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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돌보는 마음’을 얻기 위해 드는 비용
[장윤미의 문화톡톡] ‘돌보는 마음’을 얻기 위해 드는 비용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2.06.1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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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같은 노동자를 모십니다"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는 처지에서 돌봄 노동자에게 가장 바라는 건 아마도 ‘가족처럼 돌봐주는 마음’일 테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내 가족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마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남보다 못한 게 가족이라는 말이 반 진담이 된 시대에 타인에게 가족 같은 마음을 기대하는 건 지나친 욕심이거나,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 앞선다. ‘가족 같은 마음’이란 말에 담긴 뜻을 뻔히 알지만서도 말이다.

반대로 돌봄 서비스 노동자 처지에서 노동과 임금으로 거래가 성사되는 공적 관계에 ‘가족 같은 분을 원합니다.’라는 지극히 사적인 고용 조건이 붙는 건 꽤나 공정하지 않아 보인다. 가족처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돌봄 노동자를 원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가족처럼 희생해줄 사람을 원한다는 것인지. 어디에 방점 두어야 할지 모호하기도 하지만, 둘 중 어느 것이 맞는다고 한들 썩 유쾌한 계약은 아니다. 차라리 ‘3년 이상 경력자’ 또는 ‘1급 자격증 소지자’라는 구체적 조건이 서비스 이용자나 제공자 모두에게 현실적이고, 사람을 구하는 데도 훨씬 쉬울 것이란 생각이 든다.

노동의 자본화 아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 대비 노동의 효율성이다. 업무 능력이 절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면 사생활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고용주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이상 눈감아줄 수 있다. 하지만 업무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인성과 평판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해고 대상 1순위다. 자본주의 고용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과 능력이고, 인성이나 성품은 옵션이자 덤인 셈이다. 고용자의 인성이 고용주에게 가시적인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러나 돌봄 노동의 경우 이러한 고용 논리를 그대로 따르기엔 복잡한 사정이 놓여 있는데 돌봄 서비스 이용자는 돌봄 노동자에게 괜찮은 실력과 함께 으레 ‘(가족처럼)돌보는 마음’까지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돌봄 노동자는 돌봄 대상자에게 육체적 돌봄 이외에도 친밀한 감정, 심리적 위안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 돌봄에 노동이란 단어가 함께 쓰인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돌봄은 가족(중에서도 주로 여성)이 담당해야 하는 윤리적/사회적 의무 또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하는 무료 봉사 행위로 생각하는 경우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에서 해결되고 소비되었던 돌봄은 자본이 개입되면서 임노동으로, 무료 서비스가 아닌 유료 서비스로 전환되면서 직업화되었지만 우리 사회가 돌봄 노동(자)에 실력만큼이나 기대하는 것은 특히나 윤리적, 도덕적 마음가짐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돌봄 노동자로서 자질이 부족하거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다. 마음까지 다하지 않는 능력은 ‘가짜’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봄 노동자의 임금은 법이 정한 임금이나 시세 사이에서 거래된다. 운이 좋아 시세보다 많은 임금을 지불하는 이용자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편이 좋은 이용자고, 다수의 돌봄 서비스 이용자는 되도록 조금이라도 저렴한 노동자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진짜’ 능력을 갖춘 노동자를 구하고 싶다는 기대감은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내 마음같은 돌봄 노동자를 구하기 어려운 가장 이유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내 가족처럼 돌보는 마음을 가진 노동자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이기심에 가까운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혹, 당신은 그런 사람을 이미 고용했다고 확신한다면 당신은 정말로 행운을 가진 사람이거나, 아니면 돌봄 노동자가 마음을 다할 만큼의 비용을 충분히 치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돌보는 마음’은 상품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하는 아내, 일하는 엄마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경제 노동에 부부가 동시에 뛰어들지 않으면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요원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교육 확대와 자아실현의 기회가 여성에게 확대되면서 일하는 기혼의 여자에 대한 거부감 역시 과거와 비교해 많이 희석되었다. 그러나 경제 노동과 달리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은 부부가 아닌 여자가 ‘주’이며, 남자는 ‘부’에서 머무른다는 사실은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경제적 책임을 부담을 부부가 나누어지면서 남자는 경제 노동의 무게에서 덜었다지만 여자의 돌봄과 가사 노동의 무게는 줄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에게 ‘부탁’받으면 여전히 ‘도와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고, 집안일에 대해서는 수동적인 포지션을 유지한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일이 아니라 아내의 일, 자식을 키우는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확실하고 만만한 근거 중 하나는 바로 모성애다. 일과 사랑을 교묘히 섞어 여자의 마음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여자가 가족의 돌봄 대신 커리어에 방점을 찍기라도 하면 힘들어지는 건 여자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 모두다. 여자 혼자 해냈던 가사 노동을 가족이 각각 나누어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누어 맡아야 할 노동이 많아지고 시간이 길어지면서 불만은 속출한다. 그 ‘잘난’ 커리어를 쌓겠다고 가족들에게 이렇게 피해를 주어야 하냐는 핀잔과 원망에 익숙해지려면 웬만한 뻔뻔함이 아니고서는 힘들다. 그래도 가사 노동의 경우 욕을 먹든 핀잔을 듣든 아쉬운 대로 분담을 할 수 있는 노동이지만, 돌봄 노동은 가족의 분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산재하기에 더 복잡하고 또 어렵다. 어쩔 수 없이 제삼자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다. 우리가 으레 ‘돌봄 도우미’ 또는 ‘이모님’으로 부르는 유로 돌봄 서비스 노동자의 도움말이다. 그런데 돌봄 대상이 대개 특성상 지속적인 관심과 관리가 필요한 약자라는 점(돌봄 대상은 주로 아이, 노인, 그리고 환자다), 또한 통제가 쉽지 않아 돌발과 안전과 관련한 변수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까다로운 노동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돌봄 노동을 의뢰하는 사람은 고용주인 ‘갑’인 동시에 약자를 맡기고 부탁해야 하는 ‘을’이 되곤 한다.

