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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주, 환경 그리고 소녀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주, 환경 그리고 소녀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1.12.31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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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 버틀러가 지적하듯이 ‘소녀’라는 단어 안에는 분명히 고정된 젠더 규범이 존재한다. 시몬 드 보봐르로부터 출발한 ‘여성’ 담론에 의한 소위 통렬한 이 비판의식은 ‘소녀’를 여성이라는 의미에서조차 소외시켜 버리는 속성을 밝혀내기도 했다. 심지어 ‘girl’에 포함되어 있는 ‘g’와 ‘r’은 어원적으로 볼 때 어린 동물, 작거나 시시한 것, 혹은 전성기가 지나버린 어떤 것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는 정황만으로도 ‘소녀’라는 단어 속에는 지배 규범의 의미가 뒤엉켜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여자 아이”라는 의미는 14c 후반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발견되었고, 15세기 중반부터는 “모든 젊은 미혼 여성”에게 적용되기 시작했으며, “연인”이라는 의미는 1640년대부터 발견된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이와는 상관없이 보편적인 여자를 언급하는 의미로 사용된 흔적은 19세기부터 확인되다가, 20세기에 이르러, 특별한 매력을 가진 여성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 의미는 1953년에 개봉한 영화 <The girl next door>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소녀’에게 가해지는 젠더 규범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흡수된 ‘소녀’의 의미를 말하고자 한다. 이를 테면 젠더 규범 문제를 이른바 반드시 극복해야할 전-지구적 문제로 상정하고, 소녀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인류 전반이 취해야할 각성의 문제로 바꿔보면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 때 마침 한국영화가 K-culture의 바람을 일으키는 와중에, ‘소녀’라는 의미의 변주를 ‘환경’의 문제와 ‘우주 개발’ 이슈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래서 내린 결론. 한국영화에 흡수된 ‘소녀’의 의미는 ‘환경’과 ‘우주’와 연결되어 다른 차원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

이를 뒷받침 할만한 한국영화가 아직은 많지 않다. 그리고 한국영화의 독창성이라고만 말하기에도 멋쩍은 부분이 있다. 언뜻 생각나는 것만으로도, <에이리언 2>에서 등장하는 어린 소녀, 뉴트(캐리 헨)가 떠오르니까. 하지만 뉴트만 하더라도, 리플리(시고니 웨버)가 모성애로써 보호해야할 대상에 불과했다. 그러니 한국영화에서 등장하는 소녀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승리호>의 꽃님이(박혜린)는 이미 환경문제와 연결된 이미지를 영화<승리호>를 통해 얻었고, 실제로 '2021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에 이러한 이미지를 등에 업고 등장하기도 했다. <고요의 바다>의 루나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므로 두 영화의 소녀들을 통해서 이를 테면 이런 질문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환경 파괴 이후 지구를 구원할 운명을 왜 어린 소녀가 짊어지는가?’ 이 질문은 우리를 ‘소녀’라는 의미가 품고 있는 젠더규범의 문제에서 인류 보편의 문제 앞으로 인도한다.

 

더불어 이로써 나는 K-movie의 특징으로써 ‘소녀’ 담론을 공유하고 있는 두 영화 <승리호>(2020)와 <고요의 바다>(2021)를 말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영화<승리호>의 꽃님이에 대해서는 앞서 이 지면을 통해 다룬 바 있다.(아래 '관련기사' 참조: "꽃님이라는 Ghost") 그렇다고 해서 거창하게 환경을 걱정하는 K-movie라고 한껏 추켜세우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이슈를 통해 한국형 SF영화라고 할만한 장르에는 환경의 문제가 연결 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고요의 바다> 루나와 물

<고요의 바다>에서 지구는 예컨대 <인터스텔라>와 마찬가지로 물 부족 현상에 시달린다. 지구에서 사라진 물이 아이러니 하게도 대기조차 없는 달에서 발견(개발, 실험)되었다는 설정은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이냐의 여부를 떠나 지구와 달의 대칭적 구조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손색은 없어 보인다. 특히 이 구조는 송지안(배두나)과 송원경(강말금)을 통해서도 보완되는데, 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은 ‘루나’(김시아)가 맡는다. 지구와 달을 연결하는 건 ‘물’이고 송지안과 송원경을 연결하는 건 ‘루나’인 셈이 된 것이다. 게다가 놀라운 사실이 확인되는데, 루나 역시 무한히 복제된 존재이고, 물 역시 무한히 증식할 수 있는 바이러스라는 점이다. 물이라는 바이러스에 면역 체계를 가진 루나는 그래서 빤해 보이지만 잘 짜인 이 구조를 최종적으로 ‘봉합’한다. 또한, 위험한 물과 그럼에도 유일한 희망일 수밖에 없는 그 물을 확보하기 위한 눈물겨운 사투는, 사실상 환경 파괴 후 재건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이야기와 나란히 겹친다. 거기에서 충돌하는 신파적 상황은 눈에 거슬리지만 어쨌든 루나가 <승리호>의 꽃님이처럼 유일한 희망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한 가지 질문은 더욱 또렷해지기 까지 한다. ‘환경 파괴 후, 우리는 정말 저런 대안을 가지게 될까?’ 영화가 상상인 한 이 질문의 대답은 허무하다. 게다가 나약한 소녀를 설정한 허구적 상상력은 이에 대한 부정, 반대의 생각을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그럼에도 왜 ‘소녀’인가?

 

대답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부정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이 전개하는 방법처럼 ‘환경’이라는 보편자로부터 개별자로서의 ‘소녀’를 해방시켜준 다고 보면 어떨까. 그렇게 해방된 ‘소녀’라면 기존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독자성(유일성)을 초인처럼 보여주는 이유가 좀 설명되지 않을까? 실제로 꽃님이와 루나는 초인의 능력을 발휘하니 말이다. (실제로 환경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레타 툰베리도 소녀로서 그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건, 소녀들의 그 능력은 우리의 독자적인 결단을 직접 은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녀의 초인적 힘은 나의 독자적 결단의 힘과 같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독자적 결단의 힘이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소소하지만 강력한 환경을 향한 나의 결심이다. 일회용품 줄이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등등...)

한국형 SF영화에 등장하는 소녀는 우리에게 그런 초인과도 같은 독자적 결단이 왜 지금 필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환경이 선사하는 축복은 지금 나만의 그 독자적이며 초인적인 결단을 실천해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실천으로써 우주, 환경 그리고 소녀는 서로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관계가 되어간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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