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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한 지붕 세 가족의 비극적 탄생: <기생충> 봉준호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한 지붕 세 가족의 비극적 탄생: <기생충> 봉준호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2.04.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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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파국의 시대의 새로운 버전의 한국 가족영화

칸의 황금종려상을 비롯하여 영국과 미국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상 등을 비롯한 여러 유명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석권한 <기생충>(2019)은 한국영화 100년사의 기념비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성과를 가져온 이 영화는 “한국영화문화의 윤리성과 도덕성에 대한 불감증과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대부분의 한국 관객들이 영화 속 가난을 소비하고 심사하고 즐기는 국제 영화계의 인플루언서들의 취향을 ‘리스펙’하면서, “특별하면서도 공감이 가는 재미있는” 가족 이야기를 다루는 한국영화로 기꺼이 수용하고 있는 작금의 현상이 개탄스럽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비록 블랙코미디로 가족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한국인의 윤리와 도덕성이 무너진 영화”로 헐리웃 영화를 한국사회에 이식한 번안 작품이지 한국영화, 특히 한국 가족영화는 아니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혹평은 <기생충>이 헐리웃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표하면서 헐리웃 영화 시스템에 편입하려는 문화제국주의적 성향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기생충>은 닫힌 헐리웃 영화 시스템을 열린 시스템으로 만드는데 공헌할 수 있는 한류(Korean Wave)의 대표적인 한국영화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호평은 한국의 ‘특별한’ 가족 이야기를 다룬 가족영화로 이 영화를 접근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검증될 수 있다.

<기생충>은 가족 자체와 가족주의 담론에 대한 성찰에 관심을 둔 가족영화는 아니다.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élix Guattari)가 가족은 자율성이 보장된 소우주가 아니라 이미 가족적이지 않은 단절들로 채워져 있는 탈중심화된 영역이라고 주장하듯이, 이 영화의 가족들 또한 기존 가족주의 담론이 근거하는 ‘신성 가족’은 아니다. 이들은 특히 IMF를 비롯한 경제위기와 다양한 파국적 상황이 횡단하며 만들어낸 단절과 간극들로 더욱 심화된 탈중심화를 겪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가족영화들은 신성 가족을 찬미한다. 이러한 대중적 가족영화와는 달리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2006)은 탈중심화된 가족의 위기를 통해 가족 자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함께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를 맺는 특별한 '가족의 탄생'을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가족영화로 탄생했다.

그러나 <기생충>은 가족 자체가 아니라, 봉준호 감독도 말했듯이, “출발 자체가 가족”인 영화로, “기묘한 인연으로 얽히는 두 가족의 이야기를”, 또 하나의 숨어 사는 가족을 더해, 세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수평적 관계를 절대 맺을 수 없는, 즉 한 지붕 밑에서 결코 공존할 수 없는 ‘한 지붕 세 가족의 비극적 탄생’을 보여주는 새로운 버전의 한국 가족영화이다. 1990년대 서민드라마이자 국민드라마인 <한 지붕 세 가족>(1986-1994)은 수직적 위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공생과 상생을 추구하는 ‘한 지붕 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반면에 <기생충>은 후기자본주의 사회가 초래한 가족 내 뿐 아니라 양극화된 가족들 사이의 단절과 간극을 부각시켜 공생과 상생은커녕 너무도 위험한 ‘한 지붕 세 가족’의 비극적 탄생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직면한 파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현재 글로벌 경제 위기뿐 아니라 팬데믹, 테러와 전쟁과 같은 돌발사태의 재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파국들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재난들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대처해야할 파국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인 파국은, 지젝(Slavoj Žižek)이 역설하듯이, 아도르노(Theodor Adorno)와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가 파악한 “계몽주의의 최후의 파국적 결과”로서의 “관리되는 세계”(administered world)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더 궁극적인 파국은 “관리되는 세계”가 아무런 “존재론적 파국”도 없이 “정상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결말 또한 박동익 사장(이선균) 저택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참극에도 불구하고 외국계 회사 사장인 독일인 가족이 그 집에 이사를 오고, 지하에는 오근세(박명훈) 대신 김기택(송강호)이 기식하는 것으로, 아무런 위기도 없이 모든 것이 정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기생충>은 분명하게 선 긋기와 구별 짖기를 강요하는 관리되는 세계의 불변성을 유지하는 현행 구조적 체제 내에서는 이제 더 이상 어떤 변화나 미래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없음을 주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냉담하고도 부정적인 주장은 역설적으로 그 체제에 내포될 수 있는 “가능한 것”(the possible)의 한계를 초월하는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의 현실화(actualization)에 대한 필요성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부자 가족과 가난한 가족

