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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소리없음은 혁신적인 규칙이었을까 -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경제성과 공백에 대하여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소리없음은 혁신적인 규칙이었을까 -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경제성과 공백에 대하여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1.07.0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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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는 타장르에 비해 규칙과 설정이 많다. 관객에게 주어지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함이다. 공포영화가 정보의 제어를 통해 조성하는 것은 정보의 비대칭이다. 정보가 비대칭일 때, 관객은 합리적인 기대 혹은 예측을 할 수 없다. 예측이 가능하더라도 등장인물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관객은 등장인물의 행동을 합리화시키기 어렵다. 합리를 추구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때 관객은 긴장하게 된다. 닥칠 일 혹은 닥쳐올 일을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만큼 공포영화만큼 인풋(규칙과 설정)과 아웃풋(관객의 반응)의 관계를 연구해온 장르는 드물다.

공포영화에서 규칙과 설정은 그 영화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가령 <할로윈>과 <13일의 금요일>에서 집행자가 불사에 가깝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영화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만큼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는 ‘소리 없음’이라는 설정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콰이어트 플래이스>는 소리를 통해 정보를 제어하는 영화이고, 소리가 사라질 때 관객은 합리성을 잃어버린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규칙은 단순하고 강력하다. 등장인물이 소리를 내면 죽는다. 이 규칙 아래서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소리 없음을 유지하거나 깨뜨리는 방식으로 관객의 합리성을 빼앗는다.

다만 이는 영화의 정체성이고, <콰이어트 플레이스> 만큼 이미 충분히 논의된 대상이다. 지면을 통해 ‘소리 없음’의 설정을 반복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에서 할 이야기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없음’에 관한 문제다. 물론 이미 지승학 평론가가 지적했던 ‘보호할 수 없음’이라는 사회적 상태(1) 혹은 관객을 참여의 위치에 옮겨 놓는 ‘소리 없음’의 기능(2)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없음’은 단순히 무언가가 있기 전의 상태다. 따라서 내가 이야기하는 ‘없음’은 공백에 가깝다.

 

공백, 경제적 전개를 위한 환경

그렇다면 <콰이어트 플레이스>에는 어떤 공백이 있는가. 일단 시간적인 공백이 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오프닝을 생각해보자. 1편은 괴물이 나타난 지 89일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소리를 냈던 막내가 죽는다. 이후 영화는 다른 설명 없이 D+472일 후로 점프한다. 2편에서도 마찬가지다. 괴물 출몰 직전의 시점에서 시작한 영화는, 다음 시퀀스에서 곧바로 1편의 마지막 시점으로 점프한다. 시차 사이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지라도 영화는 여전히 시간적 공백을 전제하고 시작한다. 이는 이미 송경원 평론가가 지적[2]했듯이 새로운 상황을 도입하기 위해서다.

새로운 상황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늘 맥락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적인 점프를 이용하여 맥락을 지우고 작법 상의 경제성을 확보하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다. <할로윈>과 같은 고전적인 공포를 제외하더라도, 이는 범장르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극단적인 사례로는 조 라이트가 각색했던 <안나 카레리나>(2013)와 같은 영화가 있다. 조 라이트는 무대장치라는 미장센을 활용하여 톨스토이의 원작이 묘사하던 방대한 인물관계도를 효과적으로 압축한다. 조 라이트는 등장인물이 무대를 가로질러 다른 무대로 이동하면 인물의 배경이 바로 변하는 식으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점프로 자르고 곧바로 새로운 전제와 환경을 내미는 것이다.

크래신스키 또한 설명이 필요한 이동을 점프로 잘라버린다. 그리고 잘린 단면이 만든 공백을 새로운 전제와 환경으로 갈아치운다. 1편에서는 에밀리 블런트가 임신했고, 2편에서는 괴물이 입장할 수 없는 섬이 등장한다. 새로운 전제와 설정은 인물들에게 새로운 목표와 목적을 제시한다. 가족과 임신한 배우자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제공(1편)하거나 바다를 지나야만 한다는 목적(2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성은 공포 장르의 중핵인 인풋과 아웃풋의 관계에 그대로 적용된다. 소리가 사라지는 인풋은 관객에게는 괴물이 나타나는 신호로 받아드려진다. 신호는 곧 합리를 기대할 수 없는 긴급한 상황이 도래한다는 점을 지목하게 된다. 이 관계에서 소리 없음의 역할은 그동안 있었던 맥락과 관계없이 지금 당장 해결해야만 하는 긴급한 상황이 등장시키는 것이다. 인물을 긴급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방식은 연출적 입장에서는 호출에 가깝다. 새로운 상황을 등장시켜 지금까지 있었던 상황을 덮는, 소거에 가까운 방식인 것이다.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소거를 사용하는 방식을 새로운 연출법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차라리 고전적인 연출에 가깝다. 새로운 점을 굳이 지적해야 한다면 관객에게 갑작스러운 충격을 가해 쇼크를 연출하는 ‘점핑 스케어드’를 세련되게 마감했다는 점일 것이다. 즉,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각본의 컨벤션으로 빠른 연출과 전개를 제시했다는 점이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가진 공백의 의미이며 장점일 것이다.

