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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베를루스코니
안녕, 베를루스코니
  • 안영춘
  • 승인 2011.11.11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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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가 조건부 사임 의사를 밝혔다는 소식은 이 글을 쓰기 직전에 들려왔다. 그를 위기로 내몬 건 어린이 성매매 혐의 같은 숱한 범죄형 추문이 아니었다. 재정위기 앞에서 이 권력의지의 화신도 무릎을 꿇었다. 금융자본의 압도적 우위를 조장해온 우파가 마침내 권력의 장에서 패퇴하는 청신호일까. 섣부른 해석이다. 이탈리아에서 좌파가 집권할 가능성은 아직 반반이다. 좌파 집권이 곧바로 민중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베를루스코니보다 앞서 비슷한 이유로 사임한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는 좌파다.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 의장이기도 하다. 안토니오 그람시(그도 이탈리아 사람이다)의 저 유명한 표현을 빌리면, “위기는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못한 시기”다(<옥중수기>). 바로 지금이 위기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1월호는 전세계 좌파들의 다양한 처지와 전략을 살폈다. 강력한 공산당이 존재하고, 오랫동안 유럽 좌파에 영감을 준 이탈리아의 좌파는 오늘날 지리멸렬하다(16면). 63년 동안 좌파 정부가 집권해온 프라토에서마저 우파가 집권했고, 이곳 늙은 좌파들의 일상은 추억 속에 머문다. 좌파의 이런 양상은 유럽 전반에서 두루 목격된다. 설령 어렵게 집권했더라도 현실론을 들어 우파와 별로 다르지 않은 정책을 추진해왔다(10면). 이 사슬을 끊으려면 현재 유럽의 질서뿐 아니라 과거 사회당 정책과도 단절할 만큼 급진적이어야 한다고 <르 디플로>는 지적한다. 그나마 선전하는 곳은 남미 정부들이다(14면). 이들도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민중의 불만 사이에서 힘겨운 걸음을 내딛고 있지만, 좌파 정부 간의 연대도 그만큼 공고해지고 있다.

이 글을 한창 쓰고 있을 때, 한진중공업 노사 협상 타결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농성 해제 소식이 들려왔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지상 35m 높이의 크레인 위에서 308일을 버텼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그녀를 찾아가 먼발치에서 고통을 함께 나눴다. 국회에서는 일부 야당 의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조남호 회장 등 한진중공업 경영진을 청문회에 세웠다. 노동계와 생활 세계, 정치권이 손잡고 정리해고라는 자본의 일방적 폭력을 마침내 막아낸 셈이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미래의 기선을 잡은 것도 아니다. 지금 국회에서는 대한민국 헌법보다 우위에 서서 제2, 제3의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양산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안을 놓고 격돌이 벌어지고 있다(1, 28면). 대한민국, 바로 여기가 지금 위기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진보 세력은 제도권 정당 밖으로 뛰쳐나가 더욱 급진적 질서를 기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젊은 논객 홍성일의 목소리는 되새겨볼 만하다(25면). 물론 진보는 “더욱 모험적이어야” 하고 “기존 상식 바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진보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온몸을 던져온 이들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권 획득을 제1의 목표로 두고 합종연횡하는 일부의 행태를 겨누고 있다. 11월호 한국 서평(<신자유주의의 탄생>, 장석준 지음)도 견주어 읽으면 흥미로울 듯하다(35면). 저자는 자신들의 정치적 고향인 ‘생활 세계’를 떠나 ‘국민국가’에 과잉 집중한 좌파가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라고 일갈한다.


본사 소식을 한 말씀 전한다. 한국판 편집인이던 홍세화씨가 얼마 전 <르 디플로>를 떠나 진보신당 당대표 선거에 나섰다. 나름의 진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랐다”고 고백한다. 곁에서 가까이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확장’한 것이라고 믿는다.


글. 안영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장 editor@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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