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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홍상수의 영화 <소설가의 영화>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홍상수의 영화 <소설가의 영화>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2.05.09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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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소설가의 영화>에서 소설가의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 우리는 홍상수 영화에서 전에 본 적 없던 이미지가 주는 당혹감과 기이한 전환감, 아름다운 순간들의 충만감 속에 머무르게 된다.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던 카메라,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결국 실내 대화 장면이라는 중심으로 회귀하는 프레임, 흑백 이미지의 무미건조함에서 해방시키는 영화 속 영화의 감흥은 이혜영 배우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홍상수 영화의 ‘마법’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이러한 전환 혹은 해방과 같은 마법의 순간은 홍상수가 역시 구조와 빌드업의 장인임을 다시 사유하게 한다. 이는 <강원도의 힘>에서 지숙(오윤홍)이 산을 오르다 발견한 금붕어가 영화의 엔딩에서 상권(백종학)의 사무실의 실종된 금붕어와 연결되며 기묘한 감흥을 만들어 내는 것을 시작으로,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김상경)가 선영(추상미)의 집 문 앞에서 되돌아 갈 때 청평사 회전문의 설화가 떠오를 때, <북촌방향>에서 성준(유준상)이 예전(김보경)과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경진/예전의 정체성이 모호해질 때, <다른 나라에서> 세번째 에피소드에서 안느(이자벨 위페라)가 두번째 에피소드에서 숨겨놓았던 우산을 꺼내들고 화면 저편으로 사라질 때, <도망친 여자>의 극장에서 감희(김민희)가 바라보는 스크린이 첫번째 에피스드의 CCTV 화면과 두번째 에피소드의 인터폰 모니터와 겹쳐지는 순간으로 변주되어 나타났다.

보편적으로 이러한 빌드업 혹은 구성은 대부분의 극영화에서 전반부에 뿌려놓았던 대사, 사건, 상황, 대상들이 후반부에 다시 변주되거나 반복해서 나타날 때에 서사와 공명하며 영화의 의미와 감흥을 배가시키는 장치로 활용된다. 극의 밀도를 더욱 촘촘히 만들며 알레고리를 강화하며 의미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반면 홍상수의 영화에서 똑같이 활용되는 이러한 연출 방식은 반대로 영화가 쌓아온 그럴듯한 사실성, 환영성에 뒤흔들며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진동하는 경계의 순간으로 이끈다. 이때 우리의 현실과 같은 영화의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와 이미지는 다른 국면을 맞는다.

 

홍상수의 사실주의

비유적인 표현으로 빌드업을 사용했지만, 보통 시나리오에서 씨앗을 뿌리고 거둔다고 표현하는 이러한 세팅 작업에 있어서 홍상수에게는 이야기적 대상 뿐 아니라 이미지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그의 영화에서 대표적인 장면 형식인 측면 투 쇼트 롱테이크를 생각해보자. 이는 쇼트/역쇼트를 사용하여 고전적인 현실감과 시선의 봉합을 만드는 관습적 연출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사실주의 영화에서 주로 사용하지만,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보다 양면적으로 세팅되어 있다. 측면 투 쇼트에 긴 호흡의 롱테이크로 촬영되며 주로 실내장면으로 이루어진 연출은 사실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3차원의 깊이감이 아닌 평면적 구성을 강조하여, 지속적으로 쇼트/역쇼트를 통해 영화의 허구성을 숨기고 봉합하는 영화들에 비해, 이것이 연극과 같은 하나의 허구적 장면임을 가시화하는 지점을 발생시킨다.

이는 <극장전> 이후부터 사용한 줌 인-아웃의 활용 또한 같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줌은 영화의 프레임을 가시화하여 영화의 환영성을 저해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물 혹은 피사체에 다가가 감정, 이입을 만들어내는 환영적 장치로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관객들이 홍상수의 영화 속 시각적 이미지가 회화처럼 화면을 구성하지 않아 아름답지 않다거나 보통의 영화라면 배제하고 촬영할만한 간판들, 벽에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경고문들, 길거리나 실내 장면에서 거의 있는 그대로를 촬영한 듯하다고 말하는 미술적 구성은, 한국적이라고 우스꽝스럽게 말하기도 하지만, 그럴듯한 사실로 허구성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사실적인 동시에 너무 사실적이어서 허구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양면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적 이야기의 사실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를테면 홍상수 영화의 개별 대화 장면의 사실성과는 별개로 과도한 우연이 만들어내는 작위성과 <소설가의 영화>에서 수화, 카메라와 같이 무언가를 배우는 행위, 준희(이혜영)에게 카리스마 있다고 하는 말과 같이 변주하여 반복되는 상황과 대사는 이 영화가 허구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홍상수 영화의 사실주의는 표면적으로는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 이면에 양면적으로 놓인 허구성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사실주의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위태로움이란 결국 무너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무너져 내림으로써 그럴듯한 사실인 영화가 픽션(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북촌방향, 다른나라에서), 꿈(리스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자유의 언덕), 영화(옥희의 영화, 도망친 여자)임을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잔해의 아름다움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홍상수 영화의 마법이라고 한다면 바로 위태롭게 흔들리던 형태가 무너져내리는 순간을 뜻한다.

