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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노니, 인류에게 미래는 있는가
묻노니, 인류에게 미래는 있는가
  • 뤼시앙 세브
  • 승인 2011.11.11 1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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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양식에 대한 반성이 생산 양식의 변혁보다 더 쉬운 일일까? 우리는 인류가 직면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문명이 위기에 처한 사실은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류학적 위기를 정확히 진단하고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지금의 무력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구행성’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자연 서식지는 지금 심각한 상태에 도달했다. 위기의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은 어떤 식으로든 ‘생태학적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류의 다른 이름인 ‘인간행성’ 역시 지구-행성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우리는 그 심각성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다. 최소한 생태학적 문제와 인류학적 문제를 동일선상에 놓고 사고하는 정치세력은 없어 보인다. 이런 놀라운 대조는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원문 보기>>

정치에 아주 관심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생태학적 입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어보라. 그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온실가스 증가로 발생한 기후온난화로 지구는 위기의 시대로 진입했다. 세계 곳곳의 토양과 공기, 물의 오염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들이 고갈되면서 지금의 생산·소비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원자력발전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몰고 올 수도 있다….” 그는 종 다양성이 위협받고 있으며, 과거 선진국들이 훼손한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이 시급하다며 나름의 결론을 덧붙일지도 모른다.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가? 언론과 생태주의자들의 홍보를 통해서다. 주유소에서 기름 넣을 때마다 직접 느끼는 문제이기도 하다. 단편적 지식을 세계화한 비전으로 승격시키는 과학자들, 그것을 정치적 강령으로 탈바꿈시키는 정치인들이 했던 말을 기억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지난 수십 년간, 다양한 동기와 제안들이 ‘생태학적 입장’이라는 거대담론으로 수렴되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엔 그에게 ‘인류학적 입장’이 무엇인지 질문해보라. 아마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럼 이렇게 질문해보자. ‘당신은 우리 행성이 그렇듯 ‘인간성’(Humanité)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류의 문명화된 차원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는가? 즉 자연을 보존해야 하는 것(생태학적 입장)만큼, 본질적 의미에서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을 지키는 것(인류학적 입장)이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이 질문에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너무 과장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 질문에서 가혹한 삶의 조건, 갈수록 극심해지는 이기주의, 실종돼가는 공동 삶의 윤리, 미래에 대한 불안 등 심각한 주제를 연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로부터 지구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이 말살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본주의 공포정치, 인간성 말살

여기서 포기하지 말고, 질문을 계속해보자. 우리는 지금 모든 측면에서 ‘인간적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한 세계를 향해 가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플라우투스)라는 오래된 격언이 너무 많은 분야에서 그 어느 때보다 부정적 방식으로 현실화되고 있지 않은가? 대표적인 예로, 노동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각자에게 만족을 주는 양질의 노동이 갈수록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무한경쟁에 내몰리는 노동자들은 책임감을 강요당하며 동시에 책임 있게 일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와해되고 ‘너 자신을 상품화하라’, ‘경쟁자를 짓밟아라’라는 구호 아래, 기업 경영자들은 공포정치를 단행한다. 이런 환경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자살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두 자릿수 이윤에 대한 강요, 탐욕스러운 주주들에게 제공되는 배당금, 양심과 법마저 내팽개치는 불량배 같은 기업주 등에 신자유주의의 광기와 후기 자본주의의 영악한 외피가 모든 곳을 뒤덮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성이 말살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가?

사람들은 대답할 것이다. ‘인류학적 입장’이라는 이상한 말만 뺀다면 모두가 이미 아는 사실 아닌가? 온갖 사회적 문제에 대해 경고하고 연구하고 대안을 내놓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노동 문제만 하더라도, 다양한 측면에서 비인간적 경영 방식을 고발하는 많은 영화와 마리 프제나 이브 클로 같은 심리학자들의 책(1)이 있지 않은가? 우리를 지배하는 세계화된 시스템의 끔찍한 폐해에 대한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좌파연합으로 결집한 정치세력들은 인류를 해방하려면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태주의자들은 생태학적 관점에 민주주의와 연대에 기초한 사회적·제도적 목표를 결합한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국내총생산(GDP)이 효율성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는 데 반대하며 생산주의적 관점이 배제하는 인간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을 인간적으로 바꾸려는 사회운동이 곳곳에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굳이 ‘인류학적 입장’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그런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식되고 실천돼오지 않았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고 믿는다면, 인류학적 입장이 포괄하는 영역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생태학과 마찬가지로 ‘문명’과 관련한 문제들은 정치와 관계를 맺지만, 그것에 선험적이다. 문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적 선택의 문제보다 더 심오한 윤리적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염려스러운 질문이 좌·우의 대립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좌파·우파라는 말이 담보해주지 못해, 심각하게 평가절하되는 우리 문명의 미래라는 문제를 직시하게 해준다. 우리는 어떤 인류가 되기 원하는가? 이 엄숙한 질문은 인류학적 입장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성찰이나 행동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위장된 동기>, 2010-투란 아크소이

