수적인 남성들은 노라를 놀리며 노라에게 쓰레기를 던진다. 그런 남편들 앞에서 아내들은 노라의 입장에 동의한다는 표현을 쉽게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집회가 끝나고 난 후, 여성들만 모인 자리에서 아내들은 자신들도 여성 참정권을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노라는 여성들이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일침을 놓는다. 노라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노년의 여성 브로니는 1959년에 자신은 여성 참정권에 반대하였지만, 그 결과 지금까지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이탈리아 출신 레스토랑 사장인 그라지엘라는 이탈리아에서는 파업을 통해 주장을 전달하고 권리를 인정받는다고 알려준다. 이렇게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주부들의 파업이 시작된다.

이 영화의 장점은 이러한 주부들의 파업을 통해 그 동안 가치절하 되었던 가사 노동과 여성의 노동이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 얼마나 핵심적인 것인지를 보여주었다는 점, 그리고 여성들의 연대와 공동체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가부장제 속 여성들의 억압 이면에는 가부장제의 남성 역할 수행 또한 불행했다는 점을 곁가지로 보여준다. 장남으로서의 의무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남성들 또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여성의 연대와 파업을 통해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압박을 가하게 되고, 그로 인해 남편들은 여성 참정권 투표에 찬성표를 던지게 된다. 남성들이 투표장으로 들어갈 때 그들을 둘러싼 여성의 레이저 눈빛은 함께 하는 연대의 힘, 그리고 표현하는 실천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래서 이 힘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표현하고, 연대하고, 실천하라. <거룩한 분노>는 이러한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여성의 자각-실천적 움직임의 좌절-여성 동료들의 연대-세상의 변화’라는 플롯은 여성해방운동 관련 영화의 기본적인 구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도를 잘 전달하는 것도 페미니즘 영화의 중요한 미덕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 속 페미니즘 운동의 지속을 위해서는 페미니즘 운동이 처한 현실을 더욱 다층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기도 하다. 현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연대와 남성 기득권을 향한 저항이라는 단순하고 명쾌해서 속 시원한 행동만으로는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어느 순간 여성이 여성의 적이 되기도 하고, 여성의 실천적 운동이 자본의 논리에 상품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페미니즘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들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미스비헤이비어(misbehaviour)>다.

 

<미스비헤이비어> 속 저항의 다양한 태도들

<미스비헤이비어(misbehaviour)>(2020)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단어 그대로 나쁜 행실, 잘못된 행동이라는 의미다. 조금 해석을 가하자면, 기존의 규율과 윤리를 벗어나는 저항적 행동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접두사 'mis-'를 호칭 'miss'로 바꾸어서, 행동하는 여성을 나타내는 제목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제목에 깃든 이 이중적 의미대로, 기존의 상식에 저항하여 행동하는 여성들의 모습에 주목하였다. 이 영화는 1970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미스 월드 대회를 테러한 여성들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사건을 둘러싼 여러 여성들 각각의 입장과 남성의 입장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영화의 기본적인 구도로 만들자면, 여성상품화에 반대하는 여성해방운동가 집단, 여성을 거리낌 없이 상품화하는 남성 중심의 대회 주최 집단, 여성상품화에 대한 자각이 없는, 아름답지만 백치인 대회 참가자 집단, 이렇게 세 집단으로 구성될 것이다. 하지만 <미스비헤이비어>는 여성해방운동가 집단도 자유파와 과격파의 입장 차이를 부각시켰고, 대회 주최 집단 속에서도 여성과 남성이 이 대회를 주최하고 이 사건을 겪어내는 태도가 다르다는 점을 드러내었으며, 여성 참가자들도 인종과 계급에 따라 대회 참가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미스비헤이비어 포스터
영화 <미스비헤이비어> 포스터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지점은 페미니즘 운동에 내재된 계급적 차이의 문제이다. 계급 해방이 여성 해방을 동반하지 못하듯이, 여성 해방도 계급 해방을 가능하게 하지 못한다는 점이 <미스비헤이비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샐리(키이라 나이틀리)와 조(제시 버클리)의 갈등이다. 부르주아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샐리는 기존의 질서 내에서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려고 한다. 하지만 히피와 같이 자유분방한 삶을 살며 아나키스트 공동체를 꾸린 조는 그런 샐리에게 주어진 자리에 들어앉는 것은 안전한 선택일 뿐,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경고한다. 아니나 다를까 샐리에게 주어진 자리는 샐리 스스로 말하기를, ‘유아용 의자’였다. 샐리는 지도교수와의 세미나 자리에서 어떤 발언권도 얻지 못하며, 미스 월드 관련 방송 프로그램에 나가서도 사회자 및 권위 있는 남성 패널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여성 들러리 패널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기존 사회는 페미니즘의 주장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여성을 위해 형식적인 자리를 마련하지만, 그 형식적인 자리에서 여성은 장식품 취급만 당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의 상식과 윤리에 머무르려고 하는 샐리 및 자유주의 페미니즘 운동이 가진 한계를 이 영화는 그려내고 있다. 더불어, 대중매체를 철저히 배제하고 소수의 과격파 운동으로 나가려고 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한계 또한 조와 그녀의 공동체를 통해 드러난다. 물론 이들 각각의 입장이 가진 장점도 이들의 대립을 통해 잘 부각된다.

