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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이들을 통해 본 인간의 본성 <파리 대왕>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이들을 통해 본 인간의 본성 <파리 대왕>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11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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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대왕>은 윌리엄 골딩의 1954년 동명 소설이자 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면서 해리 훅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다. 원작자인 윌리엄 골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전쟁을 겪으며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고 얼마나 끔찍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지 경험한 골딩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고찰이 들어있다.

 

문명 상태를 유지하려는 아이들

영국의 25명의 소년들은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바다에 추락해 무인도에서 생활하게 된다. 육군사관생도인 소년들은 법과 규율을 훈련받은 아이들답게 처음에는 나름의 질서 체계를 만들며 불안한 삶이지만 잘 버티면 구조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살려는 의지를 보인다.

 

‘랄프’를 중심으로 질서 유지를 위한 규칙을 만들고 문명 상태를 유지하는 활동을 시작한다. 본명을 알 수 없는 ‘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이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불어 회의도 소집하고, 움막을 만들거나 먹이를 채집하는 등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작업을 나눠서 하고, 구조를 위해 불을 피우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인간 내면에 잠재한 사악함의 표출

하지만 이런 질서도 잠시, 무작정 구조를 기다리기보다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사냥부대를 조직해 다니자는 ‘잭’이 랄프와 라이벌 관계가 된다. “섬에 괴물이 있다”는 한 소년의 말을 애써 무시했던 랄프와 달리 잭은 소년들에게 언제든 섬에 괴물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공포심을 심어주며 두 소년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하고 섬의 질서는 급격히 붕괴한다.

 

자신들의 행동을 규제했던 이전의 법칙과 상식이 사라지고 잭의 편에 선 소년들은 문화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억눌러왔던 행동들을 급격히 포기하기 시작한다. 소년들은 안전과 고기를 얻기 위해 잭 밑으로 하나둘 들어가고, 코코넛 열매를 먹으며 질서를 지키고 문명 상태를 이루려 했던 랄프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상황에 부닥친다. 이성을 중시하는 랄프와 본능을 우선하는 잭,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두 집단으로 양분되고 섬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상대를 공격하는 무법천지가 된다.

무인도에 고립된 아이들의 행동 양식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잠재해 있는 사악함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원작의 궤적을 따라 영화는 몇몇 상징적인 물건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소라 껍데기와 얼굴 위장 그리고 안경

랄프가 가진 소라는 권위를 상징하고 단체를 이끄는 도구로 사용된다. 처음에는 소라를 통해 ‘규칙’을 잘 지키며 봉화로 상징되는 구조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큰 문제 없이 잘 지낸다. 하지만 잭은 얼굴에 피와 진흙을 바르는 행위를 통해 소년들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잠재우고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냥’이라는 현실적인 욕망에 충실할 수 있도록 힘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얼굴을 드러낸다는 것은 행동에 제약을 준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순수함의 표상이라고 생각했던 소년들이 세상의 문명과 격리되는 순간 동물적인 본성이 드러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얼굴을 위장하는 행위였다. 잭은 최소한 자신을 따르면 배를 곪지 않아도 된다는 걸 몸소 체험하게 만들고 얼굴에 피와 진흙을 발라 수치심과 자의식에서 해방시켜 거침없이 잔인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잭은 규칙보다 더 중요한 건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 즉 사냥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따르는 아이들이 생기자 규칙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아이들이 규칙보다는 사냥이 더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면서 규칙을 깬 자기 합리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또한 시력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경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어떻게 쓰이는가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피기(돼지)의 안경알은 불을 만드는 도구이다. 인류의 역사는 곧 불의 전쟁이었다. 불은 인류의 실생활에 막대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체이다. 누가 불을 차지하고 어떻게 이용하는가는 인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섬에서 불은 봉화를 피울 수 있는 소중한 도구이자, 잭에게는 사냥한 먹이를 익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다. 불은 두 집단 사이에 분쟁이 발발한 원인이자 동료끼리 죽음도 불사하는 비극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파리 대왕과 돼지 머리

영화에서는 섬에 있는 미지의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상징적으로 걸어놓은 돼지 머리가 썩어갈수록 점점 더 많은 파리가 꼬이는 장면을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파리 대왕은 폭력이 낳은 공포로 얻은 권력을 휘둘러 파리떼를 꼬이게 한 잭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년들 각자 내면에 가지고 있는 더러운 욕망이자 악한 본성이기도 하다.

 

돼지로 불리는 소년은 이 집단에서 가장 낙관적인 미래를 꿈꾸는 소년이자 안경의 소유자지만, 다른 소년들에게는 무시의 대상이었고 소라를 잡아도 그의 말에는 권위가 없었다. 살아있는 돼지의 이야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소년들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돼지 머리로 상징되는 잭의 말과 자기 내면의 추악한 욕망을 따르는 모습을 통해 규칙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잘 지켜졌던 순수했던 의지가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변질하고 또 허무하게 짓밟힐 수 있는지 보여준다.

<파리 대왕>은 공포와 공황이 인간의 판단을 흐리게 함으로써 악의를 가진 소수 권력에 쉽게 동화되고 굴복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고발한다. 영화는 인간 내면의 야성적 본성을 몇몇 상징물로 형상화함으로써 우리의 문명과 질서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인가를 되묻는다. 우리가 우리 외부에 있는 파리 대왕에게 쉽게 굴복되지 않고, 내면에 있는 파리 대왕을 어떻게 제어해야 할지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영화이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으로 영화·영상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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