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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름을, 보라
그들의 이름을, 보라
  • 장일호
  • 승인 2011.12.12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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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 지음 | 아카이브 펴냄
숨 막혔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비극적으로 읽은 부분은 본문이 아니다. 책 뒤쪽에 붙은 일종의 부록 같은 지면이다. ‘삼성전자·반도체 피해자 제보 현황’(2011년 3월 6일 기준)인데, 무려 5쪽에 걸쳐 115명의 이름과 나이, 병명이 기록되어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에 제보된 피해자들이다. 책에 다 싣지 못한 제보자까지 합치면 그 수는 150명에 달한다.

2인1조 동료 나란히 백혈병 걸려

그들의 이름을 가만히 소리 내어 읽어봤다. 너무 많은 사람이 비슷한 일을 하다가, 비슷한 병을 얻어 죽거나 투병 중이다. 목록을 보면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하기엔 이상한 우연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특정 공정, 특정 라인에는 유달리 피해자가 많았다. 한 권의 책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이름 안에 고요히 웅크리고 있는 숨은 사연들이 소름끼쳤다. 낯선 병명들 앞에서는 현기증이 일었다.

책은 삼성이 ‘숨기고 싶어 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 중 11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때로는 살아지고, 때로는 견뎌내고, 때로는 버텨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피해자들 틈으로 르포작가 희정이 비집고 들어갔다. 그는 남편 잃은 아내, 자식 잃은 아버지, 백혈병에 걸린 남자,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여자를 오랜 시간 지근거리에서 바라보고 기록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제보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제보 안 된 사람들이 더 있어요!” 이른바 ‘삼성 백혈병’ 문제를 최초로 수면 위에 올린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황상기씨)는 여전히 절규한다. 둘째딸인 유미씨는 1985년생으로 살아 있다면 27살이다. 그러나 유미씨는 영원히 스물셋이다. 그녀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3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어 2007년 숨졌다. 2인1조로 함께 일했던 이숙영씨 역시 같은 병으로 2006년 숨졌다. 두 사람은 ‘퐁당퐁당’이라 부르는 플루오르화수소 용액에 웨이퍼를 담갔다 빼는 세척작업을 했다. 그 용액은 냄새만 맡아도 “불임이 된다”고 공장 사람들이 말하곤 했다.

기흥공장 설비 엔지니어로 일했던 남편 황민웅씨를 백혈병으로 잃은 정애정씨는 말을 보탠다. “그나마 죽었으니 이슈가 됐죠.” 정씨는 유산, 불임, 기형아 출산은 ‘너무 작은 사안’이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정씨 역시 기흥공장에서 10년 가까이 오퍼레이터로 일했다. 부부의 첫아이는 시간이 지나도 뱃속에서 자라지 않았다. 유산이었다.

대개가 백혈병이었지만, 낯선 이름의 병마 역시 그들을 방문했다. 누군가는 얇은 방석을 깔고 방바닥에 앉아 있다가 혈관이 터지기도 한 재생 불량성 빈혈을 앓고 있다. 예전처럼 다시 혼자 힘으로 걸어보는 게 소원인 뇌종양 환자가 있고, 팔다리 마비와 시력장애가 동시에 찾아와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판정을 받은 이가 있다. ‘베게너 육아종’, ‘종격동 악성신생물’ 같은 낯선 병명 앞에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초일류 기업 삼성’에서 일한 것이다. 굳이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이들은 하필 가난했다. 자신의 꿈을 가족의 꿈과 맞바꿔야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대개 지방 상고 출신으로 대학 진학을 못한 ‘소녀’들이었다. 책에 추천사를 쓴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수십 년 전 평화시장에서 ‘시다’(보조원)로 시들어가는 소녀들과 영등포 과자공장에서 사탕을 싸던 처녀들은 이제 초일류 기업이라 자랑하는 삼성에 들어갑니다”라고 적었다. 재생 불량성 빈혈을 앓는 유명화(29)씨는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면 삼성에 가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이들은 싸웠고, 싸우고 있다. 그들의 죽음과 투병이 산업재해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삼성은 사과 대신 “증거를 가져오라”고 되레 큰소리를 쳤고, 때로는 “삼성 같은 거대한 곳이랑 싸워서 이길 수 있겠느냐”고 비아냥거렸다. 유족 정애정씨는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더 확실한 그 어떤 증거가 필요한지 나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유족 황상기씨는 “산업재해가 아니라 살인”이라고 단언한다. “정말 그들이 몰랐을까요?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무슨 약품을 사용했는지, 삼성은 몰랐을까요? 회사가 알았다면, 알고도 그대로 두었다면 이건 산재가 아니에요. 살인이에요, 살인.”