다음으로 흥미롭게 나타나는 예는 여성해방운동의 주체들이 미스 월드 참가자를 만나는 장면에서 연출된다. 1970년 미스 월드 우승자인 미스 그레나다 제니퍼(구구 음바타로)와 샐리는 대회가 마친 후 여자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샐리는 제니퍼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자신들이 공격했던 것은 대회 참가자가 아니라, 여성을 성 상품화하는 사회의 구조라고 해명하지만, 제니퍼는 이렇게 말한다. 영연방의 식민지 출신 흑인 여성인 자신이 미스 월드가 되는 것을 본 전 세계 흑인 여자아이들이 이제 백인이 아니어도 세상에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 제니퍼는 자신이 미스 월드에 참가하고 승리를 위해 노력한 것은, 성 상품화의 구조 속에서도, 그 명백한 억압 속에서도, 그나마 주어지는 희망의 가능성이었기 때문에, 이거라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런 제니퍼의 시선을 통해서 미스 월드 참가자의 다양한 입장이 드러나는 점이 이 영화의 또 다른 흥미로운 부분 중에 하나이다. 미스 월드 참가자들은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이 대회에 출전한다. 그런데 이 대회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이 대회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모두 계급적, 인종적으로 약자로 분류된 사람들이다. 유럽에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교육을 받은 미스 스웨덴은 대중 및 주최자들이 가장 주목하며 대회의 우승자로 거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를 철저하게 통제하는 대회의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답답해한다. 미스 스웨덴은 자신의 주체성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이 대회 참가에 불편함을 느낀다. 이러한 미스 스웨덴에게 미스 그레나다인 제니퍼는 이렇게 말한다. “이 대우가 너무하다 싶으면 참 행운아네요.” 제니퍼는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가 자신을 비롯한 식민지출신 흑인 여성들에게 ‘그나마의 희망’이라는 점을 늘 인지하고 있다. 이는 제니퍼가 화장실에서 샐리를 만났을 때도 잘 드러난다. 제니퍼는 샐리에게 “당신처럼 선택을 하며 살고 싶다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서구의 여성, 더 한정하여 서구 중산층 여성에게는 ‘저항’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 빈곤층, 흑인, 여성에게는 세상에 나설 어떠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미스비헤이비어>에서 미스 월드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참가자들은 모두 흑인이거나, 가난한 나라 출신이거나, 아니면 빈곤 계층이다. 미국 대표이지만 시골 출신인 미스 USA는 자신의 외모 자본을 적극 활용하여 돈을 벌고 신분 상승을 이루려고 한다. 남아공에서 급작스럽게 출전한 흑인 대표도 자신이 일하는 신발공장 사람들이 자신의 출전에 환호했던 그 장면을 기억한다.

