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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국의 문화톡톡] 산 - 개울 그리고 강의 물
[최양국의 문화톡톡] 산 - 개울 그리고 강의 물
  • 최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2.07.0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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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물, 너는 맛도 없고 빛깔도 향기도 없다. 너를 정의할 수도 없다. 너는 우리가 알지 못한 채 맛보는 물건이다. 너는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다. 너는 관능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쾌락을 우리 내부 깊이 사무치게 한다. 너와 더불어 우리 안에는 우리가 단념했던 모든 권리가 다시 들어온다. 네 은혜로 우리 안에는 말라붙었던 마음의 모든 샘들이 다시 솟아난다.”

- 《인간의 대지》(1939년), 생 텍쥐베리, 안응렬 역 -

 H2O. 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하나의 산소 원자가 결합된 것. 물은 이처럼 단순하지만, 그 성질로 인해 가장 놀라운 매직 쇼를 준비한다. 물질로 덮여가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산새. 후드둑 비가 내리면 소란스러운 총총걸음을 남기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물은 산에서 비로 태어나 개울을 지나 강으로 흘러가며 가슴 설레는 마법을 보여준다. 산새는 파란 붉은 색 비, 분홍 보라색 비, 그리고 하얀 까만색 비를 맞으며 물과의 여행기를 남긴다.

 

산속에 / 내리는 비 / 물 탄생 / 근원이고

 물은 산에서 비로 내리며 태어난다. 이러한 산속 비 내리는 풍경은 탈자아적 이성과 절제된 감정의 토속적 시어를 통해 정지용(1902년~1950년)의 《비》(1941년)로 그려진다.

 

* 《비》(1941년), 정지용, Pixabay
* 《비》(1941년), 정지용, Pixabay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바람.// 앞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山)새 걸음걸이.// 여울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낱//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 《비》(1941년), 정지용 -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형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적확한 자연어에 의한 운율에 중점을 둔다. 이미지즘(Imagism) 측면에서 비 내리는 산속의 정경을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다. 이에 대해 장동석은 「한국 현대시의 탈주체적 사유방식과 전통적 미의식 상관 연구」(한국시학연구 제42호, 2015년 3월)에서 “1930년대 한국 현대시에의 중요한 갈래 중의 하나인 이미지즘 시는 탈주체적 사유로 대상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자 했다. 시적 자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대상의 자율적 작용으로 대상의 고유성을 생성하게 한다는 점에서 주체 중심적인 시와 변별되는 새로운 시였다. 정지용 시는 이를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특히 정지용의 후기시는 영미 이미지즘 시와의 영향 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정지용 후기시에 제시되는 대상들은 가시적 형상 이상의 아름다움을 그것의 이면으로 가짐으로써 깊이를 마련한다.”라고 한다.

먹구름의 하강 이미지인 돌로 시작하는 대상의 형상 자체는, 연관되는 대상들을 향해 나아간다. 이어지는 대상과 대상 간의 관계는 상호 다른 시공간적 양상을 반영하며 주체적 아름다움으로 피어난다. 이러한 대상은 시적 화자의 생략이나 그 자아를 벗어난 여백을 통해 그것의 가시적 형상을 포괄하는 아름다움의 외연을 확장한다. 대상 자체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냄과 더불어 다른 대상과의 감정적 연관성도 유기적으로 표출하는 확산 지향형 속성도 드러낸다.