생태학적·인류학적 위기의 동시성

예컨대 재화와 서비스 생산은 재앙의 시기를 제외하면 ‘인간의 생산’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고민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 인류학적 사고가 긴급하게 요청되는 이유다. 생태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학적인 것은 올바른 행동으로 인도하는 참된 지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지식은커녕 ‘인간’이라는 혼란스러운 개념 앞에서 자주 길을 잃고 만다. 이 한 단어가 가리키는 현실은 실로 다양하다.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호모사피엔스, 역사적 진화의 결과인 인류, 사적 개인들, 프랑스어로 ‘남성’을 뜻하는 ‘인간’(Homme)이라는 말에 포함되는 여성까지, 인간이라는 개념은 참으로 복잡해 보인다. 이처럼 원시적 개념을 사용하는 학문 영역은 아마 인류학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수없이 인용하는 니체나 하이데거조차 인간이라는 개념을 거의 보편적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언어적 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잘못된 추상 개념을 급진적으로 비판한 근대의 유일한 사상가가 마르크스라는 사실은 과연 우연일까?

인류학적 문제는 생태학적 문제만큼 시급하지만 제대로 된 고민이나 성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심각한 상황 앞에서 나는 위기에 처한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구조 짓는 주요 주제들을 개략적으로나마 소개할 의무감을 느낀다. 뒤에 이어지는 글은 3년 전 출판된 나의 두꺼운 책(<오늘날의 마르크스를 생각한다-2권, 인간?>)의 결론을 재구성한 것이다.

인간은 사물화, 사물은 인간화

문명의 심각한 탈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일반화된 인간의 상품화’ 현상이다. 자본주의는 상품의 일반화를 통해,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노동시간이 자본가의 사적 이윤이 되는 체제다. 인간의 노동력을 상품화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인간을 사물화하고 사물을 인간화한다. 겉으로는 자본-나리가 ‘일꾼’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임금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일정한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모든 인간을 금융의 명령 아래 두는 현대 자본주의의 특성은 갈수록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기계 부품에서부터 병원 침상까지, 인터넷 쇼핑에서 과외 수업까지, 의약품 개발에서 스포츠 스타의 트레이딩까지 이제 그 무엇도 두 자릿수 이윤이라는 무자비한 요구를 피해갈 수 없다. 기업의 경영 방식도 그만큼 가혹해졌다. 노동의 훼손은 수질 오염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다. 인간의 교육과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서비스 활동(의료, 스포츠, 교육, 연구, 창작, 여가, 정보, 소통)도 일반화된 금융화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종류의 서비스 수요가 급증하는 것은 인간 존재가 결정적인 부가 되는 세계로 발전해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런 영역에도 어김없이 침투해 자신의 논리를 강요한다. 결국 돈의 논리가 이 활동 본연의 목적을 대체한다. 광고는 문화와 연대의 훌륭한 매개가 되는 텔레비전을 단순히 ‘인간 두뇌활동의 잉여시간’을 광고주에게 팔아넘기는 수단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과정을 통해 이윤율의 법칙에 복종하는 인간들이 양산된다. 범죄나 다름없는 이 상황을 우리는 언제까지 참아내야 하는가?

