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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목격된 스펙터클을 어찌할 것인가 : 〈마이단〉, 폭력과 스펙터클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목격된 스펙터클을 어찌할 것인가 : 〈마이단〉, 폭력과 스펙터클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2.03.10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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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평론은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던 버전(134min Ver.)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영화 〈마이단〉 포스터 (출처: Довженко-Центр / 도브첸코 센터)<br>우크라이나 도브첸코 센터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이해를 돕고 우크라이나군을 지원할 모금을 위해 3월 2일 유투브를 통해 〈마이단〉(128min ver.)을 업로드했다. 영상에는 영어자막이 지원된다.<br>(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bbdarLkUKVI)
영화 〈마이단〉 포스터 (출처: Довженко-Центр / 도브첸코 센터)
우크라이나 도브첸코 센터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이해를 돕고 우크라이나군을 지원할 모금을 위해 3월 2일 유투브를 통해 〈마이단〉(128min ver.)을 업로드했다. 영상에는 영어자막이 지원된다.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bbdarLkUKVI)

스펙터클과 처분(Dispose), ’목격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수많은 역사학자와 국제전문가, 그리고 지구촌 사회는 오랜 기간에 걸쳐 러시아가 이번 사태를 일으킨 원인을 분석하고 연구할 것이며, 책임을 물을 것이다. 대단히 높은 확률로 역사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조치를 철저히 비난할 것이고, 이번 사태를 주도한 푸틴은 “정당화될 수 없는 러시아의 공격”[1]을 지시한 국가 수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기록과 정리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인류와 역사는 이번 사태를 어떻게 전승하고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전쟁과 같은 대규모 폭력사태는 그 자리와 그 시간을 벗어난 이들에게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구경거리’다.

반인륜적이며 끔찍하고도 혐오스럽고 경멸받을 언급이고, 이미 수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직간접적으로 언급했기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위의 언급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음에도 다시 한번 숙고해야 하는 문제가 내재해 있다. 우선 ‘구경거리’가 무엇인지 재고해보자.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1967)에서 구경거리(Spectacle, 이하 ‘스펙터클’)를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된 자본”이라고 밝히고 있다.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맹렬히 추격하는 방향은 스펙터클이 모종의 상태들과 상황에 의해 자본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스펙터클이라는 대상을 설명하기 중요한 것은 스펙터클은 자본이라는 점이 아니다. 축적이라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고, 나아가 이미지의 상태로 환원된다는 점이다.

이미지에는 필연적으로 원상태를 대상화하는 문제가 얽혀있다. 이는 반드시 ‘재현의 딜레마’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를 끌고 다니는 데, 그 이유는 대상화는 ‘처분’(Dispose) 과정을 통과할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엄청난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대규모 폭력사태라는 원상태에서 무언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처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처분’이 스펙터클을 목격하고 제작하는 동기가 되긴 어렵다. 처분은 원인보다는, 오히려 이미지의 결과에 가깝다. 구경거리를 보고 만드는 행위는 ‘처분’과 같은 전략적 혹은 합리적 사고보다 원초적이고 근본적이며 심오한 동기여서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충돌과 폭력, 파괴와 붕괴는 역사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엄청난 스펙터클이 되었다.

 

영화 〈마이단〉 스틸컷 (출처: loznitsa.com / 세르게이 로즈니차 공식 홈페이지)
영화 〈마이단〉 스틸컷 (출처: loznitsa.com / 세르게이 로즈니차 공식 홈페이지)

