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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더 나은 선택 (Advantageous), 2015 > 저예산 SF영화의 성취 : 타자의 욕망에 대한 영화적 저항
[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더 나은 선택 (Advantageous), 2015 > 저예산 SF영화의 성취 : 타자의 욕망에 대한 영화적 저항
  • 김 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2.08.0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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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이동에 관한 소재는 매혹적이다. 이 소재는 태생적으로 인간 존재론에 관한 질문을 내포한다. 그래서인지 영혼 이동에 대한 상상력은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다.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 1995>부터 <트랜센던스 (Transcendence), 2014>, <영혼 사냥 (The Soul), 2021>처럼 영혼이 몸과 분리된 채 새로운 몸이나 대안 몸이라고 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 인공지능(A.I) 혹은 클라우드 같은 대형저장장치로 업로드되고 복제되며 치환된다. 영혼 이동을 보여주는 여러 경향 중에서도 <더 나은 선택>은 ‘뇌’를 통한 이식을 통해 극한의 성형을 꾀한다. 뇌를 복제하거나 이동해서 영혼을 이동하여 새 몸을 얻고 기존의 몸은 폐기하는 것이다. 쓰던 몸을 부정하고 폐기(사망)하는 것과 새 몸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몸에 대한 타자의 욕망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뇌를 통한 영혼 이식: 완벽한 성형 

<더 나은 선택>은 일상에 드리워진 자본주의 욕망과 가부장적 욕망, 그리고 그런 타자의 욕망과 부딪쳤을 때 직면하게 된 피할 수 없는 고뇌를 섬세하게 그린다. 타자의 욕망은 ‘더 나은 선택’을 통해 불안과 번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에는 타자의 욕망에 대해 저항하거나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다. 기꺼이 자기 몸을 희생하여 죽이고 타자의 욕망에 부응한 복제 영혼으로 남는다. 제니퍼 팡 Jennifer Phang 감독 자신이 중국/말레시아/베트남계 미국인 여성 감독이라는 점, 영화 속 주인공 그웬으로 출연한 재클린 김 Jacqueline Kim 역시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써 공동으로 각본을 썼다는 점 등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타자’는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존재론적 진정성을 띤다는 것을 염두에 둘 수 있다. 더구나 이들은 영리하게도 저예산 SF영화라는 장르 형식의 몸을 빌려 디스토피아라는 미래를 구현해 놓고 은유와 비유, 함축을 통해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영혼 이동 시술을 통해 보여주는 몸과 타자의 욕망: 자본주의, 모성 그리고 인종

그웬(재클린 킴)은 거대 바이오 회사에서 제품 홍보 스피처로 일하며 딸 줄스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이다. 영화 첫 장면은 그웬과 줄스가 피아노치며 노래하는 서정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모녀 하모니의 원곡은 미레이 마티유 Mireille Thieu의 1968년 앨범 <노엘 Noel>이라는 음반에 수록된 ‘구유에 누워계시는” 캐럴이며 그웬과 줄스처럼 마티유와 소녀의 이중창이다. 이 장면은 디스토피아라는 미래 공간 배경에 크리스마스라는 시간 배경을 좌표로 만들어 이후로 전개될 영화의 메시지와 키워드를 함축한다. 서정적인 노래와 망원렌즈로 결합한 두 사람 쇼트(two shot)는 물리적 거리만큼 정서적 밀착도 긴밀하게 장면화 mise-en-scene 한다. 그러나 세상과는 분리되고 고립된 크리스마스는 단둘이 먹는 피칸 파이처럼 단출하다. 이후 이 영화의 서사에서 모녀에게 던져진 어려운 문제들은 그 밀착의 점도를 옅게 한다. 이후에 반복된 모녀 하모니는 원형의 구조를 갖추지만 마치 회오리의 원형처럼 결국 달라진 트랙을 쫓는 차이와 반복의 구성을 보인다. 이들은 같은 모녀이나 달라진 모녀이기도 하니, 그 ‘다름’은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일 것이다. 즉, 무엇이 이 모녀의 시작과 끝이 다르게 했을까?

일단 첫 번째 문제는 해고당하는 그웬에서 출발한다. 취업을 위해 난자 판매까지 고려하지만, 딸의 학비를 지원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모녀의 운명이라는 드라마는 미래 사회와 SF라는 안전장치를 깔아 놓고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실보다 더 사실적인 문제에 직면하도록 한다. 서정적 분위기의 첫 장면에 이어지는 빌딩 폭발 장면은 풍경처럼 멀리 보이지만 9.11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별다른 SF적 첨단 세트와 고비용 장치 없이 암울한 미래, 이 모녀가 사는 공간이 소개된다. 싱글맘이지만 지성과 경력으로 그간 그럭저럭 버티며 살던 그웬에게 이제 현실은 그 가혹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욕망의 실체를 보여주는 회사

