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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아의 문화톡톡] 『파랑 오리』를 통해서 보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와 평화적 공간 ‘파란 연못’
[김시아의 문화톡톡] 『파랑 오리』를 통해서 보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와 평화적 공간 ‘파란 연못’
  • 김시아(문화평론가)
  • 승인 2022.07.0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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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파랑 오리』, 새로운 가족 공동체

그림책 『파랑 오리』(2018)와 『초록 거북』(2021)을 출간한 릴리아 작가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후, 한국에서 그림책 작업을 하고 있다. 새로운 가족애를 다룬 우화 그림책 『파랑 오리』는 엄마인 오리와 아이인 악어의 관계를 보여주고 『초록 거북』은 아빠 거북과 아이 거북의 관계를 보여준다.

 

Ⓒ릴리아, 『파랑오리』, 킨더랜드, 2018
Ⓒ릴리아, 『파랑오리』, 킨더랜드, 2018

삼 년 동안 준비했다는 작가의 첫 그림책 『파랑 오리』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처럼 치매를 소재로 하고 있으나 무겁지 않다. 엄마가 치매를 앓아 슬프지만 동시에 사랑스럽고 귀엽다. 등장인물이 오리와 악어, 동물이라 그럴까? 덩치가 큰 악어는 몸이 작은 오리를 ‘엄마’라고 부른다. 정체성이 다른 그들은 파란 연못에서 처음 만났다.

“따스한 바람과 차가운 바람이 번갈아 불던 가을의 어느 날이었어요. 파랑 오리는 아기 우는 소리를 듣고 헤엄쳐 갔어요./ 파랑 오리는 아기 악어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어요. 아기 악어는 스르르 잠이 들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 악어는 보이지 않았어요.”

잠에서 깨어난 새끼 악어는 부리와 다리가 파랗고 몸이 하얀 파랑 오리를 처음 본 날, “엄마!”라고 부른다. 그때부터 오리는 작은 회색 악어의 엄마가 된다. 갑자기 ‘엄마’가 된 파랑 오리는 새끼 악어를 보살피고, 씻기고, 수영하는 법도 가르친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엄마”라고 느낀다. “혼자서 놀 줄도 알고, 엄마를 위해 꽃도 따고, 노래도 불러 주”는 악어는 자라고 자라 오리보다 훨씬 커진다. 하지만 “파랑 오리의 기억들이 조금씩 도망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보살피는 관계가 역전된다. “파랑 오리가 악어를 기억하지 못할 때”, 악어는 웃으면서 “파랑 오리를 찾고 있어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거든요.”라고 대답하고 오리가 자신에게 해 준 것처럼 씻기고, 먹이고, 잠도 재운다. 악어는 엄마 오리를 안고 다짐한다.

“나는 엄마의 아기였지만, 이제 엄마가 나의 아기예요. 내가 지켜 줄게요.”

릴리아의 『파랑 오리』가 특별한 이유는 정체성이 다른 동물이 엄마와 자식 관계가 되는 걸 보여주며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까지 이야기한다. 색도 그림도 간결하지만, 작가가 이야기하는 메시지는 사랑과 가족애를 넘어선다. 독자는 입양과 진정한 ‘인간애’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엄마, 이곳 기억해요?”라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다음 양면 페이지에서 시점은 혼자 울고 있는 새끼 악어와 우는 소리를 듣고 헤엄쳐 다가가는 파랑 오리를 보여준다. 이어 악어를 돌보는 파랑 오리와 악어의 성장을 보여준다. 새끼 악어는 파란 나비와 파란 꽃을 가지고 놀며 어느새 덩치가 큰 어른 악어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파랑 오리의 기억들이 조금씩 도망가기 시작했”고 악어는 오리 엄마를 떠나지 않는다. 치매에 걸린 파랑 오리를 돌보며 ‘돌 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겉표지에서 파란 연못에 누운 파랑 오리 배 위에 아기 악어가 편하게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은 이야기가 끝날 즈음 어른이 된 악어의 배 위에 파랑 오리가 편안하게 잠을 자는 장면으로 반복적인 구도를 보여주지만, 인물들의 위치가 바뀐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존재가 파란 연못에서 만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행복하게 산다. 각자 혼자가 아니다. 혼밥, 혼술 문화와 더불어 1인 가구 늘어가는 요즘 시대에 이런 그림책은 따듯한 감동을 주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선을 보여준다. 악어는 거칠거나 포악하게 그려지지 않았고 파랑은 따듯하다. 작가는 ‘악어’라는 공동체와 ‘오리’라는 공동체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다른 종의 동물이 만나 가족 관계를 이루는 걸 보여줌으로써 선과 악을 구분하는 권선징악의 구도를 넘어서고 ‘악어와 오리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선입견을 깬다. 그러므로 이 그림책은 혐오와 차별을 생산하는 어른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그림책이다.

