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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나의 우주는 당신으로부터 탄생했으니 부디… - 다큐 <성덕>의 절절한 기록들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나의 우주는 당신으로부터 탄생했으니 부디… - 다큐 <성덕>의 절절한 기록들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2.09.28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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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사고로 우주가 창조된다. 찰나의 포착으로 생전 모르던 이에게 눈을 뜨는 순간, 가본 적 없던 곳으로 움직이는 것도 해보지 않은 것을 하는 것도 두렵지 않다. 누가 뭐라든 운명처럼 발견한 이를 향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그때, 그곳에, 나에게 전에 없던 우주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제 모든 이야기는 그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생각은 그를 벗어날 수 없다. ‘덕통사고’라는 단어가 언제 누구로부터 연유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보다 정확한 표현은 찾기 힘들 것이다. 원치 않는 사고로 치였고 더 이상 돌이킬 수도 돌아갈 생각도 없는 상태.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뛰어드는 것이 덕질이다. 그렇다. 어찌 생각하면 덕질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으)로의 진입이 내 의지와 상관없다는 점도, 그 행위에 쏟아부을 정신적 · 물질적 에너지를 내가 제어할 수 없다는 점도, 무엇보다 들이는 인풋 대비 어떠한 아웃풋도 없을 수 있다는 점, 아니 내가 빠졌던 만큼의 어마무시한 배신감과 마주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처럼 비효율적인 행위는 왜,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팬(질)이나 덕후(질)라는 용어는 후려치기 좋은 빠순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오빠를 쫓는 젊은 여성들의 치기로 환원됐다. 조롱과 멸시가 섞인 이 단어는 그들의 덕질이 이해할 수 없는 행위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팬들에 대한 고찰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여성팬들이 거대한 팬덤 숫자와 함성 소리에 파묻힌 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이들로 규정되어 온 역사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종종 스타들은 자신들이 겪은 극단적인 팬들의 행동을 공포로 규정하면서, 팬들조차 인정하지 않은 사생 행위를 팬심에 싸잡아 넣어 오해를 낳기도 했다. 최근 K-팝의 성공을 이끌어 낸 주요 요소로 팬덤이 주목을 받으면서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이뤄냈는지가 다양하게 논의되었지만, 정작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러한 결과까지를 이끌어 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설명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결과와 성과를 바탕으로 팬덤의 의미를 추적하는 시각으로는 팬들이 스타를 ‘좋아하는 마음’을 결코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큐 <성덕>이 던지는 질문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왜 그를 좋아했는가? 도대체 덕질은 어떤 마음으로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사고 같은 순간의 치임에 영원을 약속했는가? 앞서 이야기했듯 팬들의 이 마음은 그리 중요한 것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저 잠깐 지나가는 호들갑 정도로 넘어갔을 뿐, 그것이 어떤 서사를 가지고 어떤 마음까지를 먹고 시작하는 것인지, 그들은 무엇을 할 준비까지를 하고 있었는지를 진지하게 따져보지 않았던 것이다. 오랫동안 팬들을 따라다닌 경멸의 시선은 덕질을 더욱더 생각해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따가운 눈총과 멸시 속에서, 심지어 적절한 ‘일코’를 고려해야 하는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덕후들은 자신의 청춘을, 현재를 그리고 앞으로를 모두 앗아간(갈) 그 소중한 감정을 놓지 않았다. 다큐 <성덕>은 처음으로 바로 이 덕후의 입장에서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게 모두가 궁금해 할 덕질의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성덕>은 분명 중요한 질문을 던졌지만 가슴 아프게도 조금 다른 질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감독은 자신의 스타였던 이가 범죄자가 되면서, 게다가 성범죄자로 이름을 올리면서 더 이상 그를 스타로 대할 수 없었고, 그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의 성공한 덕질은 곧 실패한 덕질이 되었다. 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길었던 행복의 시간은 허망한 것이 되어버렸고, 차츰 분노의 감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이때 감독이 주목했던 것은 이렇게 명백한 범죄를 저지른 이에게 아직까지도 응원을 보내며 남아 있는, 그리고 앞으로의 활동을 기대하는 이해할 수 없는 팬들의 마음이었다. 분명 우리의 ‘오빠’는 우리를 배신했는데, 이렇게까지 추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를 믿고 기다리겠다는 이들의 마음은 무엇일까? 감독은 가설을 하나씩 내놓으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인터뷰하고 덕질의 역사를 스크린에 담아낸다.