점화와 처분의 매커니즘, 처분이 작동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처분’은 스펙터클을 만드는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렌즈와 같다. 우크라이나 사태만 두고 본다면, 그 장소에 대한 생애적 체험을 쌓아 온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맥락들이 파편화되어있다. 가령, 우크라이나는 신흥국이 밀집된 CIS에서도 주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루던 나라였다. 하지만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CIS를 포함한 신흥 시장과 신흥국이 대거 위기에 빠진다. 우크라이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3년 우크라이나는 외화 보유고가 바닥나는 국가 부도 위기에 봉착한다. 다시 말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고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하는 2008년에서 유로마이단이 일어난 2013년까지, 우크라이나는 짧게 잡아도 5년간 대침체로 발생한 꽤 심각한 국가적 불황 속에서 불확실과 불안의 시기를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이나가 대침제와 함께 불안과 불확실의 5년을 통과하는 사이, 러시아는 미국이 9.11테러에 대한 대응으로 벌인 ‘테러와의 전쟁’으로 막대한 수혜를 입고 있었다. 시리아, 아프카니스탄 등 중동지역의 위기는 가파른 에너지 원자재 인플레이션을 불러왔고, 러시아 원유를 포함한 러시아 에너지 원자재 수출은 러시아의 국가적 위상을 재고시켰다. 우크라이나가 위기와 고난의 5년을 지내는 사이, 러시아는 회복과 재기의 5년을 보냈던 셈이다. 홀모도모르 등으로 국가적 트라우마를 남길 만큼 심각한 국가 간 가해를 가했던 러시아의 회복이 우크라이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쳤는지는 얼핏 쉽게 예측할 수 있을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통과한 5년은 우크라이나를 자유주의와 범슬라브주의로 갈라놓았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스펙터클이 2008년 8월 8일 조지아가 남오세티야의 독립에 불만을 품고 남오세티야를 침공하며 개전한 남오세티야 전쟁이었다. 전쟁은 8월 12일 조지아의 패배로 종전되었다. 전쟁에는 소련 해체 이후 캅카스와 CIS 지역 등에서 에너지 패권을 다투는 러시아와 미국-유럽의 갈등, 더 깊게는 양차 세계대전 이후 사상적 계보가 복잡하게 꼬여버린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해석차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하지만 ‘4일’이라는 압도적인 스펙터클의 방향은 명확했다. 서방은 유불리에 따라 가치를 판단하지만, 러시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그렇지 않다”라는 이미지가 주는 범슬라브주의의 단순함은 08년 이후 불안과 불확실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에 누구와 협력해야 하는지 기준을 주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불확실한 서방보다는 러시아의 명확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는 합리적인 결정으로 보였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순함에는 중요한 오류가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협력의 관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가 단순하다는 명제도 사실이 아니다. 사태를 복잡하게 만든 에너지 패권에 러시아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고, 민족자결주의를 남용하여 개념의 계보를 꼬아놓는데도 러시아의 공은 컸다.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경제에 크게 기대고 있는 만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협력의 대상으로 볼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러시아 관점에서 우크라이나는 무시해도 상관없는 국가인 셈이다. 그렇다고 유럽을 포함한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협력의 대상으로 본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서방 관점에서 우크라이나는 체스판의 말 중 하나였다. 양 측에 샌드위치 상황으로 끼여 국가적 자존감을 버려야 한다는 상황은 우크라이나 대중과 정부를 모두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달리 말해 적당한 자극만 들어온다면, 우크라이나는 언제든 스펙터클을 터뜨릴 준비가 된 셈이었다.

판이 깔린 것은 막다른 상황에 놓은 우크라이나의 야누코비치 정부가 러시아의 차관을 얻느냐, 유럽연합의 차관을 얻느냐의 갈림길에서 러시아 차관을 선택하면서였다. 08년 대침체 이후 5년간 불안과 불확실의 시간을 보내며 국력이 떨어진 우크라이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차관을 얻어야만 했다. 당시 유럽은 신자유주의 원칙을 수용할 것을 선제조건으로 200억 달러의 차관을 제시한다. 이는 우크라이나 시장에 대한 고강도 구조조정으로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를 수용한다면 우크라이나는 이미 나빠진 불평등 상태에 기름을 부어야 했으며, 에너지 패권을 신자유주의 진영에 넘긴 주체로써 대내외적인 국가위기에 봉착할 것이 분명했다.

반면 러시아는 어떠한 선제조건 없이 즉시 150억 달러의 차관을 지급하겠다고 밝힌다. 물론 선제조건이 없는 것이지, 조건 없이 우크라이나를 돕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러시아의 차관을 받는 순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관세동맹을 맺어야 했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완전히 러시아 중심의 경제연합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러시아에 완전히 종속된 경제체제로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야누코비치 정부가 맞닥뜨린 딜레마는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야누코비치 정부는 유럽연합이 요구대로 법을 개정했으나 경제개혁만큼은 수용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실질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답이 정해진 선택지를 앞에 두고 몇 차례나 결단을 유보한 것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야누코비치 정부가 결단을 유보하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본격적인 경제제재에 돌입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수입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고, 그 결과 우크라이나는 수출액이 10% 넘게 폭락하는 위기를 맞닥뜨린다. 이는 국제관계의 역학상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차관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친유럽적 행보를 보이던 티모센코 전 총리를 직권남용으로 구속하는 등 독단적인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그를 좋은 지도자의 모습으로 평가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벌어질 일은 이미 야누코비치의 손에서 벗어난 일에 가까웠다.