그러나 돌봄 노동자를 고용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내 마음 같은 돌봄 노동자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사실, 한결같이 좋고 친절한 노동자는 없다는 사실 말이다. 돈은 돈대로 쓰면서 만족스럽지 못한 서비스를 받느니, 차라리 내가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낫겠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 만큼 마음에 드는 돌봄 노동자를 찾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불만을 남편이나 가족에게 토로라도 하면 돌아오는 건 한마디다. ‘네가 선택한 거잖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네가 하면 되잖아.’ 이 말은 마치 커리어를 선택한 여자에게 가족의 돌봄을 포기한 대가를 치르고 중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김유담의 단편소설 「돌보는 마음」은 기혼에 아이를 가진 직장여성이 돌봄 노동자를 구하면서 겪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으레 사랑과 희생으로 치환되곤 했던 ‘돌봄의 마음’은 고용과 임금이 오가는 노동 시장에서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돌보는 마음’에 인간적 애정을 기대하는 마음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김유담, [돌보는 마음](민음사, 2022)
김유담, 「돌보는 마음」 (민음사, 2022)

주인공 미연은 복직을 앞두고 딸아이의 육아를 맡길 돌봄 노동자를 찾는 중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고용 조건은 합리적인 비용과 육아에 숙련된 사람이다. 그러나 미연이 제시하는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을 구하는 건 쉽지 않다. 합리적인 비용이라는 말은 사실 고용주에게 유리한 비용일 가능성이 크고, 숙련이란 말 역시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판단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역시나 미연이 돌봄 노동자에게 제시한 가격은 시세를 반영하지 못한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라는 것, 국가기관이 인증한 실력과 이용자의 만족도는 별개라는 사실에 맞닥뜨리면서 미연은 심란해진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을 털어놓은 미연에게 세 아이를 키우면서 동시에 커리어를 유지하고 있는 워킹맘 혜정은 ‘마음이 드는 사람을 뽑되, 여차하면 교체하겠다는 마음’으로 시터를 찾으라는 조언을 한다.

