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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구제금융 말고는 없는가
다시 구제금융 말고는 없는가
  • 이브라임 와르드
  • 승인 2011.09.06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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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모든 것이 들썩이며 요동치던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버릴 게 확실해 보이던 순간이 있었다. 2008년 9월 7일, 미국 정부는 양대 주택담보대출업체인 패니메이(Fannie Mae)와 프레디맥(Freddie Mac)을 직접 운영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9월 15일에는 대형 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다. 9월16일 미국 정부는 <월스트리트저널>의 충고를 따라 미국 최대 보험사 아메리칸인터내셔널그룹(AIG) 구제에 나섰다. 시장은 쇼크에 빠졌고,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자동차산업의 상당 부분이 국유화되고, 수천억달러의 구제자금이 투입됐다. ‘케인스’, ‘뉴딜’, ‘국가 주도 경제’ 등의 말이 다시 회자됐다. <<원문 보기>>

부르주아 경영자들은 참회의 기도를 올리며 “미래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프랑수아 피용 프랑스 총리는 ‘벼랑 끝에 선 세계’라는 표현을 썼다. 겁에 질린 <뉴스위크>는 ‘우리는 지금 모두 사회주의자다’라는 표지 제목을 뽑았다. <타임>은 “자본주의를 구출할 수단을 찾기 위해 마르크스를 다시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복한 결말을 상상하기 힘든 상황에서, <워싱턴포스트>는 ‘자본주의는 사망했는가?’(1)라는 불길한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물론 짧은 막간극이 있긴 했다. 세계경제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간 정치·경제 엘리트들은 과거에 누리던 영화를 잃고 와신상담해야 했다(덕분에 그들은 자신이 박해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 곧 그들은 다시 일어섰다. 온갖 선언이 이어지고 약속만 넘쳐나는 모임들이 열렸다. 그 뒤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새로운 법률들이 도입됐지만(금융감독 구조 개편, 자기자본비율 강화, 임원 보너스 상한제, 금융 소비자 보호 등), 실제 적용 면에서 보면 있으나 마나 했다.(2)

그 결과는 어떤가? 세계경제는 또 한 번 벼랑 끝에 서게 됐다. 2011년 여름은 모든 면에서 2008년 가을과 닮아 있다. 유럽은행감독청(EBA)이 유럽 금융기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스트레스 테스트’(경기침체 등 외부 충격에 대한 금융기관들의 위기관리 능력을 평가하는 프로그램)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총 90개 은행 중 82개가 합격 판정을 받았다. 며칠 뒤 그리스는 국민의 희생과 유럽 납세자들의 돈으로 파산 위기를 모면했다. 덕분에 신용부도스와프(CDS) 보장 계약을 맺은 금융기관들은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로존 17개국은 앞으로 재정긴축이라는 더욱 강화된 ‘황금률’을 준수할 수밖에 없게 됐다. 미국의 경우,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 사이에 증세 없는 재정긴축을 골자로 하는 채무한도 협상안이 8월 2일 시한 전에 극적으로 타결됐다.

그런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스탠더드앤드푸어스는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강등했다. 근거 없는 수치를 기준으로 내려진 이 결정에- 10년간의 재정 적자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2조 달러(약 1조3890억 유로)가 추가됐다- 시장은 다시 동요했다. 한 달 전만 해도 재정건전성이 좋다고 인정받던 유럽의 은행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은행을 밀착 감시하던 당국의 노력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금융화가 너무 진전된 현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우선, 국가와 금융시장의 관계가 어느 때보다 국가에 불리하다. 또한 지난 30년 동안 자리잡은 ‘금융 탈규제’라는 도그마가 쉽게 깨질 것 같지 않다. 국가들의 개입 방식은 시장을 안심시키고 금융기관을 보호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도 금융기관들은 국가 채무를 걸고넘어지며 정부를 조여오고 있다. 정책의 실패가 자명한데도 각국은 매번 같은 일을 반복했다. 이 도그마가 더 이상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생각을 바꾸는 게 옳았겠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마치 공포영화의 좀비처럼 맹신자들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 새로운 재앙을 몰고 온 것이다.(3)

2008년 위기 때 방향타를 쥐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채 멀쩡히 살아 있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너무 거대해서 무너지면 안 된다’(Too big to fail)는 논리로 구제된 금융의 거인들은 예전보다 더 몸집이 커졌지만 여전히 위태로워 보인다. 2008년 금융위기의 교훈은 놀랍도록 빠르게 잊혀졌다. 위기의 원인이 된 당시의 생각들- 모든 규제는 나쁘다, 은행에 좋은 것이 미국에도 좋다, 감세는 만병통치약이다 등- 이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4)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07-르 카라바조