그웬 모녀가 처한 현실은 첫째, 회사는 그웬에게 더 젊은 소비자들을 타겟으로 하는 마케팅을 위해 그웬을 해고하고 젊은 직원으로 교체하겠다는 통보를 한다. 두 번째, 통장 잔액은 곤두박질친다. 셋째, 이 와중에 재능 있고 똑똑한 딸은 좋은 학교에서 기량을 펴고 싶어 한다. 한국계 미국인에게 A 성적표는 평균(Average)이라는 농담에 대부분 수긍하는 미국 사회에선 똑똑한 한국계 미국인 자녀와 한국계 미국인 엄마의 교육열의 조합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이 엄마는 사랑하는 딸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 진학을 위한 딸의 욕망은 엄마에게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은 노골적이다. 회사로서는 젊고 매력적인 서구인의 모습에 그웬의 경력과 능력이 담긴 뇌를 복제하여 옮기는 것이 최선이다. 회사는 이를 위해 완벽한 성형 즉 새로운 몸에 기존의 뇌를 복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욕망으로 표현되는 자본주의 욕망은 차갑고 음침하다. AI를 동원한 거대 자본주의는 그들의 욕망을 위해 그웬의 주변 상황을 조절하여 궁지에 몰아넣고 마치 스스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기획해 놓는다. 그녀는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녀는 자신의 뇌에서 다른 몸으로 데이터를 복제한 이후로 그녀의 몸은 사실상 ‘사라진다(사망한다)’라는 것을 알고 망설인다. 결국 그녀는 영혼이나마 존재할 수 있으며 이 선택이 딸에게 최선의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가혹한 자본주의 욕망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웬에게 사랑하는 딸은 자신이 “사는 이유”이기 대문이다. (이 부분, 한국계 미국인인 재클린 김이 각본을 쓰고 그웬의 역할을 한 것을 고려한다면 다분히 다중적이고 문맥 context 적 의미를 갖는다.) 그웬이 딸 쥴스에게 영혼 이동 시술과 몸의 죽음에 관해 설명해주지만 쥴스는 엄마의 희생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엄마의 봉급 인상과 그로 인해 자신에게 기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식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타자의 욕망이다. 그웬도 그러한 타자의 욕망을 내재화한다. 라캉의 말처럼,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하지 않던가. 모성과 문화적 컨택스트로 인해 내재화된 그웬의 욕망은 두 개의 몸으로 나뉘어 복제되는데, 하나는 새로운 몸이며 다른 하나는 딸에게 전해지는 유전자다.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은 뇌 복제를 통한 영혼 이동 시술이며 이면에서는 엄마와 딸이라는 밀접한(미토콘드리아 mRNA) 유전적 복제가 함축된다. 그러므로 엄마-딸의 관계를 통한 모성이라는 것이 중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지 엄마-아들, 혹은 아버지-딸 등은 이 정도의 긴밀하고 중의적 의미가 있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메시지는 복제의 에러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혼은 완벽하게 복제될 수 없다는 것. 몸이 없이 뇌를 복제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모순이라는 것. 그러므로 엄마와 딸의 mRNA 유전이라는 생물학적 유전에 눈 감은 채 뇌만을 통한 복제는 태생적으로 오류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도 모성의 이름으로 타자의 욕망을 내재화했던 생물학적 엄마의 모성은 새로 복제된 몸에서 복제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모성이 사라진 젊고 아름다운 새 몸은 자기 몸에 남아 있는 욕망으로 그웬 영혼의 욕망을 제거한다.

 

다양성과 달관

 

아시안 중년 여성의 몸은 폐기된다
아시안 중년 여성의  몸은 폐기된다

이민자로 구성된 미국이라 할지라도 아시안은 여전히 소수인종이다. 그중에서도 여성 아시아인은 소수인종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소외를 감수해야 한다. 더구나 독신 엄마니, 세상살이는 이미 녹록지 않다.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그웬의 자존감은 점차 희미해지고 자조적 인종 바꾸기까지 도달하면 ‘더 나은 선택’이 ‘유리한’지 돌아본다. 영혼 이동 시술을 통해 인종을 바꾼다는 상상은 인종적 편견에 대한 영화적 저항이며 주류사회가 제안하는 욕망에 대한 은유적 저항이다. 인종적 편견에 대해 다양성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항변이기도 하다. 남성, 자본주의 권력의 욕망을 알아차리지만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그웬이 아시안 중년 여성의 몸을 죽이고 지적인 영혼은 불완전한 복제를 하여 어설픈 부활을 해야 했다는 설정에 담긴 주장은 그런 의미에서 다중적이다.

이 다중성은 감독의 장르 선택에서 한 번 더 기지를 발휘한다. 이 영화는 SF라는 형식을 빌은 몸이며 이를 통해 유리하게 (Advantageous) 사용하고 있다. 저예산 SF 장르라면 어떤 메시지든 효율적으로 담을 수 있는 일종의 대안 SF 장르다. 꿈같은 미래 사회를 그린 장르에 담지 못할 내러티브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장르를 통한 내러티브 다양성에 대한 통합적 시도는 이 영화의 영화음악에서도 그 소임을 다한다. 음악감독 티모 첸 Timo Chen은 영화 첫 장면의 모녀 하모니로 시작해서 공원의 이름 모를 바이올린 연주자의 서정적인 멜로디로 영화 속 배경음악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심미적이고 효율적으로 메시지와 정서를 담아낸다. 디스토피아 공간의 불안을 채우는 음악 역시 실험적 악기 구성과 몽환적이고 현대적인 음악으로 구현해 낸다. 이를 위해 티모 첸은 그의 스튜디오를 실험실처럼 사용함으로써, 발진기나 칫솔로 기타나 바이올린, 비파를 긁고 진동시키며, 개조된 악기를 통해 비현실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음악은 저예산 SF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고 분위기를 이끌고 간다.

예컨대, 엔딩장면의 경우 거리의 아시안 할아버지 연주자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선율은 냉혹한 폭풍이 지나간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일견 평화로운 가족 나들이 풍광처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카메라는 바이올린 선율의 리듬과 속도로 나뭇잎과 햇살을 패닝 쇼트 Panning Shot에 담고, 우여곡절 끝에 모인 다인종 가족을 무심한 듯 달관한 듯 관망한다. 이 관망의 렌즈 안에는 나비와 꽃과 거북이와 명상이 배치되어있다. 아시안 지혜의 상징들이 타자의 욕망을 걸러낼 수 있는 다양성의 역할을 할지 판단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글·김 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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