 

따뜻한 색 파랑, 평화와 자유 공동체

『파랑 오리』에서 파랑은 평화로운 파란 연못과 파란 꽃, 파란 나비와 더불어 파랑 오리의 부리와 발이 파랗게 칠해진 주요 색이다. 색을 연구하는 미셀 파스투르에 의하면 평화를 상징하는 파랑은 지구 절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이다. (미셸 파스투로, 『파랑의 역사』, 2017) 파랑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차가운 색’이 아니라 중세 시대엔 ‘따뜻한 색’이었다. 이러한 색의 온도를 반영한 21세기 영화는 프랑스에서 개봉되었던 영화 <아델의 삶: 쳅터 1과 2 La vie d’Adèle: Chapitres 1 et 2 >(2013)이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따뜻한 색, 블루>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그 이유는 영화가 쥘 마로(Jul’ Maroh)의 그래픽 노블 『파랑은 따뜻한 색이다 Le bleu est une couleur chaude』(2010)을 원작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프랑스 북부 릴을 배경으로 고등학생인 주인공 클레망틴이 파란 머리 엠마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동성연애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렇게 파란색이 주는 시각적 언어는 주제와 더불어 강렬하다. 영화에서 파란색은 감성적이며 뜨겁다. 색에 대한 온도가 기존의 문화를 전복시킨다. 파랑은 남성적인 색이었는데 어느덧 여성적이며 동성애적인 색으로 상징된다.

 

Ⓒ Abdellatif Kechiche, La Vie d'Adèle, 2013
Ⓒ Abdellatif Kechiche, La Vie d'Adèle, 2013

 

“파란색이 선호되기 시작한 것은 (색에 대한 선호도는 항상 변하기 마련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온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세기에 청색은 신학적으로 중요시되었고 예술적으로도 그 가치가 상승했으며, 13세기에는 염색업자들이 아름다운 청색 염료를 만들어 냄으로써 청색의 인기 상승에 공헌했다. 그리고 14세기 중반부터는 문장학적으로 중요한 색깔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2세기 후인 16세기에는 종교 개혁에 발맞춰 도덕적 차원에서 경건한 색이 되었다. 그러나 청색이 결정적으로 승리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오래전부터 알려졌으나 사용하는 데에 있어 자유롭지 못했던 천연 염료인 인디고를 폭 넓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합성 안료의 제조 방법이 발견되어 염색에서와 마찬가지로 회화 분야에서도 다양하고 새로운 색조, 감청색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형성된 색의 상징 체계에서 진보의 색, 빛의 색, 꿈과 자유의 색으로 인식되어 선두를 차지하면서 청색의 위치가 확고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까지 낭만주의 영향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의 혁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셀 파스투로, 2017:199~200)