인간 존재가 무가치한 세계로 진입

이런 상품화의 광기에 덧붙여 그 자체로 치명적일 수 있는 또 다른 경향이 존재한다. 이른바 ‘모든 가치의 경향적 저하’ 현상이다. 칸트는 일찍이 이 문제를 도덕적 측면에서 갈파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값을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환산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일반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같다. 도덕적 측면뿐 아니라 인식적·미학적·법적 측면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가치를 배제한 채 그 자체로 정언적 의미를 갖는 인류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참, 정의, 존엄성’에 대한 고려가 무참히 짓밟히는 일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이윤의 독재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것,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것, 무상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을 제거한다. 우리는 지금 인간 존재가 더 이상 아무 가치도 갖지 않는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2) 다시 말해, ‘없음’의 확산- 체류 자격, 직업, 거주지, 미래의 부재- 혹은 에메 세제르가 ‘일회용 인간의 생산’이라고 명명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금값’을 받는- 엄청난 연봉, 황금 낙하산, 캐비아 개먹이- 일군의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는 동안, 모든 가치 체계는 붕괴한다. 다른 모든 가치 위에 군림하며 오직 자신만을 척도로 삼는 ‘유일 가치’는 더 이상 가치일 수 없기 때문이다. 가상적으로 몸집을 불려나가던 금융은 버블이 붕괴하면서 수십억 단위의 뭉칫돈을 공중으로 날려버린다. 그 결과는 실물경제의 생산자들에게 고통으로 전가된다. 이와 같은 가치 붕괴가 극지방 빙하 감소보다 덜 중요한 문제라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위기에 처한 것은 인간성 자체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위기에 덧붙여 인류는 ‘불가항력적 의미의 소멸’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오랫동안 자본주의가 나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인류가 쇠퇴하고 있다는 새로운 징후로 읽힌다. 자본주의는 착취를 기초로 한 체제임에도 인류의 진보에 기여해왔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비인간화된 부의 형태를 취하는 금융이 자본주의 체제의 정점에 등극함으로써 우리는 일반화된 ‘무의미’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자본의 축적은 프랑스어의 ‘상팽’(sans fin)이라는 말의 이중적 의미대로, ‘무한하게’ 그리고 ‘목적 없이’ 진행된다. 문명화된 목적 없이 경제를 독점한 계급의 역사적 실패는 우리에게 ‘역사의 종말’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투자와 재투자를 반복하는 경제의 단기주의(Short-termism)에 의해 도처에서 의미가 소멸하는 상황에서 인간적 계획은 실현할 길이 막막해진다. 이런 식으로 금융의 세계화를 통해, 부조리함이 종교적 환상과 공모해 모든 것을 압도해버리는 ‘비(非)세계’(Non-monde)가 급작스럽게 도래한다.

의미 소멸, 인류 쇠퇴의 징후

인류가 소유하게 된 거대한 힘이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시대에 구조적인 근시안적 사고가 지배력을 넓혀가고 있다. 모든 것이 사유화되면서 공동의 통제를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창조한 물질적·정신적 생산물이 위에 군림하고 우리를 짓밟는 맹목적인 힘으로 화한다. 주요 8개국(G8) 정상들이 모인다고 해서 심각한 소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방향을 잃은 인류가- 생태학적이면서 동시에 인류학적 의미에서- 막다른 길을 향해 돌진한다는 위기의식은 이런 상황에서 도출된다. 이처럼 인류가 퇴행의 길로 접어들었음에도 우리는 호모사피엔스의 운명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지금, 우리는 고통에 찬 비명 소리에 귀를 막고만 있을 것인가?

인간의 상품화, 가치의 평가절하, 의미의 소멸은 감히 말하건대 ‘한계를 모르는 문명 파괴’의 징후이다. 그렇다고 사회적 비참과 학살로 얼룩진 지난 두 세기가 더 좋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유 기업’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20세기 말, 사람들은 평화로운 민주주의가 완전히 정착됐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우리는 최악의 폭력인 ‘부드러운 폭력’의 독재를 경험하고 있다. 그 와중에도 곳곳에서는 피 흘리는 전쟁이 계속된다.- 인종 청소, 가난한 나라에 대한 무력적 약탈, 고도화된 테러 기술, 고문의 합법화 등 앙드레 토젤이 “글로벌화한 비(非)세계의 야만”(3)이라고 명명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깨끗한 폭력 혹은 상징적 폭력- 사활을 건 기업 간 경쟁, 주가 상승을 위한 구조조정, 갈수록 고도화되는 기업과 도시의 감시 체계- 과 더불어, 일상적으로 혹사당하는 인간 의식, 서서히 의식을 잠식하는 타자에 대한 온갖 혐오, 지배적인 냉소주의에 의한 시민문화 소멸 등의 현상이 목격된다. 우리의 ‘계급의식’은 이제 지금의 세상이 어떻게 구조화됐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신적 퇴행이 재앙 수준에 이른 것이다. 나치즘이 계급에 관한 마르크스의 사유를 “하나의 인민, 하나의 제국, 한 명의 지도자”(4)로- 즉, ‘계급 없는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대체함으로써 지지를 얻어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언급한 현대 자본주의의 4가지 재앙을 곱절로 증폭시키는 다섯 번째 재앙은 ‘대안의 체계적인 추방’이다. 지난 시절 혁명의 위험성을 충분히 절감했던 지배계급은 혁명이 발생할 여지를 제거하기 위해 고심해왔다. ‘좌파 중의 좌파’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를 보라. 이제 시스템의 논리가 자발적인 추방을 강요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갈수록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생산함으로써 자신의 무덤을 판다는 사실을 갈파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낙관주의는 오늘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생산 혁명은 임금노동자들을 원자화하고, 성역화한 금융의 지배는 노동자계급을 무장해제한다. 냉혹한 현실 앞에서 노동자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만다.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광대한 열망은 현실적 출구를 찾지 못하고 무력감에 빠져버린다. 제도권 정치인들의 거짓말에 질린 유권자들은 투표 자체를 거부한다. 이윤 추구의 광기 앞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만 팽배하다. ‘자유’를 주창하는 시스템마저 마거릿 대처처럼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는 말만 반복한다. 2008년 불어닥친 대규모 위기에도 시스템이 끄덕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금융시장과 신용평가사의 절대권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핵무기와 인터넷의 시대에 경험하는 로마제국의 분위기는 종말을 예비하는 재앙의 전주곡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부드러운 폭력이라는 최악의 폭력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이 글이 말하는 것처럼 인류학적 위기가 그토록 심각하다면 왜 생태학적 위기만큼 부각되지 못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인류학적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을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가 그런 질문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생태학적 사유는 인류학과 다른 문화에 기초한다. 비인간적 생산 방식보다는 잘못된 소비 방식을, 이윤율의 독재보다는 테크노사이언스의 지배를, 계급의 이해관계보다는 사회관계의 무책임함을 비판한다. 따라서 생태학적 관점은 생산관계의 변혁보다는 소비의 올바른 개혁을 추구한다. 이렇게 축소된 생태학적 개혁은 프랑스 CAC40 증권시장에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한다. 심지어 그들은 사업이나 정책을 함께 추진해갈 수도 있다. ‘생태학적 사고’는 전세계적으로 쉽게 보편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인류학적 위기만큼 치명적인 생태학적 위기는 이윤 극대화를 위한 단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2개의 위기는 서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환경과 인류 중 한쪽만 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윤 축적 시스템에 단호하게 반대하지 않는 생태주의에 미래는 없다. 이것이 ‘좌파 생태주의’라는 모호한 용어가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큰 분노가 우리를 정치로 이끌 것

