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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견딤’만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 영화 <휴가> 속 재복의 닫힌 입에 대해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견딤’만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 영화 <휴가> 속 재복의 닫힌 입에 대해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1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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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노동자 재복(이봉하)은 여기저기에서 치인다. 농성장에서는 동료들에게, 간만에 돌아간 집에서는 딸들에게, 새롭게 일을 시작한 공장에서는 모든 것이 그를 다그치는 듯하다. 이 사이에서 재복은 무엇인가를 요구하거나 하다못해 상황을 눙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답답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우직함은 길 위에서 1,882일의 농성 끝에 해고 무효소송의 최종 패소 판정을 받은 이가 가질 수밖에 없는 무게일지도 모르겠다. 패소는 그가 견뎌냈던 시간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고 더 이상 천막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지를 잃게 했다. 그곳을 벗어나는 일에 굳이 휴가라는 이름이 필요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재복은 휴가라는 명목으로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간의 휴식일지, 휴식 후 다시 어떤 이후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명확치 않았지만, 남들처럼 쉬어보기라도 하자는 다짐은 재복의 하루하루와 함께 했다.

재복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쌓여 있던 집안일과 데면데면한 딸들의 얼굴, 그리고 큰딸의 대학 입학에 필요한 예치금이었다. 길 위에서의 5년이라는 ‘투쟁’ 기간은 집을 누군가 그를 맞이해줄 수 있는 곳이 아닌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바꿔 놓았다. 집을 벗어난다고 해서 난감함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5년의 시간은 일자리를 구할 때에는 걸림돌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아직도 그곳에 있느냐는 비아냥으로 재복을 찔러댔다. 이름만 휴가일 뿐, 그에게 열흘은 몸에도 마음에도 고되고 현실적인 일들이 가로막고 있는 날들이었다. 농성기간 동안 돌보지 못했던 것들은 단순히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기보다 그의 부재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아프게 보여주었다. <휴가>는 재복이 5년이라는 간극을 열흘 동안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지를 천천히 훑으며 바라본다.

 

휴가 기간 동안 재복이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밥을 하고 밥을 챙기는 일이었다. 그가 두 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명분도, 그것으로나마 아이들을 챙길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는 방법도 밥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차려주는 밥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컵라면을 먹어도, 밥을 먹었느냐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아도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며 음식을 만드는 것은 그가 현재 아이들의 곁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최선의 행위이다. 이러한 재복의 행동은 함께 일하는 준영(김아석)에게도 이어졌다. 친구의 공장에서 잠시 일하게 된 재복은 홀로 밥을 때우는 준영에게 도시락을 건네고 함께 밥을 먹으면서 천천히 준영의 상황을 알아간다. 그가 누군가에게 밥을 먹이는 것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노동을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가장 마지막, 다시 투쟁의 현장으로 돌아갈 때 역시 아이들에게 반찬을 해주고, 또 남은 반찬을 챙기는 설정은 이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영화는 이러한 재복의 생각을,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그의 날들을 생활 속에서 잊혔던 노동을 통해 최대한 긍정해 나간다. 이는 노동의 현장에 남아 있는 이들뿐 아니라 끝까지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어딘가를 지키고 있는 이들을 긍정하는 태도와 맞물리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의 열정에 보내는 응원과 결의,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는 구조적 문제와 그로 인한 좌절에 대한 분노와 연민은 <휴가>에서 상당 부분 절제되어 있지만 결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 이 작품이 기타 제조사 콜트-콜텍의 긴 천막 농성을 영화화했던 감독의 전작 <천막>의 확장판이라는 점에서 재복에 대한 연민과 긍정은 현실 노동자에 대한 존중이기도 할 것이다. 투쟁의 현장을 담고 있던 많은 다큐멘터리들은 그들의 고통이 매우 일상적인 삶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을 슬픔과 분노의 교차를 통해 설명했었고, 그 귀결은 그들이 해 온 노동과 투쟁을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았고, 그들의 삶에 응원과 찬사를 보내는 것에 어떠한 의심도 가질 필요 없게 만들었다. ……. 그렇다. 이 응원의 시간은 꽤 오래 되었고, <휴가> 역시 이와 같은 선상에 서 있다. 과연 이 오랜 반복은 여러 ‘천막’의 ‘현재’ 상황을 무리 없이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던 것은 영화의 모든 시선이 재복의 삶을 긍정하는 것에 할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재복은 2000일에 가까운 시간을 길 위에서 견뎠다. 그는 그를 외면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시선을 견뎌내야 하기도 했다. 그를 옹호하는 영화의 시선은 당연히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과연 견디는 것으로 긍정된 재복의 날들은 무엇을 더 설명할 수 있을까.