《비》는 형식 면에서 2행 1연의 형태가 네 번 반복된 총 8연 16행으로 이루어진다. 길이가 가장 짧은 행은 두 글자이며, 가장 긴 행은 아홉 글자이다. 짝수 연의 끝은 마침표, 비가 계속 내리는 것을 암시하는 7연을 제외한 홀수 연의 끝은 쉼표로 동행한다. 이 시의 구성에서 두드러진 것은 ‘기(1연과 2연)~승(3연과 4연)~전(5연과 6연)~결(7연과 8연)’의 추보적 서사식 전개이다. ‘기승전결’ 형태는 체계적 안정성과 논리적 완결성을 강조하며, 인적 끊어진 산에서 내리는 비의 균형적 아름다움을 도드라지게 한다. 내용 면에서는 ‘기(1연과 2연)’는 비가 내리기 직전 풍경으로써 푸른 하늘빛 돌에 그늘이 차고 바람이 부는 모습~‘승(3연과 4연)’은 빗방울이 토도독 떨어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산새의 걸음걸이에 비유하여 나타내는 정경~‘전(5연과 6연)’은 떨어진 빗방울들이 빗물로 모여서 여러 갈래의 계곡 여울물이 되어 흩어져 내려가는 장면~‘결(7연과 8연)’은 잠시 주춤하던 비가 다시 후드득 내리기 시작하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산속 비 내리는 풍경에서 물의 순환론적 측면에서 탄생을 만난다. 이 시는 대상과 대상 간 속성에 대한 자아로부터의 자유로움과 감정에 대한 밀고 당김의 압축형 시어를 드러낸다. 짧은 행과 규칙적인 연 구분 및 쉼표와 마침표의 공간적 배치를 통해 여백과 쉼의 미를 보여준다. 마치 산새가 되어 비와 나들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의 탄생으로서의 비 내리는 모습을 순차적 시간의 안정적 질서에 맞추어 아주 섬세하게 그려 내고 있을 뿐, 주체적 자아를 향한 감정 표출로 연결되지 않는다. 산속 물의 탄생은 돌에 찬 파란 하늘의 그늘이 붉은 잎에 떨어지는 찰나적 붉은 비로 겹치며, 물을 상징하는 대상과 대상 간 긴장과 이완의 연속선상에서 후드득으로 이어진다. 토속적 생명력의 아름다움이 산에서 내려와 개울가 소녀를 향해 흘러간다.

 

개울로 / 흘러오며 / 물 성장의 / 원형으로

 산에서 비로 내리며 태어난 물은, 개울을 지나며 성장의 단계를 거친다. 이러한 개울을 통한 물의 성장기는 황순원(1915년~2000년)의 《소나기》(1953년)를 만나게 한다. 짧은 시간 동안 갑자기 세차게 쏟아졌다가 그치는 비처럼, 어느 여름날 시작하여 가을날 한줄기 소나기처럼 너무나 짧게 끝나버린 소녀와 소년의 안타깝고도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 《소나기》(1953년), 황순원, Google
* 《소나기》(1953년), 황순원, Google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중략)~.” 공간적 배경인 개울가에서 소녀와 소년이 만난다. 소녀는 파랑과 빨강의 혼합색인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개울에서 소년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물장난을 친다. 대조적 성격인 소녀와 소년의 만남을 향한 과정은 물의 멈춤과 흐름으로 연결된다. 물에는 흘러가는 도중에 연못이나 호수처럼 멈추어 있는 물과 개울이나 강의 물처럼 흐르는 물이 있다. 이런 물의 정중동의 미학은 소녀와 소년의 각기 다른 기다림의 성격적 양면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먹장구름으로 이어진다.

“참, 먹장구름 한 장이 머리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산을 내려오는데, 떡갈나무 잎에서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목덜미가 선뜻선뜻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중략)~.” 산으로 놀러 갔다 소나기를 만난 소녀와 소년.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하는 시각적 이미지화를 통해 아름다운 사랑의 서사가 슬픈 이별의 서사로 전환되는 암시를 보여준다. 이는 물의 끊어짐과 이어짐이라는 속성을 통한 전환의 가능성과 연결된다. 시간적인 측면에서 물은 비회귀적 흐름을 통해 과거~현재~미래를 차단하지만, 회귀적 순환을 통해 이어주기도 한다. 또한 공간적인 측면에서 넓이와 깊이, 그리고 그 무게로 인해 경험론적 단절성을 야기하지만, 비어있음에 대한 채움과 연결을 통해 보편론적 연결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맑은 하늘~먹장구름~빗줄기는 끊어짐과 이어짐의 단면을 보여주며 개울물로 나아간다.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 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는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고 있었다.~(후략)~.” 소녀네가 양평으로 이사하게 되어 소년은 소녀와의 이별을 준비한다. 호두알과 갈꽃의 상징성을 통해 소녀를 그리워하며 까무룩 잠이 든 소년. 부모님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소녀의 죽음과 말줄임표로 마무리되는 잔망스러운 유언을 간접적으로 듣게 된다. 갈꽃 같은 소녀의 적극적인 사랑과 메밀꽃 같은 소년의 소극적인 사랑은 징검다리의 중의성을 통해 만남과 이별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인간의 만남과 이별은 모두 사랑과 연결된다. 물은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사랑을 나누는 매개체이며 공간이다. 우리는 개울가 소녀와 소년의 순수한 사랑을 통해 물의 순환론적 측면에서 성장을 만난다. 근원적 원형력의 순수함이 개울을 지나 또 다른 개울을 만나며 강을 향해 내려간다.