정부가 빈사에 가까운 상태를 보이자, 우크라이나에서는 10월부터 친서방 세력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정부 운동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여기에는 흥미롭고도, 한편으로는 아스트랄한 상황이 있다. 편의상 친서방 세력이라고 명명하긴 했으나 반정부 운동의 움직임에는 친서방과 진보 세력은 물론이요 우파에서 심지어 친러 세력까지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그야말로 “무리”였다. 이들은 11월 21일 유럽연합과 협상 결렬을 계기로 키이브의 마이단 네잘레주노스티(Майдан Незалежності)[2]에 집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1월 30일, 야누코비치 정부가 이들을 상대로 베르쿠트 특수부대를 투입하면서 반정부 운동 진영에 사상자를 냈고, 12월 1일을 기점으로 반정부 운동은 내전 수준의 폭력사태로 치닫는다. 세르게이 로드니차(Sergei Loznitsa)의 <마이단>(Maidan, 2014)은 이 사태와 맥락을 처분하는 스펙터클을 다루고 있다.

 

영화 〈마이단〉 스틸컷 (출처: loznitsa.com / 세르게이 로즈니차 공식 홈페이지)
영화 〈마이단〉 스틸컷 (출처: loznitsa.com / 세르게이 로즈니차 공식 홈페이지)

목격된 폭력의 스펙터클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복잡하고 파편적인 지역감정, 소련의 해체와 CIS와 캅카스 등을 둘러싼 애너지 패권과 신냉전의 국제정세, 08년 대침체 이후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흥국과 신흥국민의 삶까지 유로마이단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얽힌 사태들을 ‘반정부’라는 모토이자 스펙터클로 처분하는 대규모 충돌사태였다. 동시에 푸틴의 야욕을 저지할 기반을 마련하는 아이러니한 폭력의 카니발이기도 했다. 대규모 폭력사태가 스펙터클을 주조하여 무언가를 처분하는 현장의 목격자가 된다는 건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원초적이고 근본적이며 심오하기까지 한 현장을 지켜본다는 매혹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이러한 딜레마 때문에 폭력 현장을 다룬 대부분의 걸작은 파트라시오 구스만(Patricio Guzmán)의 <칠레 전투>(The Battle of Chile, 1975)처럼 특정한 진영의 관점에서 선과 악을 분명히 한 뒤 사건의 감정선을 정리하거나, 클로드 란즈만의 <쇼아>(Shoah, 1985)처럼 스펙터클이 소진된 풍경을 바라보거나, <더 코브: 슬픈 돌고래의 진실>(The Cove, 2009)나 <더 게이트키퍼즈>(The Gatekeepers, 2012)처럼 장르의 힘을 빌려 스펙터클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스펙터클의 처분이 가져올 난감함을 우회하곤 한다.

스펙터클의 난감함은 영화가 ‘구경거리’를 다루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윤리의 게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온다. 현장이 볼 가치가 있다고 해서 그 현장이 공유되고 재생산되어야 하는 건 아닌 셈이다. 스펙터클의 현장 자체가 예민한 문제인 만큼, 포르노나 스너프 등 상식의 영역에서 벗어난 영화가 아니라면 매혹에도 불구하고 스펙터클의 현장 자체를 직시하길 꺼릴 수밖에 없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도 있을 테지만, 로드니차의 <마이단>은 우리 앞에 목격된 스펙터클을 어떻게 소화하고 기록할 것인지 참고할만한 사례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러시아시네마를 따라온 시네필이라면, 키라 무라토바(Кіра Мура́това, 1934~2018, Ukraine)의 후예로 불리는 세르게이 로드니차를 모를 수 없을 것이다. 2010년 이전까지 로드니차는 알렉산더 소쿠루프(Alexander Sokurov, Russia)의 <인간의 외로운 목소리>(Odinokij Golos Cheloveka, 1987)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상적인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다. 2010년 극영화 데뷔작<나의 기쁨>(Schastye Moe)이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며 러시아의 젊은 거장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Andrey Zvyagintsev, 1964~, Russia)의 인정을 받는 등 국제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그 후, 로드니차는 <학이 난다>(Letyat zhuravli, 1957)가 생각날 정도로 러시아 영화의 정교(Orthodox)적 전통 속에 있는 듯한 <안개 속에서>(V TUMANE, 2012)라는 영화를 만들며 칸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을 받는다.