 

재복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내놓지도, 말을 명확하게 끝맺지도 않는다. 분명히 화를 낼 상황에서도 크게 대응하지 않으며, 많은 상황을 그저 삼키고 감내한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재복의 우직함은 그가 견뎌온 세월의 흔적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성격이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재복을 이상하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휴가>는 재복이 지나온 고통을 겪을지도 모를, 아니 확실히 같은 부조리 속에 놓일 젊은 노동자들을 재복과 함께 배치한다. 우리 집에 여유롭게 내놓을 등록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큰딸 현희(김정연)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가구공장에서 만난 준영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살며 위험에 노출된 노동을 한다. 특성화고 전산과 학생은 어떤 연관도 찾을 수 없는 가구 공장으로 실습을 나오고 과거 오랫동안 비슷한 일을 해 온 재복과 동일한 주의사항을 들은 후 바로 현장에 투입된다. 아니길 바라지만, 이들의 앞날은 재복이 지나온 시간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당연히 재복이 견뎌 온 일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 줄지, 자신들의 미래를 어떻게 바꿔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 아니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 더욱 맞을지도 모른다. 노동자의 투쟁을 다루는 많은 작품들이 오랫동안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 투쟁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은 바뀌었고, 이젠 ‘견디는 것’에 대한 의미를 조목조목 설명해줘야 할 만큼 그 행위에 적대적인 이들이 늘어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현희도, 준영도, 그리고 특성화고의 고등학생도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재복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재복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의미한 기다림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바뀌길 꿈꾸는 일이라는 점을 설명해줘야 했다. 우리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에게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이 모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를 설득해야 했다. 산재 신청을 해야 한다고만 다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너를 지켜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를 시켜야 했다. 게다가 현희는 아빠의 부재로 인해 재복이 견딘 시간만큼을 함께 견뎌온 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현희에게 만큼은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넘어 보호자의 부재 측면에서라도 이를 5년이나 견뎌낸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재복은 끝내 어떠한 것도 이해 가능한 언어로 풀어내지 않는다.

 

더 이상 그곳에 가지 말라는 현희에게도, 산재 신청으로 문제를 만들기 싫다는 준영에게도, 전산과임에도 가구공장에 온 고등학생에게도 재복이 설득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은 재복의 ‘견딤’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노동자의 투쟁을 그리는 많은 영화들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재복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해받길 바랐던 데에 녹아 있던 그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재복의 행위는 옳은 것이기에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 다른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당위가 그것이다. 재복은 오랫동안 함께 투쟁하던 이들에게서 걸려 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휴가라는 말은 더 이상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재복과 남은 이들을 달래려는 명목이기도 했다. 그만큼 재복이 견딘다는 것은 그에게도 많은 고민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세 식구가 모여 밥을 먹는 자리에서 현희가 재복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 이제 그곳에 가지 말라는 말인 것처럼 그가 견디는 시간들은 모두에게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재복은 묵묵히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누구의 지지도 이해도 받지 않은 채.

‘왜’에 대한 설명이 빠진 재복의 휴가는 투쟁을 그리는 많은 작품들 어디에서도 투쟁 현장을 떠난 이를 중요하게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투쟁 현장을 떠난 이들은 갈등의 원인이 되어 괴로워하거나, 현장에 남아 있는 이들의 이해 속에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던 사람’으로 사라졌다. 즉, 노동운동의 당위가 앞섰을 때 누군가는 그곳을 떠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바로 그 선택지 자체가 삭제되어 있던 것이다. 재복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고, 자신이 없는 동안 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이 결핍되었는지를 알았으면서도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은 어쩌면 노동과 투쟁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많은 영화들의 문법으로 인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재복의 견딤에만 주목하는 영화의 시선이 위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재복이 행한 의미만을 긍정했을 때 그가 변화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집을 떠난 재복의 모습은 결국 그곳으로 돌아갔을 때에야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오랜 믿음을 굳건히 따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휴가>에서 느낀 답답함은 어쩌면 영화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현실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 모든 사회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노동운동은 이제 외각으로 밀려났고, 노동자들의 집회나 파업은 누구보다 힘든 상황에서 나섰다는 점을 증명받아야만 정당한 것이 되었다. 노동 안에서 계급과 계층을 나누는 것이 익숙해진 상황은 명분과 정당성의 문제를 실리의 정도로 판단했고, 나보다 덜 힘든 상황에 놓인 이들만이 공감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안에서 노동과 투쟁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견딤’의 과정 그 자체도 노동이 될 수 있으며 긍정해야 한다는 믿음은 이제 설득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분명 슬픈 일이지만 이것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시하기에, 그럼에도 함께 할 방법을 찾아야 하기에 이를 위한 고민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현실의 냉정함에 기대 재복에 대한 응원을 거둘 생각은 없지만, 길 위에서 1,882일을 지낸 재복의 생각을 그의 목소리를 통해 듣고 싶다.

 

* 이 글은 <인천문화현장> 2021년 12월호에 실린 글을 수정한 것이다.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휴가>(2021)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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