 

<성덕>은 우주가 붕괴된 와중에도 탈덕하지 않는 이들을 헤아리며 추억이 많아서라거나 스타의 추행을 잊어서, 혹은 원래 착한 사람이었다는 인식이나 그에 대한 변치않는 믿음, 함께 해 온 너무도 다양한 서사, 스타를 부정하는 것이 곧 나에 대한 부정일 수도 있어서 등 일 것이라는 다양한 가설들을 내놓는다. 그러나 영화에서 정작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이 가설에 있지 않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가설 속에서 스타를 떠올리는 팬들의 감정, 그러니까 그것이 드러나는 얼굴과 목소리, 말투, 그리고 몇 번씩이나 고민하고 내뱉는 말들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오빠’의 굿즈 화형식을 준비했으면서도, 작은 이름표, 앨범과 사진들, 그의 마음과 숨결이 담겼던 그래서 나의 추억이 담겼던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설명하며 팬들의 얼굴은 행복으로 차오른다. 오빠에 대해 오해를 살만한 지칭에 발끈해 버리는 이는 분명 그를 향한 분노를 표출했던 바로 그 이이다. 아무리 오빠가 미워도 도저히 태워버릴 수 없을 몇 가지는 다시 넣고야 마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바로 이 순간, 누군가를 너무 좋아했던 그 이유와 그렇기에 너무도 밉지만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그 이유가 결코 다를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너무도 좋아했기에 절대 믿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은 결국 너무 좋아해서 빠질 수밖에 없던 그 이유와 정확히 겹치는 것이었다. 위로를 주었고, 꿈꾸던 이상을 마치 현실인 양 실현시켜주었고, 혹시라도 내가 그를 좋아했던 순간을 후회하게 될까봐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던 동력을 주었던 그에 대한 마음은 그에게 분노를 쏟아 붓던 이들에게도. 아직도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왜, 어떻게 덕질이 가능한가에 대한 처음의 질문에 정확히 부합하는 답이었다. 추억이 많았고, 스타의 추행을 잊었거나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 함께 만들어온 시간과 스타에 대한 부정이 나에 대한 부정일 것이라는 동일시, 그러니까 왜 탈덕을 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가설들은 그를 좋아했던 이유에도 고스란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성덕>은 덕질해 온 이들의 감정을 다양하고 솔직하게 담아냄으로써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설명해간다.

 

감독이 범죄자가 된 스타에 대한 기대를 아직 놓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을 궁금해하며 태극기 부대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사실을 짐작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헌법 수호의 의지가 없다고 파면당한 이를 아직까지 ‘각하’로 모시는 이들에게 보내는 멸시는 애초에 그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할 가치조차 없다고 무시한 결과였다. 그러나 우리 자신보다 각하가 더 소중하다며 그에게 보낼 편지를 모으고, 그가 왜 잘못이 없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하는 그들의 마음은 과연 덕질의 그것과 다른 것일까. 결국 감독조차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각하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인 기대와 믿음은 누군가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덕질의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이 결코 각하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엔 긴 지난날을 함께 살아온 내가 겹쳐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성덕>이 가닿는 덕질에 대한 솔직한 고찰은 이해하기 힘든, 그러나 누군가에겐 무엇보다 소중한 그 감정을 곱씹게 한다.