 

사람, 상품, 자본, 기술, 정보, 문화 등의 초국가적 유입으로 새로운 차원의 불평등과 이로 인한 수많은 난제들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세계화 시대를 맞아 GDP 10위권에 진입한 한국 사회는 특히 최근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중산층이 사라지고 사회계층이 더욱 양극화되는 현상을 겪고 있다. 치킨 체인점과 대만 카스테라 사업으로 망한 기택네와 채권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신용불량자 근세네는 자본의 세계화 흐름에 기초한 시장 자본주의 체제에서 낙오한 사회적 약자, 루저 집단에, 그러나 쪽박을 찬 이들과는 달리 IT사업으로 대박이 난 박사장네는 사회적 강자 집단에 각각 속한다.

이와 같이 양극화된 집단은 지배와 피지배 계급의 위치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택과 박사장 가족 사이의 지배 관계가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수단에 의해 암묵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양쪽 집단 모두 그들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계급적 위치보다는 재능이나 물질적, 사회적 성공 같은 개인적 특성에 의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체계적 오인”(systematic misrecognition)”을 범하고 있다.

특히 기택과 근세 가족은 그들이 현실을 오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오인을 올바른 인식이라고 믿으며 행동함으로써 계급 체계의 정당화와 재생산에 공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예컨대 기택 식구들은 박사장 식구들이 모두 착한데, 그 이유는 부자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돈이 있으면 착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박사장 부부는 갑질을 하는 부류는 아니고, 비교적 상식적이고, 피고용인들에게 선을 지키기를 요구하지만 그들 또한 나름대로 선을 지키는 예의바르고 세련된 상류층으로 등장한다. 박사장 저택의 지하에 몰래 숨어사는 근세는 “근세의 명예의 전당”에 성공한 사람으로 그를 모시고 있는데, 그가 계단을 오를 때마다 조명을 밝히고 “리스펙”을 외치며 존경하고 신격화까지 한다.

그러나 박사장은 공자(孔子)가 강조하는 예(禮)를 실행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인 인(仁)의 덕목을 갖춘 양반은 전혀 못된다. 그가 기택에 의하여 묻지마 살인을 당한 것은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근세에 대하여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느낄 수 있는 인을 갖추지 못해 ‘사양지심’(辭讓之心)을 실현하는 예에 어긋나는 끔찍한 모욕적 행위를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봉준호 감독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가난한 가족과 부자 가족이 공생, 나아가 상생하기 위해서는 예의 실행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즉 “서로간의 예의(禮儀)”와 “인간 존엄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원래 예의(manner)란 서로 더불어 살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것인데, ‘관습 또는 풍속’(manners)이 되어 상류층의 구별 짓기 수단으로 전유되어, 서로 선을 넘지 않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가난한 가족의 비체화와 구별 짓기

 

영화 <기생충>의 제목은 학급 단체 대변검사, 구충제 강제 복용, 기생충 박멸 포스터 등, 옛시절의 칙칙했던 냄새와 함께 감염공포에 대한 두려운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가난의 냄새가 밴 루저 집단을 우리 사회에 퍼져있던 집단감염의 원흉으로 혐오와 박멸의 대상인 기생충에 비유한 것은 이들을 “비체화”(abjection)한 것이다.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에 의하면, 원시사회는 “비체화로 그들의 문화영역을 섹스와 살인의 대표자들로 상상되는 위협적인 동물 또는 동물성의 세계로부터 분리시켜 구별 짓기를 하였다”고 한다. 현대사회도 여전히 문화 영역을 차별화하기 위해 가난한 자를, 기택이 박사장을 죽이듯이, 숙주를 마침내 죽이는 무엄한 기생충으로 비체화하고 있다.