 

영화 〈나의 기쁨〉(좌)와 〈안개 속에서〉(우) 포스터 (출처: IMBD)
영화 〈나의 기쁨〉(좌)와 〈안개 속에서〉(우) 포스터 (출처: IMBD)

<나의 기쁨>과 <안개 속에서>는 죽음과 인간의 아이러니, 예상할 수 없는 삶의 방향과 폭력, 구원을 향한 열망같이 러시아 전통 문학이 지향하는 정교적 테마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두 영화가 주제를 다루는 태도는 매우 다르다. <나의 기쁨>은 러시아 지방을 오고가는 트럭운전사 게오르그의 눈을 통해 악행과 타인의 고통이 어떻게 생존의 법칙이 되고, 나아가 개인의 기쁨이 되어가는지 그린 끔찍한 블랙코미디 영화다. 반면 <안개 속에서>는 벨라루스에서 나치 점령기를 통과하던 한 청년이 열차 테러에 휘말려 저항군 게릴라와 독일군 사이에서 도덕적 단죄의 고통을 경험하는 장엄한 수난극이다.

로즈니차가 극영화에서 정교적 테마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은 <마이단>과 그 이후의 로즈니차 다큐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로즈니차는 폭력과 스펙터클이 예민하고 섬세한 문제라는 점을 <리바이어던>(Ливиафан, 2014)의 즈비아긴체프만큼이나 사악할 정도로 정교하게 이해하고 있다. 로드니차와 즈비아긴체프의 공통점을 폭력을 다룰 때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나눈다는 것이다. 폭력이 발생하는 것은 철저하게 신의 영역이다. 막을 수 없고, 대책과 방비는 우발과 우연 앞에 숙명적인 무력을 맞이한다. 그 무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인간의 영역이다. 그리고 신과 인간의 영역이 대면하는 장소가 스펙터클이 자리 잡은 곳이다. 만약 그들 영화에서 인물이 스펙터클과 대면한다면, 그건 답을 구하는 그들의 자발적 선택이다. 다만 폭력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항하고 반응하기 위해서는 스펙터클을 거칠 수밖에 없다.

구도자의 자세로 스펙터클에 걸어들어온 자들이 경험하는 폭력과 스펙터클의 관계는 일종의 폐쇄 회로여서 게오르기는 지방을 벗어날 수 없고(<나의 기쁨>), 수셰나는 산 밖으로 이동할 수 없으며(<안개 속에서>), 니콜라이는 바다를 벗어날 수 없다(<리바이어던>). 그러나 두 거장의 사악할 정도로 정교한 모습을 보이는 건 인물들을 폐쇄 회로 속에 가두었다는 데서 기인하지 않는다. 스펙터클은 신의 영역과 대면하는 구원의 조건이고, 따라서 필연적인 ‘처분’이며 가능한 최선의 상태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들의 장엄한 세계관은 숙명적 우연과 우발을 등에 업은 채 ‘처분’이 정당화된다는 데 그 사악한 정교함이 있다. 니콜라이가 신부를 붙잡고 물은 “왜 하필 접니까?”라는 질문의 답을 듣기 위해서 그의 집은 불도저에 부서져 처분되어야만 한다.

 

영화 〈리바이어던〉(좌)와 〈나의 기쁨〉(우)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리바이어던〉(좌)와 〈나의 기쁨〉(우)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라이프니츠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들의 관점은 스펙터클을 정당화하는 주요한 바탕으로, <마이단>에서도 주요하게 이용된다. 다만 <마이단>에서 로즈니차는 즈비아긴체프와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인다. <마이단>은 단 쇼트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시계열로 편집되었으며, 각 시퀀스가 과거와 연관을 갖지 않는 철저한 비가역적 편집을 유지한다. 오로지 결과로 이루어진 <마이단>의 편집은 스펙터클에 캐릭터를 입장시켜 서사를 만들었던 극영화와는 다르게 오직 스펙터클이 작동되기까지의 과정을 하드보일드처럼 건조하게 나열해놓으면서 즈비아긴체프가 구현한 드라마와는 선을 긋는다. 대신 <마이단>은 소쿠루프가 다큐에서 보여주었던 풍경과 서정의 세계에 가까운 모습으로 구현된다.