 

홍상수의 영화

이제 <소설가의 영화>의 마법에 대해 말할 차례다. 영화감독 효진(권해효)은 자신이 만든 영화의 스타일이 변했음을 인정하며 자연스러워졌다고 말한다. 여기에 그의 아내 양주(조윤희)는 그의 영화가 맑아졌다는 말을 덧붙인다. 마치 홍상수에 대한 비평가들의 말을 그대로 붙여놓은 듯한 이 대사들은, 그것을 스스로가 인정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조적인 제스쳐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양가적 감정은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던 준희(이혜영)를 통해 더욱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소설가로서 재능이 있고 여전히 글을 쓸 수 있지만 더는 같은 방식으로 창작활동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대신 이곳저곳을 떠돌며 새로운 방식의 표현법(수화)과 시선(카메라 렌즈)을 배우고 영화라는 전혀 다른 매체를 만들 것을 선언한다. 다른 매체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소설이 아니라 영화로서 할 수 있는 것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설가의 영화는 우리가 보통 영화라고 부르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일종의 홈비디오와 같은 사적인 영상물이자 거의 스마트폰으로 촬영된 개인 기록물과 같은 느낌의 영상이다. 나오기로 했던 길수(김민희)의 남편은 나오지 않으며 그녀의 옆에 있는 할머니는 누군지 알 수 없다. 날이 좋을 때 이것저것을 배우며 돌아다니는 준희의 이야기와도 아무런 접점도 없다. 단지 카메라를 바라보고 말을 거는 길수의 모습과 꽃과 공원의 풍경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다큐 또는 기록 필름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감독인 준희가 명확히 말하고 있다. 길수의 조카 경우(하성국)가 선생님이 만드려는 영화는 다큐 아니냐고 묻자 준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한다. 이것은 픽션이다. 단지 영화 속 영화 이전에 진행된 그럴듯한 사실적 이미지들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이는 픽션일 뿐이다.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탁월한 전작들처럼 구조적 정교함으로 마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창작자로서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 느끼는 양가성에서 오는 위태로움이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로 이끌면서 만들어내는 또 다른 무너짐에서 온다. 그것은 긴 시간 자신이 쌓아왔던 형식과 그 형식에서 벗어난 이미지의 충돌 혹은 전환이다.

그동안 홍상수 영화의 표면적인 사실성, 위태로운 사실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구조에 의한 것이었다. 이야기와 인물의 일관성, 사실성이 무너지는 마법과 같은 순간이 나타날 때에도 그의 영화를 규정 짓는 형식적 특성이 완전히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반면 <소설가의 영화>는 생각지도 못했던 형식적 시도, 이미지의 전환으로 인해 강렬한 충격의 순간을 만든다. 구조의 효과를 제외하고, 홍상수 영화의 이야기와 이미지는 보편적으로 사실적이고 일상적이라 받아들여지지만, 소설가의 영화가 영화 속에서 상영되는 순간 홍상수의 기존 스타일은 상대적으로 완전히 픽션적인 이미지처럼 느껴진다. 즉 이전의 영화들이 위태로운 사실주의의 이미지, 이야기를 구조를 통해 무너뜨렸다고 한다면 <소설가의 영화>에서는 소설가가 소설로는 할 수 없는 다른 창작을 위해 영화를 만든 것처럼,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비현실에서 현실로, 표현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왕복하는 이미지의 운동, 이미지의 극적 전환이 만들어내는 감각 자체를 통해 우리가 사실과 허구에 대해 사고하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소설가의 영화>에서 영화 속 영화 장면을 제외하고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준희와 길수가 분식집에서 밥을 먹는 씬에 있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을 때 창밖으로 몇 명의 아이들이 지나가고 난 뒤 한 여자아이가 창에 서서 매우 오랫동안 카메라와 배우들을 바라본다. 마치 실제로 우연히 촬영되었지만 쇼트를 끊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속시킨 것처럼 느껴지는 이 장면은, 그 끝에 가서 아이 또한 연기자이고 모든 상황이 픽션임을 확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화 속 영화인 소설가의 영화는 허구적 이미지에서 점점 더 자유롭고 사실적인 이미지로 전환하여 우리를 기이한 해방감, 아름다움, 고양되어가는 감정 속에 그 이미지들을 바라보게 하지만 결국 다시 원래의 자리인 허구적 이미지의 극장 밖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던 소설가의 영화 또한 극장에서 상영되었다가 막을 내리는 하나의 픽션인 뿐임을 자각하게 한다. 이제 감독도, 연기자도 모두 사라진 텅 빈 극장 문밖의 복도만이 보인다. 이것은 우리 관객이 잠시 후에 보게 될 이미지이라는 점에서 사실이면서 허구이기도 한 영화적 이미지의 결말로 아주 적절하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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