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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의 문화톡톡] 멈출 수 있는 용기: <연극연습4. 관객 연습-사람이 하는 일>
[양근애의 문화톡톡] 멈출 수 있는 용기: <연극연습4. 관객 연습-사람이 하는 일>
  • 양근애(문화평론가)
  • 승인 2021.12.31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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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연습 프로젝트’는 “연출, 희곡, 연기 등 연극을 이루는 요소에 변수를 인풋하여, 연극의 확장과 새로운 연극의 발생을 시도하는 연극 함수프로젝트”로 지난 2018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2018년 연출 연습 <세 마리 곰>으로 시작하여, 2019년 연기 연습 <배우는 사람>, 2021년 극작 연습 <물고기로 죽기>를 선보였다. 네 번째 프로젝트는 관객 연습 <사람이 하는 일>로 지난 12월 15일부터 19일까지 헤이그라운드 무대에 올라갔다. 이번 공연은 2003년 창단한 장애여성 극단 ‘춤추는허리’와 함께 만든 공연으로 장애여성이 직접 무대에 등장하여 관객과 함께 공연을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연극을 이루는 4요소가 희곡, 무대, 배우, 관객이고 ‘관객이 있어야 연극이 완성된다’라는 말도 흔히들 하지만, 관객의 필요성이 아니라 관객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 지에 대한 고민은 그리 깊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관객성’을 연구할 수는 있어도 연극을 보러 가는 관객 스스로 관객의 역할에 관해 고민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소위 ‘관크’로 불리는, 공연 관람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은 종종 들려오지만 그 비난 속에도 무작위로 구성되는 관객들을 향한 우려는 있을지언정 관객의 권리나 관객-됨에 대한 성찰은 잘 보이지 않는다.

페미니즘 연극이나 퀴어 연극을 표방하는 연극이 많아지면서, 또 팬데믹 사태로 인해 극장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면서, 특정 주제를 내세우는 연극의 경우 관객이 그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수용하게 된다. 이는 안전에 대한 감각이기도 한데,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방역 조치 등으로 개인정보를 제작진에게 제공하게 되면서 일부러 공연을 방해할 작정으로 온 관객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체감이 든다. 작은 극장에 모여 앉은 소수의 관객들과 모종의 연대감을 느낀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장애연극을 보러가는 관객도 한정적일 수 있다. 장애인 예술가들을 주축으로 한 극단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장애인 예술가와 비장애인 예술가가 함께 등장하는 공연은 아직 많지 않고 무대에서도 객석에서도 장애인을 만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최근 배리어프리를 시도하는 연극이 많아지면서 장애인 관객을 만날 기회가 늘어나긴 했지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비장애 중심 연극에는 비장애인 관객들이 모일 수밖에 없다. 연극에서 장애 감수성이 높아지고 접근성 마련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보편화되는 일은 아직 멀다.

“이번엔 관객님들 차례입니다”라는 공연 안내 문구는 관객을 둘러싼 상념을 일으켰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소수자의 인권을 향한 연극이 다양한 사회적 활동과 연계되고 있지만, 극장 안에서 느낀 뜨거운 연대감이 극장 밖을 나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휘발되는 날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선거가 다가오면서 하루가 멀게 거짓말 같은 뉴스가 들려오고 관련 사안을 비판하는 기사에 달린 혐오와 차별의 댓글을 보고 있으면 극장 안에서 느낀 조금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기대는 꿈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연극연습4. 관객 연습-사람이 하는 일>을 보고 나오는 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관객 연습에서 호명한 ‘시민’이라는 말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진1-촬영_원준혁 ⓒ연극연습 프로젝트
사진1-촬영_원준혁 ⓒ연극연습 프로젝트