이 영화의 이러한 장면들은 여성해방운동의 난제가 바로 계급 문제와 맞물려 있음을 잘 드러낸다. 사회적 소외 계층, 빈곤 계층의 여성들은 젠더 차별에 더하여 사회적 주체성 형성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이중의 억압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억압 속에서 주체성을 찾으려는 여성의 실천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몸을 소비하는 자본의 논리에 적극 영합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신의 몸을 적극적으로 상품화시키면서도 그것이 여성의 권리이자 주체성이라고 주장하는 도착이 이렇게 생겨나기도 한다. 이는 분명 문제적 지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중의 억압 속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한정된 기회를 절대 활용하지 않는 것만이 옳은 방법일까.

<미스비헤이비어>는 각각의 여성이 처한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주체적 행동과 선택이 다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 같다. 적극적인 여성해방론자의 실천적 저항만이 저항의 옳은 태도는 아니다. 성을 상품화하는 대회이기는 하지만 그 대회에 참가하고 수상함으로써, 인종적 차별의 상식을 깨뜨리거나 계급적 상승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또한 그 당시 인종적, 계층적 약자인 여성이 선택할 수 있었던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탈식민주의 이론가 호미 바바는 피식민지 주체들의 저항의 태도는 양가성과 혼종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한다. 피식민지 주체들이 식민지 통치인들에 대한 과격한 저항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피식민자들의 저항은 훨씬 더 다양한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겉으로는 식민지 통치인들에게 복종하는 듯하면서, 유머를 통해 그들을 놀려 먹으며 숨 쉴 틈을 찾기도 했고, 식민지 시스템을 이용하면서 시스템 내에서 균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것을 호미 바바는 ‘교활한 예의’라고 불렀다. 예의를 갖추는 척하면서 식민지 통치자들을 놀려먹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운동을 둘러싼 여성의 저항의 태도는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다양해질 수 있다. <미스비헤이비어>에서 나타나는 가장 ‘교활한 예의’는 바로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인 밥 호프(그레그 키니어)의 아내 돌로레스가 보여준 태도다. 노골적인 성차별주의자 밥 호프는 여성들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농담을 일삼으며, 미스 월드 참가자와 바람을 피면서도 아내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전형적인 남성우월론자이다. 그런 그가 미스 월드 대회에서 사회를 볼 때 여성해방론자들이 그를 향해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고 외치며 테러를 가하자, 밥 호프는 대중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며 우울해 한다. 그는 자신의 농담이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이었다는 것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 돌로레스는 냉정하다. 여성을 가지고 놀 생각으로 미스 월드에 참가하는 남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데다가, 여성인 자신 앞에서 여성 비하 발언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남편이 한심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끝까지 징징대자, 큰 결심을 한 듯이 남편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그를 안아 주며 위로 한다.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되었어도 당신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 형식적인 위로로 남편 밥이 활기를 되찾자, 아내 돌로레스는 남편을 남겨두고 술집으로 향하며 한 마디를 남긴다. “그 여자들이 미친 것 같지?” 그 뒤는 생략되어 있지만 돌로레스는 이런 말을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 여자들은 미친 게 아니야. 네가 우스꽝스러운 거지. 여성을 비하하면서도 너는 결국 여성인 나에게 위로를 받아야만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잖아. 모든 것을 여성에게 의존하면서도 혼자 잘났다고 떠드는 네가 바보인 거지. 이렇게 문을 닫고 떠나는 돌로레스 뒤에는 밥 호프의 초라한 모습만 남는다.

<미스비헤이비어>는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여성 운동의 모습 외에 여성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과격한 저항을 하며 기존 질서를 해체하려는 노력, 기존 질서 속에서 나름의 희망을 찾는 노력, 가부장제를 적극 유지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그들을 조롱하는 태도, 이런 것을 통해 여성 해방을 향한 움직임이 단 하나의 행동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여성 해방을 위한 여성들의 연대는 동일한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 빈틈 없이 결집했을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하며, 각계각층의 다양한 경험들이 모일 때, 그러한 다양한 입장들에 대한 서로의 이해를 통해서, 각자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연대, 진정한 해방이 가능해질 것이다.

 

글·이주라(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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