산업재해가 아니라 살인이다

산업재해 인정 요구에 삼성은 거액의 돈을 내밀었다. 언론에는 보상금이 아닌 ‘위로금’이라고 해명했다. 지난해 봄, 충남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박지연(24)씨의 어머니는 돈을 받는 대신 ‘산재 소송을 취하하고, 민주노총과 반올림을 만나지 말고, 언론 접촉도 피하라’는 내용의 합의문에 서명했다. 평생 쉬지 않고 일했지만 만져보지 못했던 거액 앞에 어머니는 무너졌다. 그리고 반올림 사람들을 만나, “돈에 눈이 멀어 딸을 팔아치운 죄인”이라며 가슴을 쳤다. 그렇게 ‘은폐된’ 죽음 또한 수백 명에 이를 거라고 반올림은 추정한다.

2008년 국정감사 당시 안재근 삼성전자 전무는 “유족에 대한 회유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박지연씨 가족 외에 다른 피해자들 역시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고 연제욱씨(종격동 악성신생물·2009년 사망) 가족은 “삼성 관계자가 몇 번을 찾아와 산재와 무관하지만 삼성은 초일류 기업이기 때문에 산재보상금과 비슷한 금액을 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사연’이 언론에 알려질수록 삼성의 회유도 끈질기게 계속됐다. 연씨 가족 역시 얼마 전 산재 재판 청구를 하지 않기로 삼성과 합의했다. 희정 작가는 후기에 “그녀가 원하던 사과를 받았는지는 모르겠다”고 적었다. 유족 황상기씨는 삼성에 노동조합이 생기는 걸 보는 것이 평생의 꿈이다. 그는 삼성에 노동조합만 있었어도 또 다른 황유미는 생기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노동조합만 있어도 삼성이 노동자를 그처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한다.

지난 6월 23일, 서울행정법원은 이례적으로 삼성 백혈병을 산재로 인정해달라는 청구 소송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원고 5명 가운데 2명(황유미·이숙영)이 산재 인정을 받았다. 이들이 낸 소송에서 피고는 근로복지공단이었지만, 피고 보조 참가인으로 삼성전자가 참여했다. 사실상 삼성과의 법정 싸움이었다. ‘일부 승소’였지만, 그에 대한 의미와 파장은 컸다. 근로복지공단과 삼성은 1심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반올림에 참여하는 공유정옥 산업의학 전문의는 책에 적는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피해자들이 고통스러운 투병을 견디는 동안 정부는 시간을 끌고, 삼성은 돈을 들고 찾아온다. ‘보십시오, 산재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보상을 받더라도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냥 이 정도 금액에서 합의를 보고 산재를 포기하십시오.’ 이것이 초일류기업 삼성의 실체이다.”

이 책은 단순한 ‘삼성 백혈병 피해자 열전’으로 읽고 넘겨서는 안 된다. 여기, 사연의 틈새마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난마처럼 얽혀 있다. 병마와 싸우는, 혹은 이미 숨진 이들을 ‘불쌍하다’고 동정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이름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다. 이들의 이름이 적힌 목록은 아마 계속 늘어날 것이다. 끔찍하게도 이들은 계속 죽어가고 있다. 삼성이 작업 환경을 꾸준히 개선해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변화를 가져온 것이 이들의 죽음과 고통에서 연유한 것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으로 <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Challenging the Chip·메이데이 펴냄)를 추천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해 여러 나라를 거쳐온 반도체 산업이 저지른 환경오염과 노동자 건강 문제가, 반드시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한심하지만 이 기업들을 감독하거나 제어하기는커녕 규제를 완화해주거나, 문제 자체에 무심한 정부 모습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한결같다. 그러나 폭로에만 그치지 않은, 반도체 노동자와 그들과 연대한 주민들의 투쟁 경험이 담겨 있기에 그 자체로 좋은 ‘교과서’ 구실을 한다.

/ 장일호 <시사I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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