<연극연습4. 관객 연습-사람이 하는 일>은 ‘토론연극’이다. 공연 시간이 25분~2시간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날그날 관객의 참여도에 따라 러닝타임이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공연은 주어진 대본대로 25분가량의 연극을 보여주고 그 연극을 다시 진행하면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자신을 ‘조커’라고 소개한 진행자는 관객들이 연극의 장면을 다시 시작할 때 외칠 구호 ‘액션’과 연극을 중단시키고 싶을 때 외칠 구호 ‘멈춰’를 어떤 동작으로 하면 좋을지 물었다. 그렇게 관객의 참여가 시작되었다. 주저하던 관객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연극은 지하철 7호선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는 길을 찾는 장애인 영화의 이야기, 지하철 장애인석을 차지한 비장애인 때문에 고충을 겪는 수진의 이야기, 수진이 출근길 지하철에서 장애인 화장실을 찾는 이야기, 그리고 공원에서 애인과 데이트를 하다가 사회복지사와 갈등을 겪는 영화의 이야기 이렇게 네 개의 에피소드로 진행되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길, 지하철 역사에 마련된 화장실에 들러 볼일을 보고 환승역을 찾아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은 비장애인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데이트를 하고 그 친구와 헤어지기 싫어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일도 비장애인이 스스로 선택한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이다. 공연에서 진행된 에피소드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상’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장애인이 비장애인 시민과 함께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억압과 차별의 언어들 역시 일상적이라는 사실이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섞여 있지만, 배우는 모두 장애인이다. 장애인이 비장애인 시민 역할을 맡아서 하는 장면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영화와 같은 재현 매체에서 장애인을 연기하는 비장애인 배우들이 박수를 받아온 역사가 뇌리를 스쳤다. 장애인 소수자를 흉내내기 위해 몸을 과장되게 움직이거나 목소리를 바꾸고 비장애인 배우는 장애를 잘 재현했다는 찬사를 받는다. 그러한 배우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 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비장애인 배우가 함으로써 사회의 공포와 혐오를 ‘마법처럼 초월’하고 관객을 안심시키는데(*) 일조해온 측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연습4. 관객 연습-사람이 하는 일>에서 장애인 배우들은 비장애인을 흉내내지 않았지만, 그들이 받는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그들 스스로가 발화함으로써 당사자성을 역전시킨다. 가령, 장애인석에 서서 휠체어에 함부로 몸을 기댄 비장애인이 오히려 “요즘 장애인들이 더 살기 좋다더라!”라며 큰소리를 치는 것이나, 그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비장애인이 “장애인 아가씨가 좀 예민하네.”, “몸도 불편한데 예민하네.”라고 말을 거드는 장면이 그렇다. 

연극은 이와 같은 일상적 차별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관객이 ‘멈춰’를 외치는 순간 중단된다. 그리고 관객이 직접 무대로 나가 해당 장면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거의 첫 장면에서부터 나오는 차별적인 말들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선뜻 무대로 나서지 못했다. 남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성향 때문일 수도 있지만, 장애인은 언제나 사회적 시선 속에 다른 몸, 어딘가 ‘이상한 몸’, ‘보통이 아닌 몸’으로 노출되지만, 비장애인은 군중들 속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연극에는 노골적인 혐오의 말도 있었지만, 보호나 배려를 명목으로 함부로 행해지는 선량한 차별도 있었다. 그게 왜 문제인지는 알지만 누군가 ‘멈춰’를 외쳐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러나 진행자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하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불편했다.

다행히 용기를 냈던 다른 관객들 덕분에, 처음에 진행된 것과 달리 수정된 장면에서 영화는 지하철을 혼자 타는 연습을 하고 수진은 지하철 장애인석과 장애인 화장실을 무사히 이용하고 영화는 사회복지사에게 휴대폰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언제고 마주칠 수 있는 일상적인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민들이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차별에 대항하고 잘못된 길로 가는 정치를 멈추기를 요구해야 한다. ‘시민연극’과 ‘민중연극’을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이 연극의 지향점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2018년, 당시 ‘생각많은 둘째언니’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활동하고 있던 장혜영이 ‘당신에게 장애인 친구가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장애인 인구가 전체 인구 중 5%를 차지하지만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 중에 장애인이 없다는 사실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사회는 이상하다. 소수자들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사회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격리시키고 배제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기만적인 정책에 편승하면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머무르려는 시민들에게 장애인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친구라면 다른 부분을 서로 인정하고 친구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을 지지하고 필요한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2 공연 포스터 ⓒ연극연습 프로젝트
사진2 공연 포스터 ⓒ연극연습 프로젝트

 

<연극연습4. 관객 연습-사람이 하는 일>의 포스터는 연극의 내용과 사뭇 다르게 비감하다.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를 위해 오체투지로 연대하는 스님의 모습을 담고 있는 포스터는, 장애인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차별을 다루면서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묻는 이 연극이 사실은 더 많은 사회적 이슈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민으로서 다양한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하금철 기자, “장애인 연기하는 ‘비장애인’ 배우, 왜 박수 받아야 하나?”, 비마이너, 2015. 2. 12.

 

글 · 양근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극작, 드라마터그, 평론을 병행하며 극 창작에 참여하고 있다. 2016년 방송평론상을 수상했다. 기억과 역사의 길항 및 문화의 정치성 수행성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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