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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달이 지는 밤> - "기억의 궁전"
[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달이 지는 밤> - "기억의 궁전"
  • 이승민(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11 1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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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풍경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장소는 장소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말해지고, 장소에 사는 사람들은 또한 장소를 통해 만들어진다. 서울 사람,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 제주 사람 같이 지역 명에 사람을 붙이는 것도 그 지역과 그 지역 사람들이 서로 공명한다는 의미일 터다. 장소의 리듬 역시 거주자의 리듬과 닿아있다. 도시 생활권 지역은 출퇴근 시간을 기준으로 시간을 예측가능한 방식으로 설계하고 수행한다. 반면 농촌 지역의 시간은 농사의 절기와 맞물려 자연의 순환 리듬을 따른다. 설계하기 보다는 따른다. 무주 지역을 담은 영화가 한편 나왔다. 무주 풍경과 사람 그리고 리듬을 담은 <달이 지는 밤> (영문명 Vestige 2022)은 영화 제목에 담은 두 개의 키워드, “달”과 “흔적”을 품고 무주라는 장소성을 펼쳐낸다.

 

<달이 지는 밤>은 김종관, 장건재 두 감독의 두 작품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이다. 무주를 배경으로 한 두 작품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다른 듯 마주보고 있다. 첫 번째 작품은 떠난 자의 방문에서 시작한다. 한 중년 여성이 버스를 타고 마을로 돌아온다. 그녀는 숲에 묻어둔 박스를 찾아 지금은 폐허가 된 집에서 하루 밤 잠을 청한다. 달이 지고 새벽녘에 일어난 그녀는 초를 켜고 박스에 넣어둔 물건을 풀어 방울을 흔들며 제를 올린다. 무당인 그녀가 죽은 딸을 애도한 것이다. 그리고 황급히 집을 나선다. 영화는 이어, 혼령이 되어 집에 들어온 딸의 시선과 시간으로 그간의 사연을 보여준다. 영화는 엄마의 길과 딸의 길을 같은 선상에서 그러나 반대방향으로 보여주면서 삶의 이편과 저편에서 애도와 아쉬움을 이어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딸의 길 위로 엄마의 목소리를 담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한편의 시를 그려낸다. 그렇게 둘은 잠시 정류장에 앉아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채지 못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느끼면서.

 

두 번째 작품은 돌아온 거주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서울에서 학교를 마치고 무주로 돌아온 민재의 일상을 담는다. 공무원으로 마을 어르신 돌보는 업무를 하고, 어머니 고추 수확을 돕고, 남자친구와 백숙을 요리해 먹는다. 그녀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오랜 친구 경윤이 찾아오고, 담배를 빌리는 할아버지가 안부를 묻고, 혼술하는 어머니에게 노인이 등장하고, 남자 친구에게 중절모를 찾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일상 속에는 혹은 일상의 틈새에 혼령이 함께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영화는 삶과 죽음을 가르기 보다는 삶과 죽음의 공존을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의 자리에서 서로의 방식으로 마주하며 안부를 묻고 존재감을 느낀다. 민재의 시선으로 마주한 마지막 장면이자 죽은 자들의 마을 길 행진은 참으로 초현실적이지만 또한 묘하게 일상적이다.

 

두 영화는 모두 삶과 죽음을 다루면서 공간에 스며있는 혹은 공간을 이루고 있는 존재로서 산자와 죽은 자의 공존과 공존불가를 담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문 제목 <Vestige 2022>에서 2022는 현재 년도를 언급하는 것이지만 2와 0의 조합이 새로운 의미를 더한다. 영화는 이승과 저승으로 경계 지워진 삶과 죽음이 아니라 인간사의 순환 리듬으로 삶과 죽음을 담고 이들의 공존을 그려낸다. 마치 태어나면 죽는 이치처럼, 만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 함께하기도 하고, 겨울이 오면 여름이 오는 그런 자연 순환 리듬을 공간의 흔적이자 지층으로 담는다. 그리고 말한다, “죽은 것은 죽은 것이지만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것”이라고. <달이 지는 밤>은 달이 지고 나면 깜깜한 어둠이 오기도 하지만, 달이 지고 나서 아침이 오기도 한다는 그런 자연의 순환을 무심한 듯 기입하고 있다. 그 속에서 영화는 “길” 이미지로 무주 그 자체를 드러낸다. 마을에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 있는 법이니까. 길이라는 비장소가 영화 속 무주에서는 연결과 관계의 흔적을 품은 장소로 읽히는 체험을 안겨준다.

영화는 무주라는 지역의 역사적인 집단 기억이나 지리적 사회적인 공적 기록이 아니라, 여기에 상상적 틈을 열어 인간의 순환 리듬을 장소에 불어넣는다. 흥미로운 점은 무주 산골영화제가 제작한 두 번째 영화 <무주>는 <달이 지는 밤>에서 벌린 틈을 다시 모아 역사적 집단 기억을 무주 사람들의 일상적 기억으로 풀어낸다. <달이 지는 밤>이 두 편의 옴니버스로 마주보기를 한다면, <달이 지는 밤>과 <무주>는 각기 구축한 “기억의 궁전”을 통해 무주를 만날 수 있다. 또 다른 이미지와 기억의 결손을 새롭게 기록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이승민
영화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 강연자로 활동 중이다.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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