유능한 워킹맘 혜정의 소개와 전문 기관의 보증, 그리고 여차하면 교체하겠다는 마음 세 가지를 완벽하게 장착한 미연은 정순을 소개받아 시터로 들인다. 정순의 가사 노동은 대체로 만족스럽지만, 막상 돌봄 노동은 그렇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리는 미연이다. 미연의 부부처럼 아이를 진심으로 예뻐하지 않는 정순의 태도 때문이다. ‘마음’이 굳이 필요 없는 가사 노동은 유능할지 몰라도 노동 돌봄에 ‘마음’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결국 미연은 교체 카드를 꺼낸다. 미연이 필요한 건 자신의 사랑과 마음을 온전히 대신해 줄 도우미이므로.

그러던 중 우연히 아파트 놀이터에서 미연의 사정을 듣게 된 남희가 미연에게 자신이 기꺼이 아이를 돌봐주겠다고 제안한다. 그것도 미연이 제시하는 조건을 모두 수용하면서 말이다. 적당한 비용, 노동자를 감시할 수 있는 장치, 게다가 (가족처럼) ‘돌보는 마음’까지 갖춘 남희는 고용주 입장에서 최적의 노동자인 셈이다.

그런데 남희에게는 미연의 아이 말고 돌봄이 필요한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녀의 시어머니다. 하지만 남희는 이 사실을 미연에게 말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이 사실을 알릴 필요나 의무는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남희의 사적인 영역이고 그것이 아이를 돌보는 일에 어떠한 피해를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희에게 이 비밀은 자기검열처럼 작동하며 미연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금기로 작동한다. 가족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사람이 남의 가족을 진심으로 돌볼 수 있겠냐는 의심과 비난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남희는 나쁜 ‘가짜’ 돌봄 노동자로 전락하게 될 것 뻔하다.

역시나 미연은 남희가 자신의 가족인 시어머니를 방치하는 것도 모자라 학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 가족을 학대하는 사람이 ‘생판 남’인 지우를 가족처럼 돌보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그런 미연 앞에서 시어머니는 학대받아도 싼 사람이라며, 자신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남희를 보면서 미연은 혼란스럽다. 남희는 아이와 자신에게 부족함 없는 시터고, 만약 미연이 CCTV를 통해 남희가 시어머니를 학대하는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면 고용 관계는 문제없이 지속했을 것이다.

좀더 확장하여 미연이 아닌 남희 입장에서 생각하면, 남희와 시모의 관계는 미연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더 정확히 말하면 침범하지 말아야 하는 남희의 은밀한 사적인 영역이다. 남희와 미연의 관계는 계약으로 맺어진 공적 관계인 만큼 미연은 남희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개입할 필요도, 명분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시어머니를 학대하는 남희의 모습은 충격적이긴 하지만 미연이나 미연의 아이에게 아직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다는 면에서 교체 카드를 꺼내기는 무리이기도 하고, 미연 입장에서 그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라는 보장도 없다. 가족을 마음으로 돌보지 않는 사람이 타인은 마음으로 돌볼 것이라는 말도 어쩌면 공동체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상상의 명제일 뿐이므로.

이 와중에 같은 팀 소속인 승주가 저지른 사건으로 미연은 또다시 골치가 아프다. 융통성을 가지고 고객 응대하지 못하는 승주 때문에 병원 고객 서비스 센터 팀장인 미연이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남자 노인은 위독한 신체를 무기로 삼아 수술 날짜를 앞당겨 달라고 요구했지만, 원칙을 고수하며 그의 요구를 거부한 승주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나머지 병원 서비스 수준을 언급하며 문제를 공론화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문제를 수습해야 했던 미연은 승주를 불러 ‘고객의 마음’을 일일이 헤아리는 것도 일의 일부라며 승주를 타이른다. 하지만 승주는 매뉴얼과 원칙을 고수하며 미연의 충고와 고객의 사과 요구를 모두 거절한다. 미연은 승주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돌봄 노동자의 특수성을 운운하며 승주를 겨우 설득한다. 그렇게 승주와 미연은 남자를 찾아갔고, 미연은 승주 대신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사과하며 고객에게 ‘돌보는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교육하겠다고 약속하며 문제를 해결한다.

