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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사코>, 다름과 닮음의 불협화음 혹은 이중주①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사코>, 다름과 닮음의 불협화음 혹은 이중주①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2.05.0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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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코.
아사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아사코>(2019)의 마지막 장면. 남녀 주인공 료헤이와 아사코가 강을 바라보면서 어색한 대화를 한다. “더러운 강물이군.” 료헤이가 말한다. 아사코의 생각은 다르다. “그래도 아름다워.”라고 말한다. 료헤이와 아사코의 대사를 합치면, ‘더럽지만 아름다운’이라는 역설이 만들어진다. 결혼을 약속한 뒤 보러 왔던 오사카 근교의 아담한 집에서 료헤이와 아사코의 시선은 어긋나고, 대화는 버석거린다. 두 남녀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같은 마음이 아니다. 이 대사 직전에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평생 널 못 믿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료헤이는 아사코를 밀쳐내지는 않는다. 아사코는 “알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료헤이와 아사코는 이제 믿음이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더러울까? 아름다울까? 아니면 ‘더러운 아름다움’을 몸에 새긴 채 살아갈까? 질문을 바꿔보자. 더러움은 악이고, 아름다움은 선인가? 남자 배우(히가시데 마사히로)가 1인 2역을 맡아 외모는 똑같지만 성격은 정반대인 두 인물(료헤이와 바쿠)을 연기한 것을 보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생각은 선과 악, 미와 추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것으로 보인다. 감독은 더러움과 아름다움, 다름과 닮음은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이중주이며, 그것이 우리 삶이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자연과 문명=바쿠는 거칠고 야성적이고 제멋대로이다. 그는 헝클어진 긴 머리와 슬리퍼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아사코와의 첫 만남 장면을 보자. 고쵸 시게오의 사진전시장을 나와 귀가하는 길, 아이들이 폭죽놀이를 한다. 다른 방향으로 가던 바쿠와 아사코는 폭죽 소리에 놀라 뒤돌아서고, 바쿠는 아사코에게 다가가 이름을 묻고는 다짜고짜 키스한다. 바쿠의 친구는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지만, 사실이다. 바쿠는 원래 그랬다. 집을 나가 1, 2주 동안 연락이 없기 일쑤였다. 아사코와 사귀면서도 저녁 무렵 빵을 사러 간다고 해놓고는 아침이 돼서 돌아온다. 그러고는 멋들어진 말을 남긴다. “좀 늦더라도 너에게 반드시 돌아온다.” 그런데 바쿠는 반년 후에는 신발을 사러 간다고 해놓고 아예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다. 약속을 지키기는 한다. 5년 후, 아사코가 료헤이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직후다. 료헤이는 다정하고 섬세하고 착하다. 그는 아사코가 바쿠에게 강제로 헤어짐을 당한 후 도쿄로 와서 만난 직장인이다. 아사코는 처음에는 료헤이를 밀어내지만, 결국 그의 따뜻함과 온순함에 이끌려 마음을 연다.

바쿠는 보리(麥)를 뜻한다. 바쿠의 여동생의 이름은 쌀을 뜻하는 마이(米)다. 그리고 바쿠의 아버지는 홋카이도에서 곡식을 연구하는 전문가다. 이 관계를 확장하면, 바쿠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먼먼 옛날 처음으로 농사를 짓던 종족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맥이라는 한자어에는 맥(貘)도 있다. 테이퍼(tapir)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동물이다. <아사코>에는 료헤이가 인터넷으로 테이퍼 사진을 찾아보고 그 동물이 자신과 닮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는 장면도 있다. 이 麥과 貘이라는 동음이의어는 바쿠와 료헤이의 관계이다. 두 단어는 소리는 같지만, 뜻은 다르다. 바쿠와 료헤이도 외모는 같지만 서로 다른 인물이다. 닮았지만 다른 존재. 아사코가 바쿠와 료헤이 사이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는 혹은 시계추처럼 둘 사이를 오가는 이유다. 그런데 바쿠는 곡식이다. 료헤이는 그 곡식을 재료로 삼아 술을 빚는 일을 한다. 아사코는 물맛이 중요한 커피를 만든다. 아사코는 바쿠와 료헤이를 이어주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바쿠는 원시 자연, 료헤이는 현대 문명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바쿠가 거칠고 야성적이고 제멋대로인 이유다. 료헤이가 친절하면서 예의 바른 배경이다.

 

바쿠와 아사코.
바쿠와 아사코.