계급 사이의 구별 짓기를 문화적 자본과 연결된 아비투스(habitus)로 설명하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에 의하면, 특정 계급의 문화적 취향(taste)은 선천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경험과 생활 속에서 획득한 후천적 성향이다. 따라서 취향은 "구분하고 평가하는 획득된 성향"이며 "계급의 표식으로 기능하며"(Bourdieu, 1984: 466), 계급에 따라 문화적 취향은 세 가지, “정당한 취향(legitimate taste), 중류층 취향(middle-brow taste), 대중적 취향(popular taste)”으로 구분된다. 박사장네 빈집에서 기택네 식구들이 벌이는 상류층 행세 파티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의 무의식적 성향, 즉 그들의 문화적 취향은 지배 계급의 정당한 취향과는 현격하게 격이 떨어져 계급 차이와 간극을 더욱 부각시켜 강조한다. 자기들 집에서 먹던 고등어 캔 안주 대신 여기선 푸아그라 캔을 꺼내 놓았지만 따지도 않고, 고급 양주의 섬세한 향과 맛을 즐기는 대신에 온갖 종류의 술을 섞어서 마시고, 식구들 중 가장 상류층에 어울릴 것 같은 김기정(박소담) 또한 도그푸드를 육포로 착각하고 먹는다. 이와 같이 상류층 행세도, 상류층 취향도 즐기지 못하는 기택 가족의 상류층 문화 체험은 계층 간의 아비투스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반면에 박충숙(장혜진)에게 한우 채끝살을 넣어 짜파구리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맛있게 먹는 박사장 부인 최연교(조여정)는 “상류층은 상류층과 하류층의 문화 모두를 자기 취향대로 섞어서 마음껏 향유한다”는 의미의 “문화적 잡식”(cultural omnivorousness)을 즐길 줄 아는 상류층의 품격을 보인다. 교육과 수입 수준이 높을수록 고급과 대중적 취향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더욱 다양하고 폭넓은 취향을 가지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이처럼 지배계급은 선을 넘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만 하류층은 기회가 주어져도 선을 넘는 것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아비투스의 차이, 구별 짓기를 위한 선은 피지배계급만 지키도록 강요받고 있다. 따라서 박사장의 “선을 넘지 말라”는 반복되는 금기 요구는 그가 당연하게 행사할 수 있는 계급적 특권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반지하와 지하에 사는 기택과 근세네에게 밴 가난의 냄새는 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선을 넘지 않을 수 없다.

<기생충>의 오프닝 시퀀스는 기택 가족이 살고 있는 어두컴컴한 반지하 주거 공간의 유일한 채광창을 응시하고 있는 카메라의 쇼트로 시작한다. 채광창을 프레임으로 한 바깥 거리 모습과 실내 천장에 매달아 놓은 빨래걸이에 걸린 양말짝들을 담고 있는 첫 장면은 반지하 주택의 구조와 주거 환경의 특성을 잘 표출해준다. 채광창은 바깥 지상에 서 있는 사람의 발치에, 실내에 서 있는 사람의 눈높이쯤에 위치한다. 한여름 대낮에 닫힌 채광창으로 차단된 자동차 매연과 소음, 길바닥에 버려진 쓰레기와 오물 냄새, 장마철 실내 습기로 잘 마르지 않아 냄새날 것 같은 빨래로 영화는 처음부터 반지하 특유의 오묘한 냄새를 풍기며 시작한다. 박사장네는 기택네 식구들에게 나는 역겨운 냄새를 옛날 지하철 안에서 맡았던 냄새, 행주, 무말랭이 냄새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지만, 기정이 말하듯이, 그 냄새는 반지하의 냄새이다. 중반부를 지나 물난리로 침수된 기택네 반지하집에서의 대피 소동 시퀀스는 앞서 전개된 반지하집 식구들의 지상 상류층으로의 진입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저지대라 수압이 낮아 정화조 바로 위에 설치된 변기로 오물이 역류하자 기정이 피하지 않고 뚜껑을 닫아 막은 채 그 위에 앉아 씁쓸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그녀의 헛된 진입 시도와 좌절, 그리고 국문광(이정은)이 뇌진탕으로 변기에 토하는 장면과 겹치면서 두 여자의 죽음을 암시한다. 이 장면에서 역류된 똥물은 이제 가난의 냄새가 더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선을 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계단 영화: 지하로의 추락에 대한 공포

