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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간극과 조화 <메모리아>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간극과 조화 <메모리아>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2.09.1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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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라는 기록 장치를 들고 하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여러 이야기, 삶을 수집하는 <정오의 낯선 물체>(2000)처럼, 하나의 소리에서 출발하여 여러 소리, 기억을 축적하는 <메모리아>(2021)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그동안 해왔던 것을 똑같이 반복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시카(틸다 스윈튼)의 거주지가 에두아르도의 집이고 그의 아버지가 영화관을 운영했으며 형이 탐정이었다는 에르난(엘킨 디아즈)의 말과 같이, 이야기라는 미스터리를 따라 영화라는 저장장치 혹은 영매가 빙의하고 있는 삶과 죽음들, 기억들, 시간들을 경유하여 현실과 비현실, 개별자와 세계를 이어 잠재성의 우주로 향하는 여정의 영화 말이다.

 

하지만 <정오의 낯선 물체>의 카메라가 견자(見子)에 가깝다면 <메모리아>의 제시카는 견자(見子)이기보다 청자(聽子)에 가깝다. 영화의 초반부 건널목 장면을 보자. 자동차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일상적 도로에서 총소리와 같은 소리가 나자 한 남성이 놀라 넘어진다. 바로 다음 쇼트에서 흰 연기를 내뿜고 있는 버스를 비춰줌으로 그 소리가 아마 버스 배기관에서 나는 폭발음이라 짐작할 수 있지만, 넘어졌던 남자는 정말 총이라도 발사된 것처럼 황급히 도망친다. 이것은 오프닝에서 어떤 소음을 듣고 그 소음의 실체를 추측하는 제시카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그 소음을 처음에는 공사장 소리라고 짐작하지만, 공사는 없었고, 믹싱룸에서 소음에 관해 설명할 때에는 큰 콘크리트 공이 금속 우물에 떨어지는 소리였다가, 아카이빙 된 소리 중에서 담요를 배트로 치는 소리와 가장 비슷하게 느낀다. 그녀는 건널목의 그 남자처럼 당혹스러워한다. 보는 자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 있지만, 듣는 자는 들리는 것만으로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파악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제시카가 청자(聽子)로서 느끼는, 이미지 없이 들리는 소리와 실체와의 당혹스러운 간극은, 앞서 언급한 믹싱룸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이, 영화의 사운드 제작 방식 그 자체를 드러낸다. 영화 속 소리는 동시 녹음한 음향을 그대로 사용하는 때도, 에르난이 듣는 조건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고 한 것처럼, 실제와 완전히 같지 않으며, 폴리/이펙트처럼 전혀 다른 소리를 음향 작업을 통해 그럴듯하게 들리게 변형시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앰비언스의 경우에도 실제 장소의 소리가 아닌 비슷한 조건의 사운드를 사용하기도 하며, 대사 또한 후시 녹음을 하기도 한다.

당연히 이러한 간극은 사운드라는 특성에서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일 뿐, 본질적으로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지닌 성질에 기인한다. 영화는 아무리 사실적으로 기록한 영상이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환영이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저장되는 이미지는 현실에서는 이미 지나간 것, 사라진 것이며, <메모리아>의 발굴된 해골들처럼 과거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기억이다. 그렇기에 다른 예술과 비교해서 극도로 사실적이지만 연극과 같은 리얼타임 예술과 달리 온전히 환영인 것, 사실이면서도 환영인 그 양극단성이 간극을 만든다.