그렇다면 바쿠에게 이끌린 아사코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아사코는 바쿠의 첫 키스에 저항하지 않는다. 당황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얌전하고 착하고 순진한 아사코의 내면에는, 대다수 현대인이 그러하듯이, 무엇인가 원시적인, 야성적인, 저돌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아사코는 청춘의 한낮을 통과하고 있었으니, 틀에 박히거나 정돈된 것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을 것이다. 바쿠는 아사코의 그 내밀한 환상의 심지에 불을 붙인 인물이다. 하지만 21세기는 원시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아사코는 상처를 받는다. 아사코가 도쿄로 떠난 것은 현대 문명 속으로 몸을 숨긴 행위이다. 아사코가 료헤이를 처음 본 순간에 당황한 이유는 단순하다. 일차적으로는 료헤이의 외모가 바쿠를 닮았기 때문이지만, 사실은 현대 문명 속에서 자연과 야생의 그림자를 다시 본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사코는 료헤이의 본성을 확인한 후에 그를 받아들인다. 아사코는 기본적으로 문명인의 피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혹은 삶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대 도시인들이 주말이나 휴가철이면 끊임없이 자연을 찾아 떠나듯이, 아사코도 바쿠로 상징되는 자연과 야성의 매혹을 뿌리칠 수 없다. 아사코는 송별회 자리에서 료헤이를 떠나 별다른 고민 없이 바쿠를 선택한다. 하지만 아사코는 곧바로 후회한다. 모델이자 배우로 성공한 스타 연예인이지만, 바쿠는 옛날 그대로의 바쿠이다. 그는 여전히 타인에 대한 예의도 배려도 없이 제멋대로 행동한다. 결국 아사코는 자연의 세계를 떠나, 걷고 또 걸어서, 문명의 세계로 돌아온다. 도시인이자 문명인인 료헤이가 아사코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상처는 평생 문신처럼 남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료헤이는 아사코를 밀쳐내지 못한다. 자연과 문명의 관계가 그러하다.

그러한 점에서 료헤이와 아사코의 집이 오사카 근교의 강가라는 점은 의미가 있다. 이 집은 자연과 문명,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료헤이는 바쿠를 사랑한 아사코를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과거를, 자연을, 현재를 외면할 수 없다. 동시에 과거나 자연에 함몰되면 현재와 미래를 응시할 수 없다. 아사코는 바쿠를 떠나보낸 후에 비로소 료헤이 옆에 선다. 그렇다면 도시 문명과 샛강이 공존하는 오사카 작은 집은 하마구치 류스게 감독이 생각하는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그곳이 유토피아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사코의 시간이 응축되어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아사코의 몸에는 과거와 현재, 자연과 문명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료헤이는 술을 빚는 일을 계속할 것이고, 결국은 아사코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자연과 문명, 과거와 현재, 본능과 이성, 다름과 닮음이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불협화음을 내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이중주이다.

 

아사코와 료헤이.
아사코와 료헤이.

▲떠남과 돌아옴=<아사코>에서는 인물의 떠남과 돌아옴이 반복된다. 그런데 그 떠남과 돌아옴의 주체는 매번 다르고, 그 의미도 차이가 크다. 우선 바쿠는 떠나는 존재이다. 그는 빵을 사려고, 신발을 사려고 떠난다. 떠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다. 변명만 있을 뿐이다. 그의 떠남은 문명인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저 감정과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바쿠는 모델 겸 배우로 성공하지만, 자연인의 타고난 본성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스타가 된 자신을 찾는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리는 것을 참지 못해 휴대폰을 아예 부숴버린다. 바쿠가 아사코를 다시 찾아온 이유는 사랑, 추억, 애잔한 그리움 따위의 감정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바쿠는 센다이의 바닷가에 아사코를 남겨두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

아사코는 떠나는 동시에 돌아오는 인물이다. 아사코는 바쿠와의 관계에서는 남겨진 존재이다. 료헤이와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아사코는 료헤이와 함께 오사카로 이사하기 직전에 돌연 바쿠와 함께 홋카이도로 떠난다. 아사코의 일탈 행동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사코는 센다이 바닷가에서 바쿠와 헤어진 뒤 료헤이에게 돌아온다. 아사코는 바쿠와 료헤이 사이를 진자처럼 오간다. 바쿠는 과거의 인물이고, 료헤이는 현재이자 미래의 인물이다. 사실 아사코의 선택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아사코의 행적은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 양태이다. 과거를 그리워하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바쿠가 없으면 료헤이가 존재할 수 없다. 바쿠가 있어야 비로소 료헤이가 존재한다. 물론 아사코의 행적이 순결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아사코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우리는 누구나 바쿠와 료헤이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을.

료헤이는 스스로 누군가를 떠나본 적이 없다. 그가 오사카에서 도쿄로, 도쿄에서 오사카로 이동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직장 발령 때문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현대의 직장인인 료헤이는 규칙을 잘 준수하며, 모험을 하지 않는다. 또 배려심도 많아서 아사코를 위해 센다이의 어촌에서 녹초가 되도록 봉사활동을 한다. <아사코>에서 료헤이는 아사코를 한 번도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떠났다가 돌아온 아사코를 결국 받아들인다. 말로는 거부하지만, 행동으로는 아사코를 품는다. 그가 문을 빼꼼히 열고 고양이 진탄을 아사코에게 건네주는 행동이 대표적이다. 료헤이는 현대 멜로드라마의 남성 주인공을 대표하는 캐릭터인 셈이다.

<아사코>에서는 떠남과 돌아옴이 반복된다. 바쿠는 아사코를 떠났다가 돌아오고, 아사코에게 돌아왔다가 떠나간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떠났다가 돌아오고, 돌아온 후에는 료헤이 곁에 머무른다. 료헤이는 자신을 떠나갔던 아사코를 결국 받아들인다. 바쿠-아사코-류헤이의 이러한 관계는 익숙하다. 게다가 바쿠와 료헤이의 외모가 닮은꼴이라는 설정은 동어반복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사코>는 멜로드라마의 상투적인 인물과 서사를 따르는 듯하다. 이야기 전개에서 우연이 남발되고, 개연성이 부족한 점도 눈에 띈다. 하지만 각 인물과 에피소드가 지닌 반복의 의미, 나아가 신화적인 상상력과 환상성의 요소까지 고려한다면, <아사코>는 단순한 멜로드라마 텍스트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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