 

기택 가족이 저지대 반지하집에 살고 있다면, 반면에 박사장네는 고지대에 건축가 남궁현자가 지은 자연채광을 한껏 누리는 하이엔드 럭셔리 저택에 산다. 그러나 그 집 지하에는 집주인도 모르는 지하실 방공호가 있고 거기엔 사채업자들로부터 피신한 근세가 몰래 기식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기생충>은 반지하, 지상 2층집과 그 지하를 오르내리는 계단들 뿐 아니라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서러운 장면”으로 꼽히는 폭우 속 저지대 동네 장면에 이르기까지 기택네 가족이 고지대 부자 동네에서부터 걸어오며 타고 내려온 수많은 계단들이 나오는 계단 장면이 유난히 많아 제작진에 의해 “계단 영화”로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영화를 찍을 때, 가장 많은 영감을 준 영화 또한 계단 영화로 불릴 수 있는 김기영의 <하녀>(1960)라고 한다. 1960년대 김동식(김진규)과 그의 부인(주증녀)이 새로 장만한 2층집의 계단은 중산층 진입 성공의 상징이자 동시에 폭력적인 하강 벡터를 발생시키는 하녀(이은심)의 유산, 복수의 살해, 자살 등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영화의 핵심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봉준호의 계단 영화 <기생충>에서는 2층을 오르내리는 계단이 아니라 지하 방공호로 내려가는 숨겨진 계단이 집중적으로 추락과 타락의 폭력이 행사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소가 된다.

<하녀>의 피고용인 하녀는 근대화 초기 부르주아 가정에 입주한 “가족 내의 하녀”로 “사회 세포 속의 구멍”으로 그 구조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즉 선을 넘을 수 있는 존재이다. 반면에 박사장네가 고용한 기사, 가정부, 과외교사 등은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 제공자로만 존재할 뿐, 그 이상의 선 넘기가 허락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상류층으로의 진입을 상징하는 계단이 아니라, 반지하와 지하 가족들의 격돌로 숨겨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박사장네는 끝까지 지하 공간과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지하에서 올라와 파티 장소에 피를 흘리며 근세가 식칼을 들고 나왔을 때도 초대 손님들은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끝내 근세는 갑자기 파티장에 난입한 노숙자로 알려질 뿐 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사라진다. 이처럼 이 영화는 우리 사회 상류층은 하류층의 존재와 그들과의 소통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으며, 이들의 세계를 상징하는 박사장의 2층집은 그 심연 속에 “우리 시대의 복잡하고도 적나라한 모습”을 은폐시킨 채 그 위에 세워진 것임을 보여주는 계단 영화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계단 영화는 결코 순화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파국을 직면할 것을 과격한 방식으로 요구하는 ‘한 지붕 세 가족’의 탄생 파티를 연다.

 

한 지붕 세 가족의 비극적 탄생 축하 파티

 

‘리스펙’을 외치는 근세는 지하에서 몇 년간 기생충처럼 살면서 가장 기본적인 인간적 충동인 “노예성”을 언제든 분출할 수 있는 인간동물이 되었다. 이제 거기서 태어나 계속 산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환경에 순응하여 안락감을 느끼며, 동물적 욕구 충족에만 몰입하는 상태로 전락한 그는 젖병을 빠는 퇴행적 행동 뿐 아니라 도착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모성애로 돌보던 문광이 죽자 그에게 내재되어 항상 “작동 중”에 있는 충동은 마침내 그를 타락과 죽음으로 몰고 가 무자비한 살인을 저지르고 살해를 당하는 “폭력의 먹이”로 만든다. 바로 이러한 근세에 의하여 한 지붕 세 가족이 탄생하는 파티의 스펙터클은 연출된다.

