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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위태로운 찰나의 아름다움 <스프링 브레이커스>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위태로운 찰나의 아름다움 <스프링 브레이커스>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2.06.13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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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자와 총이 전부다”고 장 뤽 고다르가 말한 것처럼 <스프링 브레이커스>는 여자와 총이 전부인 영화이면서, 일상으로부터 탈주하는 이야기 구조를 영화 관람 행위와 은유적으로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미치광이 피에로>(1965)같은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는 단순하고 극적 효과는 거의 없으며 영화의 형식은 인물과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한다.

또한 페르디낭(장 폴 벨몽도)이 결혼과 부르주아적 삶에서 도망쳐 베이비시터 마리안(안나 카리나)과 사랑을 나누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스프링 브레이커스>에도 일상에서 벗어난 위악적인 제스쳐로 가득하다. 예컨대 제2의 재건이라는 흑인 인권 운동에 대한 강의로 시작해 결말에 총을 맞고 죽은 흑인의 시체를 보여주거나 교회의 예배로 시작해서 마약과 범죄로 얼룩진 아메리칸 드림으로 이어진다.

 

<스프링 브레이커스>는 이 위악적 제스쳐를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양가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네 명의 주인공들이 부르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노래는 단순히 청춘을 대변하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혼전순결 서약과 섹시스타 사이의 이중적 가치관이 충돌하는 미국의 아이콘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흑인 대통령을 뽑으면서도 찰스턴 교회 총기 난사 사건이 나는 나라. 이것은 개신교적 보수성과 자유주의적 개방성 사이에서 부딪히는 미국의 단면이다.

이러한 양가성은 남성적 시선과 감각적인 이미지가 주는 유혹과 지루함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스프링 브레이커스>는 네 명의 주인공이 일상에서 벗어나는 짧은 봄 방학 기간 동안 범죄와 일탈을 저지른다는 내용을 통해, 현실을 벗어나 영화를 관람하는 찰나의 순간이란 관객들에게 내재된 (비윤리적)욕망을 대리 충족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때문에 "비디오 게임이라 생각해 그냥 영화 하나 찍는다고 생각해" "마치 꿈같아"와 같은 대사들을 반복하여 현실/일상을 벗어난 봄 방학의 일탈과 범죄가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의 은유임을 직접적이고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가상의 인물들이 돈을 훔치거나, 마약을 하거나, 포르노처럼 두 여대생과 섹스를 즐기고, 흑인들을 죽이는 것은 영화라는 환영이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내재된 욕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프닝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전시된 남성적 시선과 성적 제스쳐들 또한 그 직접성과 과장 그리고 고전적으로 이입시키지 않는 영화의 파편적 형식을 통해 어느 순간 에로틱하지 않게 느껴진다. 이는 이 영화가 시각적으로 감각적인 조명과 카메라 무빙, 미술, 의상을 과시적으로 배치를 했지만 그 과도함 때문에 감각적 영상미가 무감각하게 느껴진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모든 것이 다 환영일 뿐임을, 완급 없이 반복되는 자극적인 영상의 지루함으로 자각시키는 것이다. 이는 시청각적 이미지의 선정성 과잉과 고전적인 극적 효과가 전무한 이야기 전개의 지루함이라는 모순되었지만, 의도적인 연출로 이루어진다.

 

이 의도는 당연히 영화라는 대리만족의 대상에 내재 된 시선의 권력(미국-백인-남성)이 지닌 욕망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것을 교조적 방식을 통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이미지로 유혹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의 지루한 과잉을 통해 이 시선이 관객들의 숨겨진 욕망임을 자각시킨다. 예컨대 브릿(애슐리 벤슨)과 캔디(바네서 허진스)가 레스토랑에서 강도 행각을 벌이는 순간을 처음에는 건물 밖에서 비가시적으로 보여주어 폭력적인 순간을 숨겼다가 이후 플래시백으로 범죄의 폭력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거나, 남성적 시선을 따라 여성들을 대상화하다가도 브릿과 캔디가 남성인 에일리언(제임스 프랑코)을 총으로 위협하며 입으로 총구를 빨게 만드는 것처럼 관객들의 시선을 전복시키는 것도 이 전략의 일환이다.

이는 관객을 영화를 관람하며 비윤리적 대상에 이입하고 싶은 욕망과 거기로부터 거리를 두었을 때 생기는 죄책감이라는 양가적 감정 사이에 서있게 한다. 이를테면 독실한 개신교인인 페이스(셀레나 고메즈)가 일탈에서 비롯한 공포심과 죄책감으로 집에 돌아가는 것은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모습 중 하나이다. 때문에 <스프링 브레이커스>보는 관객은 페이스와 함께 돌아가거나 브릿과 캔디를 따라 영화를 즐기는 두 가지 선택 앞에 선다.

만약 이 위험한 영화적 유혹을 마지막까지 즐긴다면, 브릿과 캔디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 엄마에게 전화로 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진짜 재미있었어. 자아를 찾은 것 같아 드디어 다른 세상을 찾았어. 아름다운 것도 많이 보고 (...) 결국엔 모두들 자기 자신을 찾고 싶었던 거야 우린 이제 달라졌어. 세상을 다르게 보겠지 다양한 색깔, 사랑에 찬 눈과 이해심으로, 일상에서 벗어나 정말 좋았어. 학교에 돌아가도 이 여행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흑인들을 총으로 죽이며 나오는 아이러니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이중적인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여성이 남성들을 살해한다는 점에서 전복적이지만 반대로 그녀들이 여전히 비키니를 입고 있어 여전히 남성적 시선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양가적이고 기이한 감정에 휩싸이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남성적 시선으로 시작했던 영화는 에일리언과 갱스터라는 죽은 남성들의 널브러진 시신을 바라본다. 이는 모든 환영들의 종말처럼 보이지만 뒤집혀진 시선으로 에일리언의 시신에 키스하는 결말을 넣음으로써 영화라는 일탈의 매혹을 여운처럼 남긴다. 이 키스는 영화라는 비윤리적이고 거짓에 불과한 대상에 대한 빈정거림이자 동시에 현실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환영에 대한 음험한 찬사처럼 느껴진다. 결국 <스프링 브레이커스>는 모순적이고 위태로운 찰나의 아름다움이야 말로 영화라고 위험하게 말하는 것 같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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