 

경제성 혹은 소거라는 태도

경제적인 연출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혹은 실시간적인 피드백 루프를 바탕으로 관객의 반응을 예측・예비하는 서사를 구성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송경원 평론가가 <콰이어트 플레이스>를 두고 “관객 참여형의 공포”라고 이름 지은 것[2]은 이를 염두 한 지적일 것이다. 인풋과 아웃풋을 연구해온 공포장르의 관점에서도 공백은 매력적인 해결책이자 아닐 수 없다. 말하자면 아웃풋을 예비해놓고, 제시된 답안을 구축하기 구현하기 위해 공백을 지속적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한편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방식에는 의구심이 드는 지점이 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에서 공백은 예비된 답안을 구축하기 위한 필요에 가깝다. 이 때 필요성에 근거한 경제적 답안이 정말 다양성을 가지고 올 수 있을까. 의구심의 근거는 그 경제성이 아무리 세련될지라도 그 방식이 소거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반응이라는 디자인된 예측을 기준으로 삼고, 여기서 불필요한 요소들은 극에서 매끄럽게 소거하는 식이다. 이 점에 있어 소거는 수단보다도 태도에 가깝다.

맥락을 소거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초점화를 수반하는 작업이긴 하다. 그리고 초점화되어있지 않은 영화는 대중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나는 수익을 목적으로 제작한 장르영화를 두고, 다양성을 해쳤다는 명분 아래 소거라는 태도를 윤리적으로 재단하거나 비난할 생각이 없다. 단, 소거가 가져오는 경제성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의문을 가질 이유는 있어보인다. 윤리적인 문제보다도 동기에 가까운 문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기준에 맞춰 불필요한 요소을 소거하고 새로운 규칙을 채워넣는 방식은 다분히 금융의 방식같다. 여기에는 기대라는 추상적이다 못해 가상적인 판타지가 동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판타지는 관객의 반응이라는 행동, 즉 영화와는 크게 상관없는 실제의 영역이다. 영화가 반드시 리얼리티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 실재의 영역을 모방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렇다고 영화가 초점화하는 대상이 관객의 반응이라면, 그건 영화가 예술일 이유가 전혀 없다. 영화가 구체적인 실체를 가진 예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대중을 비추는 거울로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반응이라는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거울에 맺힌 상은 가상일 가능성이 크다. 즉, 이끌어내고자 하는 반응 이외의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앞서 비난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만큼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그저 앉아서 즐기는 일회용 테마파크에 그친 것은 아니다. 이미 다수의 평자가 지적했듯이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가족주의로 회귀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다. 1편에서 아버지의 희생으로 가부장의 자리를 마련했던 형상을 지나, 2편은 아버지의 정신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가족이 등장한다. 즉 여성캐릭터가 주축이 되어 극을 주동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 여성들은 아버지라는 가부장의 그늘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상태다.

 

무리한 전개일 수 있지만, 나는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가족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콰이어트 플레이스2>는 킬리언 머피의 모습이 옳지 않다고 규정해놓았다. 등장인물들은 끝까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할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등장인물은 공동체 없이 의미있는 행동을 구상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그 이유가 대중이 정말로 공동체를 열열히 원하고 있어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피상적일지 모르겠지만 당장 주변을 둘러봐도 기업이라는 단위를 가진 노동공동체에 뼈를 묻겠다는 노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어떤 희생으로부터 자신이 이익을 본다면 그 희생을 숭고히 생각해‘주겠다’ 정도는 꽤 쉽게, 그리고 손에 잡힐 수 있을 정도의 구체성을 확보해 생각할 수 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가족주의를 채택한 이유는 비교적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관객의 반응을 예측하기 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경제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콰이어트 플레이스>에서 가족주의는 플롯상에 발생할 수 있는 변동성을 줄여주는 장치다. 한 단계 더 들어간다고 해도 그건 작법상 익숙한 구조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필요성에 근거한 경제적 답안이 정말 다양성을 가지고 올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뿐이다. 그렇다고 다양성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똑같이 경제학적으로 이야기했을 때, 이게 정말 혁신 동력인지 의심스럽다.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매끈하게 점핑 스케어드를 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에 오프닝에서 시간적인 공백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관객이 등장인물보다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을 때, 혹은 등장인물이 관객보다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을 때 점핑 스케어드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그만큼 공포영화는 관객의 반응은 어떨 것인가를 계산하는 건 숙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점핑 스케어드 없이 효과적으로 공포를 구현했던 영화들을 알고 있다. 아리 에스터의 <유전>이 그랬고, 조던 필의 <겟 아웃>이, 최근에는 플로이안 젤러의 <더 파더>는 공백 자체를 공포로 직조하는 재능을 보여줬다.

크래신스키가 <콰이어트 플레이스>를 통해 제시한 공백이 좋은지 나쁜지 나는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그는 괜찮은 사업적 서사모델을 제시했다. 영화가 자본과 결탁하는 종합예술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는 나쁘지 않은 방법을 제시한 셈이다. 그러나 나는 이 방법이 과연 상업영화라는 종합예술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것인지, 나아가 공백을 전제하고 관객의 반응을 기준으로 설정한 작법이 정말 혁신적인 방법인지 다소 의심스럽다. 물론 상업의 본분을 지키면서 영화를 제작하는 태도를 나무랄 순 없지만 말이다.

 

 

글・이현재

영화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영화평론부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경희대 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2018) 등의 다양한 연구를 보조・수행했다. 평론으로는 「보이(지 않)는 폭력」(2020, 창비) 등이 있다.


(1) 지승학,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공포로 사랑 그리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8.06.18
(2) 송경원, [공포영화③] <콰이어트 플레이스> 게임이 시작되는 영화관, 씨네21, 1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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