결코 한 지붕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세 가족이 한 지붕에 함께하는 비극적인 탄생의 순간은 햇볕이 찬란히 내리쬐는 정원에서 열린 박다송(정현준)의 생일파티에서 일어난다. 누구나 공평하게 즐길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지상, 반지하, 지하로 구별되는 주거 공간에 따라 차등적으로 차단되는 햇볕은 이 영화에서 몰락의 중요한 상징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물난리로 시작된 기택 가족의 몰락은 햇빛이 완전 차단된 방공호로 기택이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갑자기 물난리로 수재민 신세가 되어 막연해진 생계 문제, 지하에 갇혀있는 문광과 근세 처리 문제 등, 그 무엇도 대안을 생각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처해 기택은 가장으로서 계획을 묻는 아들 김기우(최우식)에게 무계획이 계획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고, 그런 그에게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아들의 말에 비참한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극한 상황과는 전혀 관계없이 피고용인 기택 가족은 물난리로 미세먼지가 걷힌 일요일 인디언 놀이를 주요 테마로 한 다송의 생일파티 준비와 진행에 모두 동원된다. 연교의 호화스러운 파티 준비 쇼핑을 수행하고 돌아오는 차속에서 자기는 앞좌석 머리받힘에 발을 올려놓은 채 수재민 기택에게 나는 냄새를 못참아 창문을 여는 모습을 백미러로 바라보는 기택의 표정은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다송의 생일파티를 위해 인디언 분장까지 한 기택에게 냉정하게 선을 그으며 이 또한 일의 연장임을 주지하는 박사장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 또한 매우 혼란스러운 그의 심리 상태를 표출한다.

연교의 연출로 상류층 문화적 취향에 따라 품격있게 진행되던 다송의 생일파티는 피를 흘리면 식칼을 들고 등장한 근세가 생일케익을 들고 있는 기정을 찌르는 순간 백주대낮의 난투극으로 변한다. 마치 다송의 생일파티를 위해 서부극의 악당 인디언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등장한 근세의 난동으로 지하에서 일어난 반지하와 지하 가족의 싸움이 지상에서 벌어지게 된다. 식칼로 기정을 찌른 근세를 충숙이 바비큐 도끼로 공격하며 혈투를 벌이다 꼬지 꼬챙이로 찔러 죽인다. 역설적이지만, 서로를 죽임으로써 두 가족은 마침내 한 지붕 아래 그 존재를 탄생시켜 가시화할 수 있게 된다.

두 가족의 혈투로 끝날 수 있었던 파티는 기택이 행한 박사장의 ‘묻지마 살인’으로 간주되는 사건으로 드디어 죽음을 통한 한 지붕 세 가족의 탄생이 순간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죽어가는 근세는 자동차 키를 집으러 다가온 박사장에게 “박사장님, 리스펙”을 외치는데, 그는 “나를 알아요?”라고 의아해 하며, 그 와종에도 선을 긋는다. 그의 죽은 몸을 밀치고 키를 집으며 그의 냄새를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코를 막는 박사장을 본 기택은 순간 표정이 변하면서 근세가 떨어뜨린 식칼을 집어 들고 그를 찌른다. 지금까지 눌러온 그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 폭발한 행동이지만, 그러나 언론은 평소 온화한 성격을 가진 운전기사의 묻지마 살인 사건, 범인의 행방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사건으로 다룰 뿐 살해 동기 등 사건의 전말은 밝혀지지 않는다. ‘한 지붕 세 가족’의 비극적 탄생과 죽음의 파티에도 불구하고, 수사와 재판을 통헤 기택 가족, 근세 가족, 박사장 가족의 얽힌 가족 이야기는 밝혀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죽은 박사장과는 달리 지하 가족 근세와 문광은 죽어서까지도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상류층과 하류층의 단절을 의미한다.

 

기우의 스토리텔링과 카메라-의식

 

<기생충>의 엔딩 부분은 근세에게 수석으로 머리를 맞아 혼수상태에 있다가 한달 만에 깨어난 기우를 보이스-오버의 화자로 하여 그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깨어나면서 실소를 터뜨리기 시작한 기우는 병원에서도, 재판 때도, 이후 죽은 기정의 납골당에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이러한 기우의 모습에서 <조커>(토드 필립스(Todd Phillips), 2019)에서 허무주의적 범죄자 조커(Joker)가 된 느닷없이 웃음이 터지는 장애를 앓고 있는 아서(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를 떠올릴 수 있다. 아서처럼 이제 기우는 이 세상이 말도 안 되는 조크 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기우가 아서를 연상시킨다면, 박사장과 다송은 억만장자 토마스 웨인과 그의 아들이자, 훗날 조커의 숙적인 배트맨으로 성장한 브루스 웨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기우에게서 한국판 조커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비극을 겪었음에도 그는 아서와는 달리 여전히 체제적 오인을 떨쳐버리지 못한 한심한 가난한 집 아들의 입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스토리텔링을 전개한다.

