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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내면세계의 질서를 찾아 떠나는 모험, <표류단지>
[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내면세계의 질서를 찾아 떠나는 모험, <표류단지>
  • 윤필립(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1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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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단지> 한국 포스터

인간의 인지과정은 복잡하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것이 천편일률적인 과정을 거친다면 적어도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언어정보가 입력됐을 때 서로 다른 것으로 인식할 여지는 최소화됐을 것이다. 의미의 중의성 즉, 한 단어나 문장이 두 가지 이상의 뜻으로 해석 가능한 현상이나 특성이 언어학적으로 정의되어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인지과정의 복잡성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기서 화제를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으로 확장하면 어떨까? 무의식 대비 의식을 비유할 때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적용된다. 그만큼 심연에 잠긴 채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무의식과 비교할 때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이란 가소롭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른 인지과정이 정신작용으로 체계화되는 것처럼 인간의 그 거대한 무의식의 세계도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이 세계는 그렇게 많고 다양한 인간들의 거대한 무의식의 세계를 담아내는 캔버스로는 불충해 보인다. 농담조로 비유하자면, 개인이 모두 거대한 무의식를 지니고 있는데 그러한 '무의식과 무의식'을 모아 한 곳에 펼쳐내기에는, 당장 서울은 땅값도 비싸고 건물을 올릴 토지도 여유롭지 못하다. 이런 사정은 이웃나라 일본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시다 히로야스 감독

그래서 <표류단지>(2022)의 이시다 히로야스 감독은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사람들의 무의식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그 공간도 현실에서는 재개발 구역의 다 쓰러져 가는 아파트 단지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 보면 어느 순간 아파트 단지가 배처럼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다. 그리고 표류하는 아파트 단지 주변으로 등장인물들의 아프거나 기분 좋은 과거가 묻어 있는 공간들이 유령처럼 떠돈다. <표류단지>는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무의식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야기는 나츠메와 코스케가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된다.

나츠메와 코스케는 야스지 할아버지의 아파트에서 친남매처럼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병이 있던 야스지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소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와 코스케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아파트도 재개발로 인해 모든 주민들이 떠난다. 나츠메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유령 건물처럼 남은 이 아파트를 습관처럼 방문하고, 우연한 계기로 나츠메를 찾던 코스케와 네 명의 친구들도 이 아파트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곳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나츠메를 위해 다섯 명의 친구들은 잠시 아파트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하나둘 잠이 든다. 그렇게 아침이 되어 눈을 떠보니 아파트가 마치 선박처럼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다. 아이들은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떠올리며 며칠을 표류하다 몇 가지 법칙을 발견하게 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자기 자신과 서로에게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된다.

<표류단지>는 무의식 속의 자아와 직면하며 성장하는 아이들의 비밀스러운 모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것>(안드레스 무시에티, 2017)과 서사적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로 대변되는 인간의 무의식과 개별 인간 군상들이 거기에 다가서는 과정을 공포로 해석한 반면 <표류단지>는 그것을 유쾌하고도 환상적인 모험으로 풀어냈다. 스스로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살아가고 싶었던 나 자신의 바로 그 참모습과 직면하는 과정은 충분히 공포스럽고, 그렇기에 직면할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직면 이후에 찾아오는 감정적 해소는 공포보다는 자유와 행복에 가까우며, 심리학적으로도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회복탄력성 또한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그러한 점에서 <표류단지>는 <그것>과 달리 자신과 직면하는 공포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그 직면 이후의 감정적 해소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왜 어른들의 모험이 아니라 아이들의 모험이어야 했을까?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적용할 수 있다. 즉, 심리적 결정론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무의식적 동기와 생물학적 욕구 그리고 생후 약 5년 동안의 유년기 경험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진정한 나와의 직면을 위해서는 유년기의 나로 돌아가 그때 그곳에서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으로 자란 자아와 조우해야만 하는 것이다.

 

<표류단지> 일본 포스터

<표류단지>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진다. 코스케를 비롯한 아이들은 나츠메를 찾아 재개발 아파트 단지로 발을 들이게 되고, 거기서 나츠메와 함께 아파트가 표류하는 경험을 하며 각자 옛 학교 수영장, 쇼핑몰, 놀이 공원 등으로 상징화된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표류하는 아파트 건물 옥상에서 다른 건물로 외줄을 연결하여 이동하는가 하면 안전하다 느꼈던 아파트가 폭풍우와 함께 물에 잠길 때는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진정한 나를 직면하는 과정은 그렇게 용기와 냉철한 판단이 필요한,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인 것이다.

환상적인 모험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온 아이들에게 ‘표류단지’에서의 경험은 꿈이 아니라 사실 그 자체였다. 그것은 표류하는 과정에 친구들과 찍은 사진 속에도 그대로 남아 있고, 무엇보다 어느덧 성장해 있는 각자의 기억 속에 또렷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무리 덕분에 <표류단지>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히 과거의 나 자신을 직면하는 과정으로만 그치지는 않는 것 같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모두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표류하는 아파트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그렇게 용기를 내고 단호한 결단을 내리며 매 순간 각자의 방식대로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지금 잠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나 자신을 잃은 듯한 상실감에 빠져 있다면, 가끔은 이렇게 유치해 보이는 애니메이션도 하나의 처방전이 될 수 있노라고 말해주고 싶다. 때론 그런 단순한 시도가 어지럽고 복잡한 내면세계에 질서를 선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단언컨대 <표류단지>는 절대로 유치하지 않다.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좀 더 지적이고, 그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라는 점에서 보다 철학적이다. 어쩌면 이 때문에 실사보다는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는지도 모르겠다. 훨씬 덜 부담스러우니까.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대학에서 강의하며 공연기획 '최영주의 in클래식' 전속 스토리 작가,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담화분석 및 스토리 문법과 문학/서사치료 연구, 한국문화교육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 비평 대상,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으며, 만화평론상, 대종상 등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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