<마이단>이 집중하는 것은 진보부터 보수까지, 친서방에서 친러까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지독하게 얽힌 거대한 무리가 한 장소에 모여, 충돌하고, 파괴하여, 달성하고, 해산하기까지 보여준 운동성의 궤적을 스펙터클로 기록하는 것이다. 스펙터클 자체를 영화의 중심에 두는 작품은 대단히 희귀한 사례지만 <마이단>만 갖는 특징은 아니다. 본다르추크(S. Bondarchuk)의 <전쟁과 평화>(Война и мир, 1965~1967) 역시 스펙터클을 중심에 두고 있으나, <마이단>이 갖는 기록의 성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대규모 국책영화로서 러시아적인 톨스토이의 스펙터클에서 관객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밀어붙이는 질주감과 애국주의의 광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마이단>에서 질주감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규모의 차이 때문도, <마이단>이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이는 <마이단>이 카메라를 운용하는 방식에서 기인한 특징 중 하나다. <마이단>은 한 장면을 제외한 모든 장면이 푸티지와 고정카메라로 기록된 롱테이크로 구성되어있어, 카메라를 든 자가 가질만한 카메라의 인격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르포르타주를 떠올리게 만드는 <마이단>의 구성적 특징은, 종종 <마이단>이 중심에 둔 스펙터클과 충돌한다. <마이단>이 스펙터클의 쾌감과 매혹을 부정하는 영화는 결코 아니지만, <마이단>의 카메라 운용과 연출은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수행하고 있는 역할을 되돌아보게 만들며, 나아가 스펙터클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구도적인 힘이 있다.

이러한 구도적인 힘은 카메라에서 인격적 요소를 거의 완전하게 배제함으로써 ‘그것을 포착했다’라는 이미지의 자의성보다, ‘그것은 포착되었다’라는 이미지의 수동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온다. 이렇게 강조된 수동성에는 ‘카메라가 그 자리에 놓였다’라는 타의와 ‘카메라는 그 자리를 지켰다’라는 고정성이 얽혀있다. 이는 종종 카메라가 그것을 언제 기록했는지 공지하는 자막과 의미망이 연결되며 기록된 스펙터클의 풍경에, 앞서 언급했던 비인격적이고 수동적인 힘을 불어넣는다. 이러한 힘은 작품 내에서 단 한 번, 연출에 의해 구도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마이단〉 스틸컷 (출처: loznitsa.com / 세르게이 로즈니차 공식 홈페이지)
영화 〈마이단〉 스틸컷 (출처: loznitsa.com / 세르게이 로즈니차 공식 홈페이지)

영화의 중반 야누코비치 정부가 베르쿠트 특수부대를 투입하고 경찰은 마이단 네잘레주노스티를 포위한다. 반정부 측은 이에 저항하다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다.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이 사태를 기점으로 반정부 운동은 내전에 가까운 수준으로 격화된다. 본격적으로 폭력과 스펙터클이 파편처럼 흩어지고 얽히고설킨 사태들을 스펙터클로 처분하는 한복판, <마이단>의 중후반에는 언제 찍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질적인 쇼트가 등장한다. 로즈니차는 드론(CCTV일 수 있으나 위치상 드론에 가까워 보인다)을 통해 버드 아이 뷰(Bird's Eye View)에 가까운 부감으로 키이브의 마이단 네잘레주노스티를 내려다본다. 여기에는 어떤 사운드도 없다. 긴 침묵이 이어지는 이 쇼트는 굳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스펙터클이 휘두르고 있는 처분을 먼 곳에서 지켜보는 신의 시점과 맞닿아있다고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쇼트가 로즈니차가 극영화에서 답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스펙터클로 들어가는 구도자의 형상과 같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신성모독적일 수 있고, 자크 리베트가 지적했던 ‘천박함의 문제’[3]일 수도 있는 순간일 것이다. 로즈니차는 폭력과 스펙터클이 등장하는 순간 카메라를 돌리는 것 이외에는 카메라를 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대책과 방비가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순간, 우연과 우발이 필연적으로 대응을 요구하는 순간, 로즈니차가 선택한 것은 그 처분의 순간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을 빌리는 것이다. 그건 인간이 다가설 수 없는 사진적 이미지의 비인격에 스펙터클의 기록을 위탁하는 것이다. 이는 스펙터클 속으로 걸어 들어가 구원을 간구하는 간곡한 기도이며,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압도적인 ‘처분’ 앞에서 한계를 인정한 카메라를 든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인간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앞에 주어진 스펙터클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2013년 10월부터 2014년 3월까지 진행된 유로마이단(Євромайдан)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3]은 크림반도 전반에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2014년 4월, 우크라이나 돈바스(Donbass)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테러 활동을 전개하던 분리주의들은 도네츠크와 루간스키로 이루어진 노보로시아 연방(федеративное Новороссия)을 선언하고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교전을 벌인다. 공식적 노보로시아는 15년 5월 도네츠크와 루간스키 간 내분으로 해체되지만, 돈바스 전쟁(Війна на сході України)은 8년간 교착상태에 빠졌다. 2022년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은 우크라이나 내 군사작전을 지시했다. 어떤 방식으로도 정당화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푸틴의 반인륜적이며 끔찍한 조치로 이제 우크라이나는 ‘엄청난 구경거리’의 중심이 되었다.