짧았던 참회, 되살아난 재앙

위기 전에 영웅 대접을 받았던 인물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타임>이 1999년 2월 ‘세계를 구할 3인 위원회’라는 제목으로 트리오 사진을 실어서 화제가 됐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재무부 장관 로버트 루빈과 재무부 차관 래리 서머스는 매우 짧은 시련의 시기를 겪었을 뿐이다. 그린스펀은 공화당 쪽 인사였고, 나머지 두 명은 민주당 쪽이었다. 이들 모두 금융계가 정치 무대에서 행사하는 막강한 권력을 상징한다.

빌 클린턴은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채권시장의 엄포에 무릎을 꿇었다. 그 뒤 전개된 금융시장의 붐은 금융화 효과를 증명하는 듯 보였고, 공화당과 민주당은 하나가 되어 그 열풍 속으로 휩쓸려갔다. 금융기관들에서 선거자금을 끌어모으려는 경쟁이 시작됐고, 그 대가에 대한 약속이 줄을 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원인인 ‘악성 채권’ 상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1999년과 2000년 민주당 정권이 도입한 개혁 조처들 때문이다.(5) 그 뒤 대통령에 오른 조지 W. 부시는 월가와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가장 열성적으로 ‘탈규제’를 외치는 인물들이 경제 요직을 차지함으로써 그나마 남아 있던 규제들까지 사라져버렸다. 각국 정부의 재정이 신용평가사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6)

선거자금과 탈규제의 맞교환

2008년 가을의 충격이 지나가고 경제 엘리트들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2008년 10월, 한때 ‘경제 붐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앨런 그린스펀은 상원위원회에 불려간 자리에서 불편한 표정으로 “내 경제적 신념이 잘못된 기초 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짧은 뉘우침의 시기가 지난 뒤 달라진 모습은 없었다. 2년 뒤 그는 금융 시스템을 조금이나마- 그마저도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지만- 안정시킬 목적으로 도입된 ‘도드-프랭크법’을 맹렬히 공격했다.(7) 금융계 인사들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온 로버트 루빈은 <파이낸셜타임스>를 통해 경제 자문 노릇을 계속하고 있다.(8) 래리 서머스는 사실상 한 번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적이 없다. 그는 2008년 대선 때 오바마 후보의 주요 참모였고, 정권을 잡은 뒤에는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2010년 말 위원장직에서 물러나서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마이클 허시 기자는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후에도 “과거 체제, 지식인 집단- 밀턴 프리드먼, 그린스펀, 루빈의 이론적 혼합- 이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지배권력을 유지하고 있다”(9)고 지적한다.

세계 전역에서 국가와 기업이 아무 망설임 없이 국민 혹은 임금노동자와 맺은 사회계약들을 파기하는 상황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국가경제위원장을 맡고 있던 래리 서머스는 (국가에 의해 구제된) AIG 임원들이 가져간 엄청난 액수의 보너스를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법치국가다. 계약은 계약이다. 정부가 나서서 무작정 계약을 파기하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10)

<뉴요커> 기자인 존 캐시디는 <시장은 어떻게 실패하는가>라는 책에서 이들의 이데올로기가 고전 자유주의 경제학의 완성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부패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합리적이고 자기조절적 금융시장이라는 개념은 지난 40년 사이에 발명된 것이다.”(11)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그를 찬양하는 금융계 인사들은 사실상 금융규제에 대해 그가 품었던 생각을 무참히 왜곡하고 있는 셈이다.

그 유명한 <국부론>(1776)을 출판하기 4년 전, 이 고전경제학의 대부는 금융 거품 붕괴로 영국 에든버러의 30개 은행 중에서 27개가 파산하는 사태를 목격했다. 그는 모든 것을 금융시장에 맡겨둘 경우 사회가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을 신봉한 그였지만, 경쟁에 근거한 자유시장 원리가 금융 부문까지 확장되는 것에는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은행 경영 및 거래의 자유를 제한하고 금융을 엄격한 규제 아래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규제는 개인의 천부적 자유에 대한 침해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몇몇 개인들에게 부여된 자유가 사회 전체의 안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 마치 화재 제연벽 설치를 의무화하듯이, 자유체제 혹은 독재체제의 정부들은 금융서비스 거래를 규제할 필요가 있다.”(12)