 

강물의 / 소리 성찰력 / 물 순례의 / 기록이네

 개울을 지나며 성장의 단계를 거친 물은 강에 이른다. 개울을 통한 물의 성장기는 멈춤과 흐름, 끊어짐과 이어짐, 그리고 만남과 이별의 이중적 상징성을 욕망으로 맞으며 성숙을 추구한다. 파란 붉은 색 비, 분홍 보라색 비를 모두 맞는다. 물 그 자체가 고유의 색깔이 없기 때문에 탄생~성장의 단계를 거치며 어떤 색깔도 받아들인다. 박지원(1737년~1805년)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을 글로 쓴, 그의 《열하일기(熱河日記)》중 권14 <산장잡기(山莊雜記)>에 수록되어 있다.

 

* 《열하일기(熱河日記)-일야구도하기》, 박지원, Google
* 《열하일기(熱河日記)-일야구도하기》, 박지원, Google

이는 ‘하룻밤 사이에 아홉 번 강을 건넌 기록’이란 뜻으로, 자신이 직접 강을 건넌 체험과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의 관찰과 사유를 바탕으로 깨달은, 인생 내면의 진리를 끄집어내어 보여준다. 구체적 경험을 통한 글이므로 관념적이지 않고 이성적이며 실질적이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 원문의 번역본인 《열하일기(熱河日記)》(하, 대양서적, 1973년)에 의하면 “하수는 두 산 틈에서 나와 돌과 부딪쳐 싸우며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과 슬픈 곡조와 원망하는 소리가 굽이쳐 돌면서, 우는 듯, 소리치는 듯, 바쁘게 호령하는 듯, 항상 장성을 깨뜨릴 형세가 있어, 전차(戰車) 만 승(萬乘)과 전기(戰騎) 만 대(萬隊)나 전포(戰砲) 만 가(萬架)와 전고(戰鼓) 만 좌(萬座)로서는 그 무너뜨리고 내뿜는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중략)~.​혹은 말하기를, “여기는 옛 전쟁터이므로 강물이 저같이 우는 거야.”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니, 강물 소리는 듣기 여하에 달렸을 것이다. ~(중략) ~. 지금 나는 밤중에 한 강을 아홉 번 건넜다. ~(중략)~. 그 위험함이 이와 같으니, 물소리도 듣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요동 들은 평평하고 넓기 때문에 물소리가 크게 울지 않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하(遼河)가 일찍이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히 밤에 건너보지 않은 때문이니,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이 오로지 위험한 데만 보느라고 도리어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하는 판인데, 다시 들리는 소리가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데만 있어 바야흐로 귀가 무서워하여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마음이 어두운 자는 귀와 눈이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혀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중략)~.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니 외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 이 같거늘, 하물며 인생이 세상을 지나는데 그 험하고 위태로운 것이 강물보다 심하고,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이 되는 것임에랴.~(후략)~.“라고 한다.

강물을 건넌 경험을 통해 외부의 사물에 대한 외물(감각)과 마음의 상관관계를 낮의 하얀 비와 밤의 까만 비의 비유를 통해 나타낸다.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리며 사물을 이성적이며 실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강물의 깊고 넓은 소리에 대한 내적 자아를 향한 연결과 울림을 통해 물의 순환론적 측면에서 성숙을 만난다. 내면적 성찰력의 초연함과 함께 강을 건너 ‘인간의 대지’를 향해 가는 길, 싯다르타를 찾는다.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년~1962년)의 소설 《싯다르타》(Siddhartha, 1922년)의 주인공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추구하며 세속과 탈속의 경계인 강을 반복적으로 건넌다. 세속과 탈속의 공간을 교차하며 방황하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은 뱃사공인 바수데바의 집이다. “(싯다르타) 당신만큼 남의 말을 잘 경청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점도 당신에게서 배우고자 합니다.” “(바수데바)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한테서는 아닐 겁니다. 경청하는 법을 내게 가르쳐준 것은 강물이고, 당신도 강물로부터 배우게 될 테지요.”

《인간의 대지~비~소나기~일야구도하기~싯다르타》는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땅~하늘~강을 향한 물 순례의 기록. 산새의 생명력, 조약돌에 의한 원형력, 그리고 낮밤을 향한 성찰력. 물이 비로 떨어지고, 이어지며, 퍼붓는다.

 

글 · 최양국

격파트너스 대표 겸 경제산업기업 연구 협동조합 이사장

전통과 예술 바탕하에 점-선-면과 과거-현재-미래의 조합을 통한 가치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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