2월 25일 러시아군은 체르노빌 원작력 발전소 점령을 시도했고, 원자력 발전소 일대의 감마선이 비정상적으로 폭증한 것이 감지된다. 젤란스키 대통령은 국가 총동원령을 승인한다. 같은 날 러시아에서는 대규모 전쟁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26일 유엔안보리가 소집되었으나 상임이사국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 중국이 기권하면서 결의안은 기각되었다. 27일 러시아가 국제금융결제망에서 퇴출되었고, 28일 러시아 국방부는 핵전력 강화 태세에 돌입했다. 3일 UN 총회에서 러시아 침공 규탄안 및 결의안이 통과된다. 4일 러시아는 자포리아 원자력 발전소를 공격, 점령한다.

5일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의 AskARussian에서 ‘Perm Krai’라는 유저가 “This is the end...”로 시작하는 글을 게시[4]했고, 그는 여기서 러시아가 새로운 1937년에 진입하고 있으며 푸틴의 러시아가 얼마나 전체주의적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토로하며 인터넷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외무부 장관 드미트로 쿨레바는 러시아군이 성폭력을 포함한 전쟁범죄를 벌이고 있다고 진술했다. 8일 뉴욕타임즈가 일가족 시신을 1면에 게재[5]한다. 트위터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수많은 폭력 이미지가 포르노 수준으로 업로드되고 있다. 체감하든 아니든 우리는 스펙터클의 한복판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 압도적인 ‘처분’이 올바르든 아니든, 어떻게 이것을 마주하고 기록할 것인지 고민하고 대응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글·이현재

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 평론 신인상. 경희대 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으로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2018) 등의 연구를 수행했다. 지금은 경희대 K-컬처·스토리콘텐츠 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에서 영화 평론을 쓴다.


[1] 2월 23일 밤(현지시간)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대통형 젤렌스키와 통화 후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푸틴을 향해 대러시아 성명 밝히며 언급 ("[우크라 침공] 바이든, 우크라 대통령과 통화...“계속 지원”", 연합뉴스, 김병수 기자...https://www.yna.co.kr/view/AKR20220224134200071)
[2] “독립 광장”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개명되기 전까지는 “10월 혁명 광장”(Площа Жовтневої революції)이었다.
[3] 「비천함에 관하여」, 『카이에 뒤 시네마』, 자크 리베트, 1961년 6월호. (①원제는 「De l'abjection」로 “반대한다” “퇴출” 정도의 번역도 가능하다. ②자크 리베트가 질로 폰테코르보(Gillo Pontecorvo)의 <Kapo>(1960)를 비판한 것으로 유명한 이 아티클은 세르쥬 다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③본문에서는 ‘abjection’이 “비열함”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것에 방점을 두어 “천박함”으로 번역했다. ④한국에서는 세르쥬 다네의 비평집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정락길 옮김, 이모션 북스, 2012)의 부록에 본문 번역이 실려있으며, 이 경우에는 「비천함에 관하여」로 번역되었다.)
[4] https://www.reddit.com/r/AskARussian/comments/t699y4/this_is_the_end/
[5] ("[우크라 침공] NYT, '일가족 시신' 사진 이례적 1면 개제", 연합뉴스, 김지연 기자...https://m.yna.co.kr/amp/view/AKR2022030808080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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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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