현재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경험적 진리가 삭제된 이 근본주의의 뿌리를 따라 올라가보면 우리는 아인 랜드(1905~82)라는 이름과 마주치게 된다.(13) 잡지 발행인이기도 했던 러시아 태생의 이 미국 소설가는 개인의 이기주의를 최상의 덕목으로 찬양하고 모든 종류의 공권력 개입을 비난하는, 교조적이고 과격한 이론을 주장했다. 그녀의 이론을 신봉한 사람 중에는 앨런 그린스펀도 끼어 있었다. 1963년 이미 그는 기업가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위험한 식품이나 의약품, 가짜 채권, 엉터리로 지어진 건물 등을 팔 것이라는 생각을 ‘집단주의적 환상’이라고 비판하며, “그와 반대로 정직하다고 소문이 나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에 기업가들은 좋은 품질의 상품만 판매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가 아니라 부패 현상

2005년 5월 연준 의장 임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금융건전성 관리는 정부보다는 민간 부문의 상호 평가와 통제에 맡겨두는 편이 낫다. 정부의 개입은 고도로 윤리적 시스템의 기초를 무너뜨릴 수 있다. 온갖 행정서류들 밑에는 사실상 총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14) 순환논리가 다시 힘을 얻는다.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시장이 충분히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현재 거세게 일고 있는 금융 ‘과잉’에 대한 맹렬한 비판에 편승해 마치 시민들과 함께 분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담론은 무력함에 대한 고백처럼 들린다.

애덤 스미스도 놀라 자빠질 노릇

지난 8월 17일 재정위기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만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알쏭달쏭한 말로 금융거래세, 즉 금융계가 그토록 싫어하는 토빈세(15) 신설을 제안했다.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승인이 필요한 이 제안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이 조처가 실현돼도 금융투기 열풍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발전기금이 신설되는 것도 아니다. 최선으로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앞으로 구제금융을 받게 될 은행들이 받은 돈의 극히 일부를 토해내는 것 정도다. 은행들이 또다시 구제금융을 요청할 순간이 머지않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글•이브라임 와르드 Ibrahim Warde
리샤르 파르네티와 함께 <문제가 되는 앵글로색슨 모델>(Le Modele anglo saxon en question·Economica·파리·1997)을 썼다.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각주>
(1) <Newsweek>, 뉴욕, 2009년 2월 16일자. <Time>, 2009년 2월 2일자. <The Washington Post National Weekly Edition>, 2008년 10월 27일자.
(2) ‘A year later, Dodd-Frank delays are piling up’, ‘Wall Street continues to spend big on lobbying’, <The New York Times>, 2011년 7월 22일, 8월 1일자.
(3) 세르주 알리미, ‘정치적 꼭두각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5월호. John Quiggin, <Zombie Economics: How Dead Ideas Still Walk Among U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0 참조.
(4) Paul Krugman, ‘Corporate cash con’, <The New York Times>, 2011년 7월 3일자.
(5) 그중에서도 1999년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업을 금지하는 글래스-스티걸법 철폐와 2000년 리스크가 큰 파생상품이 모든 규제를 피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상품선물현대화법(Commodity Futures Modernization Act) 도입을 들 수 있다.
(6) ‘국가를 평가하는 강력한 음모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7년 5월호.
(7) Alan Greenspan, ‘Dodd-Frank fails to meet test of our times’, <Financial Times>, 2011년 3월 30일자.
(8) Robert Rubin, ‘America‘s dangerous budget track’, <Financial Times>, 2011년 7월 29일자.
(9) Michael Hirsh, <Capital offense: How Washington’s Wise Men Turned American’s Future Over to Wall Street>, Wiley, 뉴욕, 2010.
(10) Alan Beattie & Julie Macintosh, ‘Summers outrage at AIG bonuses’, <Financial Times>, 2009년 3월 15일자.
(11) John Cassidy, <How Markets Fail: The Logic of Economic Calamities>, Farrar, Strauss and Giroux, 뉴욕, 2010.
(12) <국부론> 2편, 2장.
(13) François Flahaut, ‘신도 주인도 세금도 없는’, ‘식객들에게 붙들린 천재의 우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8월호, 2010년 6월호.
(14) David Corn, ‘Alan shrugged’, <Mother Johnes>, 샌프란시스코, 2008년 10월 24일.
(15) ‘투기꾼들의 눈엣가시 토빈세, 검열의 표적이 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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