<메모리아>는 이와 같은 간극을 시청각적으로 가시화하면서 현실과 환영 사이를 교란한다. 공사장 소리인지, 콘크리트 큰 공이 금속 우물에 떨어지는 소리인지, 담요를 배트로 치는 소리인지, 우주선에서 나는 소음인지 알 수 없는 그 소음처럼 말이다. 이는 청각적 이미지뿐 아니라, 제시카가 벤치에 앉아 의사에게 보여주었던 손수건 마술처럼, 전반부의 에르난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안드레스라는 치과의사가 죽었다가 살아있다거나 하는 시각적이고 구조적인 장치들을 통해서도 작동한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피찻퐁의 영화가 그러한 간극을 소격효과처럼 폭로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에게 영화란 간극의 예술이며, 간극 자체가 주는 감각과 감흥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두 명의 에르난은 그러한 영화의 간극과, 글의 시작 부분에서 언급했던, 기록 장치로서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인물이다. 각각 다른 인물이 연기하고 있지만, 전반부의 음향 엔지니어인 에르난과 후반부의 인간-저장장치인 에르난은 같은 이름이면서 소리를 수집/저장하는 직업/능력을 공유하고 있어 구조적으로 이어진 인물이다. 전반부의 에르난이 음향 아카이브를 활용하는 엔지니어로서 은유적이고 환영적 인물이라고 한다면 후반부의 에르난은 직접적으로 영화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자기반영적 캐릭터다. 따라서 전반부의 에르난이 사라지고 후반부의 에르난과 만나며 제시카가 경험하게 되는 전후반의 간극, 기묘한 사건과 감흥이 <메모리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핵심이 되는 몇 가지 사건 중 에르난이 잠을 자는 장면은 아피찻퐁 장편 영화에서 반복해왔던 것이지만 그럼에도 매번 감탄하게 되는 연출의 순간이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죽은 것처럼 숨을 멈추고 누워있는 에르난을 오랜시간 담고 있는 이 장면은 잠과 죽음의 유사성, 죽음을 연기한 것이 드러나지만 쇼트의 긴 지속시간으로 인해 어느 순간 그럴듯한 죽음처럼 느껴지는 기묘함, 외화면에서 들리는 동물, 벌레, 바람 소리의 풍만함과 관능성으로 인해 개별자와 잠재성의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는 듯 한 최면적이면서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 아름다운 장면에서 고양된 감각은 바로 아피찻퐁의 이전의 장편들에서 본 적 없던 순간으로 이어진다. 이 순간은 에르난의 집으로 두 사람이 들어오면서 시작한다. 제시카는 집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방 한쪽에 놓인 녹음 장치를 작동시킨다. 그 순간 그녀는 누군가의 기억을 떠올리고 마치 작동된 녹음 장치에 홀린 것처럼 어두운 기억의 한 단면을 내뱉는다. 그리고 에르난과 식탁에 마주 앉아 그녀가 발화한 기억이 이 공간의 것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이 집의 주인인 에르난의 기억이었고 그는 그것을 인정한다. 제시카는 그 기억에 공명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들었던 폭발음도 에르난의 기억인지 물어본다. 그는 그것이 우리 시대 이전의 일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둘은 손과 팔을 접촉하여 에르난이 저장하고 간직한 기억들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소리들이, 기억들이 천천히 밀려오기 시작한다.

 

빗소리, 돌에 새겨진 한 남자의 기억, 파도 소리, 에르난의 기억이 차례로 재생되며 무엇이라 정확히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감흥을 느끼게 하는 이 장면의 핵심은, 단순히 시각 정보인 이미지와 청각 정보인 사운드가 분리되었다는 것 뿐 아니라, 디제시스적이면서 비디제시스(non-diegesis)적 특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 에르난이라는 저장장치의 정보를 마치 레코드의 바늘처럼 제시카가 읽어낸다는 행위와 영화에서 언급되었던 이야기와 장면의 사운드라는 측면에서는 디제시스적이지만, 영상의 시각 정보와 상관없는 다른 여러 장면의 사운드만 재생되는 것처럼 들린다는 점에서 비디제시스적으로도 느껴진다. 즉 영화 내적 논리로 그럴듯한 환영이지만 이미지와 사운드의 극단적 분리로 인해 반환영적으로도 느껴지는 시청각적 교란, 간극의 감각화인 것이다.

그렇기에 아피찻퐁 영화에 전에 없던 이 장면의 감흥은 모순적이고 기이하다. 에르난의 손과 제시카의 팔이 맞닿는 접촉의 따뜻함과 아마 비극적인 사건이거나 어두운 과거라 짐작할 따름인 누군가의 기억이 지닌 공포와 깊은 슬픔은, 그러한 소리들이 이미지와 격렬히 부딪히며 미끄러지는 효과가 만드는 기이하면서 불안한 반환영적 감각과 불화한다. 하지만 이 불화는 소리들, 기억들의 긴 연쇄가 에르난이라는, 영화라는 기억장치가 품고 있는 세계의 잠재성으로 향하는 시간의 심원함 안에서 조화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공포, 슬픔, 기이함과 불안감 그리고 따스함과 차분함과 같이 전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감정과 기억들이 어지러이 쏟아져 나와 어느 순간 감각의 대지를 충만히 적시는 샘과 같다. 쏟아져 나온 것들은 우리의 감각을 끊임없이 교란시키고 뒤흔들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영화적 감흥으로 미끄러지며 스며든다. 이는 조화와 부조화 사이의 모순적인 앙상블 또는 착각, 꿈, 망상적 앙상블(Illusion Ensemble)이다.

마지막으로 결국 밝혀지는 폭발음의 정체에 관해 이야기하고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명확하게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다른 소리와 달리 거대한 형체로 눈앞에 나타나는 우주선은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직접적이어서 상상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한하는 이미지의 등장이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생각이 달라졌다. 이 우주선이 나오는 바로 직전 쇼트에서 제시카가 창이라는 프레임을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귀를 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닌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귀를 창밖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에서 우주선 장면 또한 어긋날 수도 있는 하나의 상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우주선이라는 망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개별자들의 뒷모습과 라디오 소리, 사실적이고 관능적인 자연의 풍광, 소음들, 소리라는 사실 또한 한몫했다. 그러므로 우주선 장면은 망상과 현실 이미지의 간극과 조화를 위한 흥미로운 선택이라 생각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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