인류가 처한 상황이 앞에 묘사한 대로라면 실로 암울해 보인다. 너무 일방적인 묘사인가? 우리에게 지상명령이 된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을 위한 객관적 전제조건과 주관적 제안이 얼마만큼 형성되는지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5) 많은 것이 세상이 불가피하게 ‘악화일로’로 빠지고 있다는 끔찍한 느낌을 주지만 그것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우선 경향을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임무의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 우리의 임무란 생태학적 입장과 동등한 차원에서 인류학적 입장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있다. 그래야만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난 유럽의 군중들과 월스트리트에 대항해 들고 일어선 미국 시민을 보라. 오늘날 행동으로 표출되는 이들의 분노는 우리가 방어해야 할 문명의 윤리적 측면과 선명하게 일치한다. 깊숙한 곳에서 분출한 무엇인가가 정치를 뒤흔들고 있다. 장 조레스의 말처럼, 작은 분노는 우리를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지만 큰 분노는 우리를 다시 정치로 인도한다.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분노는 우리를 새로운 행동으로 인도한다. 이미 충분히 실패를 경험한, 지도부가 이끄는 과거식의 혁명이 아니라 혁신적인 시도와 조직 방식을 공동으로 고안해내는 ‘모든 층위’에서의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발명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만 악화일로에 빠진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가능한 것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인식에 필연적인 것에 대한 가장 야심찬 비전을 결합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인류를 지키는 일에 나서야 한다.

마르크스가 1843년 5월, 루게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의 결론을 대신한다. “제가 현시대를 과대평가한다고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만약 현시대에 절망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바로 절망적 상황이 저를 희망에 가득 차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글. 뤼시앙 세브 Lucien Sève (철학자)
최근 저서로 <오늘날의 마르크스를 생각한다- 2권, 인간?>(Penser avec Marx aujourd’ hui, tome 2: L’homme?·La Dispute·파리·2008) 등이 있다.

번역. 정기헌 guyheony@gmail.com

(1) Marie Pezé, <모두 죽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고통을 겪는다>, Pearson, 2008, Yves Clot, <진심으로 하는 노동>, La Découverte, 2010 참조.
(2) 유명한 광고 카피, ‘나는 소중하니까요’(Parce que je le vaux bien)에 내재된 냉소주의. 여기서 여성은 마케팅 상품으로서만 ‘소중하다’.
(3) André Tosel, <문명들, 문화들, 분쟁들>, Kimé, 2011, p.139와 제4장의 탁월한 글들을 참조할 것.
(4) 필자의 책, <L’homme?>(인간?) pp.276~292, 하이데거의 사상을 분석한 글 참조.
(5) Jean Sève, <현존하는 미래, 자본주의 이후>, La Dispute, 200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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