고객의 사적인 감정을 이해하는 것까지가 업무이자 직업윤리라고 말하는 남자와 반대로 공적 매뉴얼에 제시된 대로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업무라고 생각하는 승주 사이에서 미연은 자연스럽게 남희와 자신과의 관계를 떠올린다. 자신이 가진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 타인의 감정까지 장악하려는 고객의 모습은 마치 시어머니를 학대하는 남희의 사적인 모습이 마치 그녀의 전부인 것처럼 환원하여 분노하고 비난하는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미연은 승주와 남자를 두고 그들에게 각각 자기 모습을 투영하며 가장 현실적인 답을 찾으려 했고, 결국 미연은 승주의 고용을 연장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굳힌다.

어떤 노동이든 주어진 매뉴얼에 따라 원칙대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돌봄 노동은 일반 노동과는 다른 특수한 지점이 존재한다. 적어도 돌봄을 제공하는 노동자는 뛰어난 업무 능력만큼이나 돌봄 서비스 이용자로 하여금 과잉에 가까운 친절과 진심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돌봄 노동에 필연적으로 마음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계약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사랑과 희생하는 마음이 좋은 돌봄 노동, 양질의 돌봄 노동의 기본이라는 심리가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돌봄 노동이 다른 육체노동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이유가 되기도 한다.

승주의 업무 태도는 주어진 원칙에 따라 업무를 진행했다는 점에서만 보면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친절과 진심까지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승주의 ‘싸가지없는’ 원칙적인 태도는 반대로 돌봄 노동자로서 업무수행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승주를 비난할 수는 없다. 돌봄 노동은 희생과 사랑으로 ‘퉁’칠 수 있는 공짜 노동이 아니라 엄연히 비용을 주고받는 임노동이며 더 많은 돌봄, 좋은 질의 돌봄을 요구하고 싶다면 그만큼의 비용을 지불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의 사랑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자본으로 측량하며 이익에 따라 개인을 고용하고 또 평가하는 자본주의 시장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직업윤리와 돌봄 노동

직업윤리의 사전적 정의는 자신이 속한 조직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윤리기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이를 실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는 윤리다. (다음 백과사전 참고)

직업윤리의 핵심은 노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공자가 조직과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충실하게 수행했는가이다. 하지만 그 능력에 판단과 결정은 전적으로 노동 서비스 이용자에게 달렸다는 점에서 그 기준은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이고, 절대적이기보다 상대적이다. 특히 돌봄 노동과 같은 특수한 노동일 경우 객관적 평가 기준도 지표도 없어 노동 제공자와 이용자 사이에서 만족도에 대한 심리적 괴리감은 다른 노동에 비해 훨씬 클 수밖에 없다.

돌봄 노동자를 구할 때 이용자는 물리적인 노동뿐만 아니라 으레 착하고 좋은 마음까지 요구하곤 한다. 이를테면 ‘돌보는 마음’까지가 돌보 노동자의 직업윤리인 것이다. 그러나 돌봄 노동자 위치에서 돌봄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공적 계약서에 ‘노동의 범위: 돌보는 마음까지 포함’이라는 사적인 조건이 붙게 된다면 어느 누가 고용 계약서에 기꺼운 마음으로 사인할 수 있을까.

고객에게 사죄하고 돌아가는 길에 팀장님은 어느 편이냐 묻는 승주의 물음에 ‘일은 일일 뿐’이라고 말하고 쏴주고 싶지만, 정작 미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물론 나는 승주 씨 편이지’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이다. 미연의 진심은 ‘자기편도, 일도 구분 못 하는 어린애’라고 말하고 있지만, 자신 역시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한 사람으로서, 직업 윤리상 승주의 마음을 돌봐주는 것으로 타협을 선택한 것이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남희 문제를 두고 미연이 어떤 선택을 할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남희를 당장 해고하지는 않되, ‘여차하면 교체하겠다는 마음’만큼은 유지할 것이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커리어를 위해, 자본 축적을 위해, 미연에게 우선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나 대신 돌봄 노동을 해 줄 노동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보는 마음’을 장착한 ‘진짜’ 돌봄 노동자를 찾을 때까지 미연은 탐색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미연은 고용원칙에 따라 노동자를 선택하고 직업윤리를 바탕으로 노동자를 판단할 뿐이다. 미연의 행동이 이율배반적이라고 비난 말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노동 시장 메커니즘 아래서 고용하고 또 고용 당하고 있으므로.

 

 

글ㆍ장윤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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