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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바람아 안개를 걷어다오> - 판단 너머 관계
[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바람아 안개를 걷어다오> - 판단 너머 관계
  • 이승민(영화평론가)
  • 승인 2021.11.0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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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포스터

말과 행동을 더 이상 판단하지 않는 관계가 있다. 이 때 판단하지 않음은 맹목적으로 신뢰하거나 추종하거나 옹호하는 류의 판단 불능이 아니라, 판단과 평가가 더 이상 관계를 변화시키지 않는 그런 판단 이전, 혹은 판단 이후를 일컫는다. 주로 오랜 시간 함께한 기억과 경험이 누적된 이들에게 생겨나는 특별하다면 특별한, 지난하다면 지난한 관계이다. 이들은 서로의 장점, 단점, 좋다, 싫다, 밉다, 사랑한다 류의 감정을 겪어낸 후 이제 상대를 그 자체로 보게 되는 동시에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있는 그런 판단 너머 관계를 말한다. 몇 십 년 지기나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파트너나 부부, 때론 나이든 자식과 부모 관계가 그렇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다오>는 이런 판단 너머 관계인 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보다 정확히는 청년이 된 아들이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와 동민 - 사진첩 정리하다
어머니와 동민 - 사진첩 정리하다
어머니와 동민- 함께 술을 마시다
어머니와 동민- 함께 술을 마시다

영화는 전화에서 시작한다. 보일러 소리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어머니와 잠결에 전화를 받은 아들의 목소리는 익숙함 그 자체이다. 여기서 전화하는 어머니는 어떻고 전화 받는 아들은 어떻고 전화 내용이 무엇이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저 덤덤하고도 익숙한 일상적 전화를 주고 받았다는 거다. 사실 전화라는 매체 만큼 익숙한 이와 낯선 이를 선명하게 가르는 장치가 있을까? 관계 정도에 따라 내용 뿐 아니라 어투와 태도와 심지어 숨소리마저 다른 게 전화기 이편과 저편의 경계이다. 얼굴 없는 대화가 어쩌면 가장 선명한 표정을 지시하는 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전화 목소리만으로 동민과 어머니의 관계를 읽을 수 있다. 소소한 일로 전화를 건 어머니, 잠결에 시큰둥 대답한 동민, 다음날 말없이 어머니를 찾아온 동민, 자다 동민의 방문을 덤덤히 받는 어머니. 이 모든 것이 익숙하다.

 

어머니의 짝이 다른 양말
어머니의 짝이 다른 양말
동민의 짝이 다른 양말
동민의 짝이 다른 양말

영화는 판단도, 설명도, 논리도, 수다도 필요 없는 둘의 일상의 단면을 담는다. 영화는 서사적으로나 인과적인 연결 없이, 단상들이 나열하듯 쌓여서 세가지 에피소드를 구성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군산행은 전화 받고 들른 동민과 어머니의 어느 하루의 단상들이고, 두 번째 에피소드 태풍 산부인과는 입원한 동생을 찾아온 동민과 어머니의 따로 또 같은 단상들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 희망을 찾아서는 어머니 혜정의 현재 일상의 편린들을 담고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그들 각각의 제목마냥 무관한 듯 무심한 연관성을 가진다. 시간적 흐름도, 이야기의 연속성도, 심지어 배우의 일관성도 크게 개의치 않는 영화는 몇 가지 사물들의 배치로 일상의 단면들을 구슬처럼 엮어낸다. 영화의 영문 제목인 노래 (Mom’s song)가 그렇고, 전화, 양말, 중국어, 자전거, 달마 사진, 꽃, 심지어 어머니 머리에 꽂은 ‘사랑해 삔’이 그렇다. 무심한 일상의 사물들이 사람의 삶 속에서 어떤 다면적 결을 만들어내고 자리매김하고 있는 지 영화는 조용하고도 차분하게 담아낸다. 

 

군산행. 어머니의 노래
군산행. 어머니의 노래
태풍 산부인과 편. 어머니의 노래
태풍 산부인과 편. 어머니의 노래

영화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자 동민 가족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동민의 가족사를 관찰적으로 담기 보다는 동민의 시각과 기억으로 어머니를 경유해 풀어내고 있다. 군산행에서 출발한 동민의 시선이, 태풍산부인과에서는 동민과 어머니의 시선이 각자 교차하면서, 희망을 찾아서 에피소드에 이르러서는 어머니의 이야기로 나아가지만 그동안 축적된 동민의 시선이 겹쳐진 채 가족의 이야기를 나아간다. 영화는 어머니에서 출발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맺고 있지만, 실상 영화는 어머니에게 부재했지만 늘 갈망했던 아버지를 향한 마음의 세월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전화하는 어머니
전화하는 어머니
병원에서 처방받는 어머니
병원에서 처방받는 어머니
아버지와 만나는 어머니
아버지와 만나는 어머니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인물과 사건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을 다루고 있다. 생각해보면 기억이나 꿈 속에 타인은 지금 현재 모습이 아니다. 나는 지금의 모습이지만 상대는 내 기억과 감정이 머문 그 때 그 시절 모습이다. 동민은 지금 모습이지만 어머니를 비롯해 주변인은 주관적이다. 영화는 기억과 꿈의 형상과 닮아있다. 또한 영화는 상대에게 판단이 해제되는 순간의 이미지를 무심한 듯 섬세하게 기입하고 있다. 누군가를 더 이상 판단하지 않게 되는 순간은 시간의 양적 축척만이 아니라 그 모든 시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순간 사실은 그가 흔들리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을 때다. 동민은 어머니 혜정이 어머니 너머 한 여자와 사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마주했던 순간들을 영화 속에 가만히 새기고 있다. 섣부르게 어머니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척도, 설명하는 척도, 그렇다고 자기 상념에 빠진 사념적 태도와도 거리를 둔 채 표면으로 드러나는 일상의 단상들을 가민히 포착해 나간다. 그 표면의 나열들이 쌓여 만들어내는 엇박의 앙상블이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를 특별하게 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이승민
영화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 강연자로 활동,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다큐멘터리 매거진 Docking의 고정필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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