색깔은 국기를 상징하고 문화를 표상한다. 우리나라 태극기는 밝음과 순수를 상징하는 흰 바탕 위에 적색과 남색, 곧 파랑의 태극 문양은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을 의미하며 검은색의 건·곤·감·리 4괘가 네모 모서리에서 태극을 둘러싼다. 검은색이 없는 프랑스의 국기는 파랑, 하양, 빨강으로 된 삼색기다. 파랑은 자유, 하양은 평등, 빨강은 형제애를 상징하는데 프랑스인들은 특히 파랑인 ‘블루’를 국가팀의 대표색으로 표상한다. 릴리아 작가가 태어나고 자랐던 아르헨티나의 국기를 보면 하늘색, 하얀색, 하늘색으로 가로로 구성되었는데 가운데 흰색 줄에 5월의 태양이 그려져 있다. 하늘색과 하얀색은 스페인 식민지군과 싸웠던 아르헨티나 민병대가 입었던 군복 색상에서 유래되었고 5월의 태양은 오월의 혁명을 의미한다. 색은 이렇게 국가와 역사를 상징하며 정신을 표상한다. 보편적으로 평화를 상징하는 파랑은 국가와 국가 간의 경계가 아니라 상생과 평화로 나아가는 색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이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유럽연합을 만들면서 만든 유럽기에도 파랑이 바탕색이 된다. 하지만 유럽은 진정으로 평화로 나아가고 있는가?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문서나 행정기구의 문서와 매체들이 진정성이 없는 것일 수 있어 비평가들이 저자의 얼굴을 재구성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우리 근현대사회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우연적이고 파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방식이 우선은 주체들끼리 서로를 파악하게 하는 전체적이고 총괄적인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대게 글로 쓰인 문서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간접적 재구축의 결과물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더이상 사람들과 직접 접촉해야 하는 구두 전승이 아니라, 도서관에 가득 쌓여 있는 책이나 다른 문서들을 통한다는 것입니다. 비평가는 이런 문서들을 통해 그들 저자의 얼굴을 재구성하곤 합니다. 현재는 기록된 문서나 행정기구 같은 온갖 종류의 중간 매체를 통해 같은 시대를 사는 대다수와 소통합니다. 이런 매체라는 것은 중간 역할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통성, 더 나아가 진정성이 결여된 것일 수 있습니다.”(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2018: 24~25)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의 생활을 보면서 문학에서 작가들이 묘사했던 에덴의 정원과 ‘복 받은 자들의 섬’이 사실이었다고 기존의 제국주의적인 시선에서 낙후되고 원시적으로 바라보던 시각과는 다른 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서양보다 더 서구화된 교육을 받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타자를 적대적인 구도 속에서 바라본다. 이 생각은 이중적인데 유럽과 북아메리카 국가들엔 관대하고 동남아와 아프리카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경제 논리와 차별적 시선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남북한의 대결 구도는 해외여행 자유화(1989.1.1.)가 시작된 지 삼십 년이 넘어도 논리를 마비시키고 왜곡한다. 이러니 산업적으로 선진국이 되었다고 하지만 정신이 퇴행한다. 청년이 보수화되고 극도로 이기적인 세대가 되면서 연세대 3명은 청소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시위에 “수업권 침해”를 주장하며 수업권 소송에다 손해배상소송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에게 타인은 내가 아니다. 인지상정의 감정조차 없다.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겐 아름다운 유년기의 추억이 담긴 ‘파란 연못’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진정성이 없는 매체만 접해서 그런 건 아닐까?

 

 

글·김시아 KIM Sun nyeo

문학·문화평론가.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파리 3대학에서 ‘그림책 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대학에서 문학과 그림책을 연구하고 가르칩니다. 또한 ‘시와 내면의 아이’를 뜻하는 ‘시아’라는 필명으로 번역을 하고 문화·문학 평론을 씁니다. 옮긴 책으로 『기계일까 동물일까』 『아델라이드』 『에밀리와 괴물이빨』 『세상에서 가장 귀한 화물』 『엄마』 『오늘은 수영장일까?』(7월13일 출간예정)와 함께 쓴 평론집 『문화, 정상은 없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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