물론 덕질이라는 넓은 우주를 애와 증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성덕>은 덕질이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 팬들이 무엇까지를 공유하며 함께하는지, 그러니까 스타를 향한 그 마음이 얼마나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었는지까지를 이야기한다. <성덕>은 팬들이 스타가 어떤 과오를 범했을 때 누군가는 상상치 못했을 죄책감에 괴로워한다는 점을 포착해낸다. 팬들은 내가 표현한 사랑이, 즉 그 표현을 위해 들인 돈과 노력이, 그리고 그것으로 만들어준 그의 명예와 지위가 혹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위치에 올려놓았던 것이 아닌가에 대해 고민하고 아파한다. 종종 그가 어쩌면 그런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행동을 포착하고도 넘어갔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그를 좋아하면서 그의 범죄에 한 몫 한 것은 아닌지를 괴로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해 준 것이 어쩌면 범죄의 동력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공범의식은 스타의 범죄가 비슷한 여성을 향할 때 더욱 강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믿었던 이에 대한 배신을 넘어, 과연 내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주었던 이가 나와 우리를 어떤 시선을 바라보고 있었는가에 대한 공포와 혐오는 결국 팬들이 스타를 위해 무엇까지를 감내하는지 혹은 각오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모르는 어떤 면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안다고 생각하고, 적어도 그렇고 그런 다른 이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감당할 수 없는 배신으로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그의 본 모습을 몰랐거나 알아도 넘어갔을 수 있기에 함부로 비난할 수도, 함부로 떠날 수도 없다. 이러한 마음들은 여성들의 덕질이(덕질의 젠더적 차이는 명확하다) 스타를 상품으로 간주하거나 구입하는 것만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시하기도 한다. ‘내 새끼’를 향한 팬들의 마음은 너무나 다각적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팬들은 그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점이다. <성덕>은 그가 있기에 나의 열정이, 행복이, 그리고 삶이 있다고 믿었던 이들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면서 덕질의 고충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팬들은 다른 이를 찾아 끊임없이 우주를 생성해간다. 이는 마치 <성덕>이 유쾌함을 잃지 않은 맥락과도 상통하는 것일 테다. <성덕>의 관람은 팬들 사이의 공감을 부른다는 점에서 덕질의 본질과 멀어지지 않는다. 관객들은 영화에서 몇몇 연예인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함께 탄식하고 상처받았던 인터뷰이가 다른 스타를 찾는 데에서 함께 웃음을 터트리며 응원한다. 관객들이 자조와 안타까움, 그리고 희망을 <성덕>을 통해 함께 경험하고 있다는 그 자체로 너와 나는 덕질에서 멀어 수 없다. <성덕>의 관객들은 ‘지뢰밭’이 되어 버린 이 판에서 쉽사리 ‘내 새끼’ 혹은 ‘우리 오빠’의 이름을 깔 수 없는 상황을 공유하면서도 또 다른 우상을 찾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아직 누군가를 파들어 갈 에너지가 남아 있음에 안도한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진리 아래에서 우리는 또 다른 행복을 찾을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느껴지는 동류의식은 <성덕>이 건네는 덕질에 대한 위로가 아닐까.

영화를 곱씹을수록 아쉬운 것은 이 영화를 꼭 보았으면 하는 관객들이 너무도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 영화는 누구에게서 빛을 발할까? 누군가를 생각하고 바라고 또 믿고 있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팬들에게서일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우상들’에게서일까. 적어도 이 마음들을 안다면, 혹시라도 너를 원망하게 될까 나의 나태함까지 밀어내는 이 의지를 안다면 상처받는 덕질이 조금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사실 일어나지 않는대도 상관은 없다. 이렇다고 사라질 덕질이 아니며 저렇다고 그칠 덕질도 아닐테니. <성덕>을 통해 팬들의 영원한 짝사랑(설사 성덕이었더라도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이 이렇게도 완성될 수 있다는 것, 멋진 일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성덕>(2022.9.28.개봉)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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