기우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엔딩 부분은 기우가 해독한 모스 부호로 보낸 기택의 편지와 아버지에게 보내는 기우의 답장을 읽는 기택과 기우의 보이스-오버와 그 내용에 해당하는 영상들로 구성된다. 기우의 스토리텔링은 들뢰즈가 말하는 가난한 자가 가질 수 있는 “거짓의 역량”을 발휘하는 이야기 꾸며대기로 설명될 수는 없다. 여기서 거짓이란 허구의 이야기를 만든다는 뜻에서 거짓이라기보다는 지배계급의 사고와 관점을 대변하는 진실에 충격을 주는 힘을 가진 거짓을 의미한다. 비극을 겪기 이전에 기우는 상당히 뻔뻔하고 자기 정당화에 뛰어나고 사기를 쳐도 죄의식을 가지지 않는 “가난한 자들의 특권”을 행사했었다.

그러나 기우의 스토리텔링이 들려주는 그가 세운 새로운 계획은 돈을 많이 벌어 그 집을 사서 아버지를 구출하는 것이다. 그런 끔찍한 사건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극은 가난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성공만 한다면 블랙홀과 같은 지하로부터 탈주가 가능하다고 믿는 그의 돈에 대한 선망과 집착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우의 스토리텔링은 <기생충>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냉담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 어떤 변화나 탈주의 가능성은 전혀 시사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기우의 주관적 의식을 보여주는 주관적 지각-이미지와 함께 그것을 변형시키는 “카메라-의식” 사이의 상호작용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여 다른 바깥의 목소리의 존재를 의식하도록 만든다.

<기생충>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카메라의 존재를 가장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다. 봉준호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서처럼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의 거울 이미지로 이 영화의 내러티브의 엔딩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두 장면,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다 정지한 채 비추는 카메라의 “집요한” 또는 “강박적인” 프레임화를 강요하는 의식, 즉 반성하는 의식 또는 “영화적 코기토”(cinematographic Cogito)라고 할 수 있는 카메라-의식이 잘 감지된다. 카메라-의식의 강박증적인 프레임은 춥고 어두운 반지하 거실 천장에 널어놓은 양말과 더 내려와 멈춰 기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실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이 반복되는 거울 이미지가 아니라 첫 장면의 이미지와는 다른 그 차이를 반영하여 재-연쇄화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감지되는 카메라-의식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이미지들 사이의 틈새, 간격을 반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우의 스토리텔링에 의한 그의 주관적 지각-이미지를 변형시킨다.

관객은 일단 첫 장면의 거울 이미지로 반복된 마지막 장면을 통해 그 사이에 일어난 비극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현실 세계는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채광창의 햇볕이 완전 차단된 어두운 반지하집 공간 이미지에서 기택 가족의 몰락을 읽어낸다. 그리고 전달할 방법이 없는 아버지에게 모스부호로 쓴 편지를 들고 있는 멍한 기우의 모습을 한참 동안 프레임 속에 담고 있는 집요하고 강박증적인 카메라-의식을 감지한다. <사고>의 마지막 장면은 기우의 지각-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대신, 그의 주관적 입지와는 독립된 카메라-의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의 주관적 관점이 변화되고 투사되는 또 다른 시각과 목소리를 생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스크린에 등장하는 기우의 관점과 동시에 그를 보고 있는 카메라의 관점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유간접주관성”이라는 또 다른 시각을 생성하는 이야기 방식으로 이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 이야기는 기우의 스토리텔링을 변형시킬 수 있는 거짓의 역량을 발휘하는 스토리-텔링이 들려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영화 <기생충> 자체가 ‘한 지붕 세 가족의 비극적 탄생’이라는 특별한 가족 이야기로 지배계급을 대변하는 진실에 충격을 가할 수 있는 거짓을 만들어내는 예술적, 창조적 역량을 발휘한 우수한 영화이자 새로운 버전의 가족영화로 평가될 수 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와 팔림세스트로 읽는 각색연구, 한류연구와 한국영화 읽기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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