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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과거에의 박제와 현재와의 공존 –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와 <보드랍게>가 피해자에게 닿는 방법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과거에의 박제와 현재와의 공존 –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와 <보드랍게>가 피해자에게 닿는 방법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2.03.22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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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그들을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적어도 지금은 분노를 위한 자극보다 피해자를 위한 이야기가 우선해야 한다는 인식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이는 그들이 어떤 피해를 겪었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보여줘 온 지난날에 많은 이들이 지속적으로 불편함을 표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의 과거를 굳이, 그렇게까지 장면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이제 하나의 윤리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함정이 도사리는 듯하다. 그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조심한다는 것은 그들을 ‘피해자’로만 인식했을 때의 안타까움을 전제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과거 언젠가 겪었을 사건을 그의 삶 전체로 설명하는 것은 과연 그들의 삶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까. 최근 미군 위안부와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두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와 <보드랍게>는 바로 이 지점에 상반된 태도를 보여준다. 과거에 갇힌 여인과 현실을 살아가는 여인의 삶은 피해자의 삶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화두를 던지고 있었다.

한 번 들어오면 절대 나갈 수 없다는 ‘뺏벌’.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피해자는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특히 두 감독의 전작 <거미의 땅>에서도 등장했던 실존인물 박인순 씨와 뺏벌은 미군 위안부에 대한 현실이자 상징으로 자리하며 영화를 끌고 나간다. 영화는 극영화와 다큐 사이, 연극과 영화 사이에 놓인 듯 장르적 결합 혹은 매체적 혼종을 통해 흥미로운 경험을 주는 것에 집중하고, 내용 역시 박인순 씨의 이야기와 동화 또는 전설과 같이 현실과 멀어진 이야기를 결합시키며 이 영화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같은 영화의 시도는 이 영화가 전하려고 하는 ‘이야기되지 못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방법인 듯 보이는데, 과연 이러한 형식의 성취가 ‘이야기되지 못한 이야기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초반 박인순 씨를 인터뷰하러 오는 이와 박인순씨가 공통적으로 목격하는 혼령을 등장시킨다. 낡은 바에 갇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박인순 씨에게 성적인 욕설을 퍼붓는 것으로 그는 과거 ‘뺏벌’이라는 공간에서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낸 이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흰 드레스를 입은 이 혼령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영화가 등장시키고야 마는 한 장의 사진과 연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진은 과거 끔찍했던 사건을 소환하는 것이자 나쁘게 말하자면 이미 여러 곳에서 소비된 사진이기도 하다. 영화가 이 사진을 등장시키기로 선택한 순간 사진 속 주인공과 같은 일을 하며 살아온 박인순 씨, 그리고 혼령의 박제화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영화는 형식적인 새로움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저승사자들이나 의미를 곱씹어야 하는 이야기들, 그리고 무의미한 듯 보이는 많은 행동들을 통해 관객들의 사유를 끌어내는 듯 보이지만, 이것이 과거에 이야기해 왔던 미군 위안부의 묘사를 넘어섰는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말하기 힘들다. 새로운 질문이 아닌 이상에야 더 나아간 사유를 끌어낼 수 없음에도 현란한 형식의 변주가 이 문제를 가리기 때문이다. 이 형식적 시도 속에서 박인순 씨가 오히려 그때가 나았다고 말한 대목은 슬쩍 묻혀 버린다. 미군 위안부라는 명칭 자체가 국가 공문서에서 사용하던 공식명칭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을 관리한 것이 국가이며 그들이 삶이 괴로운 것은 국가적 폭력의 결과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렇기에 그 괴로움이 박인순 씨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박인순 씨가 영화의 마지막, 자신을 속였던 미군의 머리를 끌고 가는 것은 개인의 복수 서사를 넘어서기 힘들며 역시나 박인순 씨를 과거의 상처에 가두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실제 피해자가 등장하지만 그는 결코 현실을 살아가지 않는다. 그가 왜 차라리 지금보다 성 노동을 할 수 있는 그때가 나았다고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고통과 복수에 갇힌 과거의 서사만으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피해자를 당시의 그곳에 두는 것으로 과연 무엇을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 비한다면 <보드랍게>는 전형적인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미 생을 마감한 주인공에 대한 인터뷰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가 남긴 화면과 행적들이 나머지를 채워간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결코 전형적이지 않은데, 이 작품은 주인공은 (이미 고인이 된 이 임에도)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이로 위치짓기 때문이다.

<보드랍게>는 김순악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로 속아 끌려간 그때, 어떤 경로로, 어떤 이유로, 그리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분명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방향에 놓인다. 영화가 그때의 상황들을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하는 것이 김순악 할머니의 과거와 현재에 분명한 거리를 둘 것이라는 선언처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가 주목한 것은 이후이다. 순악 할머니가 그 후 어떤 삶을 살았고, 과거와 멀어지기 위해 스스로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영화는 할머니가 자신과 같은 일을 겪었음에도 당당하게 언론에 나서는 이를 보면서 공식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당한 일이 결코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가는 과정을 천천히 훑어 간다. 영화가 할머니가 보여준 용기에 집중하는 것은 같은 고통 받았던 이들과 자신을 도와줬던 이들에게 전한 가장 유려한 응답처럼 보인다.

 

또한 영화는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공포 역시 과거의 아픔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현재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주는 쪽에 집중한다. 이는 당시의 공포를 전시하지 않아 생기는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는 유독 평화라는 말을 좋아했고 혹시라도 나라에 힘든 일이 생겨 전쟁이 나지 않을까를 걱정한다. 그가 경험했던 고통은 나라가 약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교육을 위한 기부로 이어진다. 당시 가난하고 무식해서 불쌍해졌다는 서사를 깔끔하게 걷어낸 효과는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당연히 그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이의 새로운 서사가 이렇게 정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할머니의 삶은 마치 우리에게 되묻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를 과거의 그 상황으로, 그때에 그 아픔을 지닌 자만으로 위치짓는 것은 누구냐고.

특히 과거가 아닌 현재,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로서의 김순악 할머니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이 또 다른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 있다. 김순악 할머니는 분명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을 겪었음에도 누구에게도 쉽게 하소연하지 못했고, 환향녀의 폭력적인 의미 왜곡 속에서 살아갔다. 과연 이런 일은 어디에서부터, 왜 시작되었을까. 바로 이것에 대한 답, 그러니까 이렇게 힘들게 살았음에도 누구 하나 애썼다고 ‘보드랍게’ 말해주지 않는 그 뿌리 깊은 냉대가 과거를 넘어 현재까지도 여성들을 향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보드랍게>가 김순악 할머니가 적어 놓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현재 미투 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세 여성의 목소리로 전하는 것은 그래서 가슴 아프면서도 반가운 장면들이다. 현재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과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 말이다.

 

누군가의 아픔을 현재로 소환한다는 것에 대해 좀 더 촘촘히 생각해 볼 때가 온 듯하다. 스크린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발은 이제 그 수명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고통을 재현하지 않는 것만으로 특별한 태도를 지녔다는 자위 역시 거리를 둘 때가 되었다. 그들의 삶은 과연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최근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영화의 태도에 대한 고민 역시 깊어진다. 이는 영화가 올바른 윤리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창작이 이래 저래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적어도 누군가의 삶을(그것이 극적으로 재현된 것이라고 해도) 많은 이에게 공개한다면 모두가 그의 삶을 소비하는 것에서 끝내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누군가의 일생일 테니까.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22) / <보드랍게>(2022)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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